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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르다

_ [프롤로그]

by 유재은


온전히 머무르는 시간이 하루를 살아내게 한다. 마음이 기우는 순간들. 그 찰나에 번지는 미소가 행복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른이라는 옷을 입기 전에는 작은 일에도 온몸으로 웃는다. 아기는 엄마 아빠의 얼굴만 보아도 우주를 품은 듯 까르르 댄다. 어린이는 가위바위보에서 이기기만 해도 환호성을 지르고, 동그라미 눈 가득 내리는 시험지를 받은 날이면 비눗방울처럼 퐁퐁 웃음이 날아오른다. 문득 어두운 운동장 한가운데에 앉아 친구의 생일을 축하해 주며 별을 바라보던 고교 시절이 떠오른다. 쉬는 시간이 끝나 헐레벌떡 뛰어 들어가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던 친구들.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이 반복되는 야간 자율 학습 속에서 단비 같은 시간이었다. 그 모든 행복은 순간에 오롯이 머무를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른이 되고 싶었다. 부러웠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쉬고 싶을 때 쉬며 자신의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갓 스무 살 때는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함에 가슴이 두근거렸고, 아득한 미래에 대한 불안함마저 근사했다. 어른으로서 처음 누리는 것들에 머무르며 반짝일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모든 순간에 머물렀다. 이어폰을 나눠 끼고 하염없이 앉아있던 벤치. 계절마다 제빛을 품고 있던 고궁. 걷고 또 걷는 길. 가족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 기도. 그리움. 온마음을 기울여 머무르기.


하지만 어른이 된 어느 시절부터 바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면서 그것이 잘살고 있는 거라 생각하게 되었다. 흐르지 않으면 도태된다고 여기던 생의 계절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렇게 말하는 게 부끄러웠다. 그 안에 담긴 어설픈 허세와 누군가를 밀어내려던 마음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공과금 우편물들을 무심히 넘기다 단어 하나에 마음이 내려앉았다. 생애전환기. 마흔이 된 사람을 위한 건강검진 안내장이 삶의 전환점을 일깨워주며 마흔통이 시작된 것이다. 도서관 서가에 꽂힌 책들 중 청춘이라는 것만큼이나 마흔이라는 키워드가 많다는 것도 그제야 알게 되었다. 돌아보니 내 삶은 무채색이었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급급하게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이것만 이루면…….’ 그토록 부러워하던 어른이 된 나는 남들처럼 대학을 가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해, 딸들 역시 그 지난한 시계에 맞춰 살아가게 키우고 있었다. 그때 생애전환기라는 이정표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며 미루어 왔던 꿈을 다시 이끌어 냈다. 헛헛했던 가슴속에 커다란 일렁임이 몰려왔다.


다시 치열하게 읽기 시작했다. 사랑으로 가슴앓이하던 시절에 그를 사랑하는 이유가 그냥 좋아서였던 것처럼 어린 시절부터 책이 그저 좋았다. 입시에 도움 되지 않는다며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진 헤르만 헤세의 책은 교과서 밑에 숨겨 놓고 보기도 했다. 책을 읽는 것은 여전히 돈이 되지 않지만 그것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삶에 빛이 된다. 그냥 걸어가는 마흔 고개가 될 수도 있었지만, 문장에 머무르며 발견하는 시간들이 마음의 구멍을 메워주고 살아감을 헤아릴 수 있게 해 주었다.


때때로 마음을 추스를 수 없는 날이면 되도록 사람을 피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뾰족해진 말들이 유리조각이 되어 날아가 끝내 나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그러기 전에 얼른 자리를 잡고 책을 펼친다. 문장에 머무르기. 그것만큼 위로가 되는 것은 없다. 복잡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는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소설을 꺼낸다. 그 속에서 다른 이의 삶을 내 것처럼 살아가다 보면 돌아온 내 삶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진다. 각박한 날들에 치일 때면 다정한 시를, 아무것도 못할 만큼 힘든 날이면 친구 같은 에세이를 찾아 손에 꼭 쥔다. 나와 닮은 문장들로 마음을 덮으며 차가운 생의 계절을 녹인다.


머무름은 진정한 나아감을 위한 숨 고르는 시간이다. 무엇인가에, 또는 누군가에게 마음이 기우는 순간들이 모여 삶이 된다. 그리하여 조금씩 노력한다. 마주하는 누군가의 목소리와 마음에 머무르기. 그 시간을 얼마나 더 누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걸 배운 덕분이다. 그렇게 최선을 다하면 또 다른 최선이 돌아옴에 감사한다. 마음을 건네면 더 깊은 마음을 담아 안아주는 사람들. 여전히 좋은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다.






새로운 연재, [동사의 순간들].


동사는 사물의 동작이나 작용을 나타내는 씨(품사)입니다. 수많은 동사의 순간들이 하루를 흐르고 있지요. 발견해 머무르고 싶었습니다. 살아가며 마주하는 동사의 순간들이 세월의 강에 희석되고 휘발되기 전에 문장에 머무르게 하려고요. 삶의 움직씨(동사)가 그림씨(형용사)를 만나 느낌씨(감탄사)를 불러낼 수 있도록 말이에요. 동사動詞가 동사凍死하면 슬플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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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