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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Oct 02. 2021

고레에다 히로카즈

왁자지껄한 세상에서 작은 이야기를 짓는 작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국내에 에세이 세 권을 출간했다. 모두 뛰어난 문장을 가졌다거나 눈이 번쩍 뜨이는 바가 있는 책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책을 찾아읽는 이유는 그냥 사람이 좋아서다. 정확하게 말하면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쓴 회고를 읽으면서 그의 영화가 내게 남긴 추억을 되짚는 걸 즐긴다. 마치 원작을 좋아하면 영화의 질이 좀 떨어져도 좋게 보이는 것과 비슷한 심리다. 영화 <더 로드>를 보면 원작자 코맥 맥카시가 그린 황량한 디스토피아의 풍경이 떠오르고, 영화 <건지 감자 껍질 파이 북클럽>을 보면 원작자 메리 앤 셰퍼의 서간 소설이 내게 남긴 애틋함이 되살아난다. 그렇게 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심심한 글을 읽으면서 그가 만든 수 편의 영화를 내 머릿속에서 하이라이트 필름으로 재상영했다.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읽으면서도 몇몇 영화의 장면을 곱씹으며 추억에 빠졌다. 비록 이 책은 대체로 심심하고 평이한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내가 그렇게 모른척할  있는 사람이 아니.  오는  아침, 부산국제영화제 매표소에서  시간 줄을 서서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GV 표를 끊은 일이나, 영화의 전당에 들어서서 영화를 보고 나서 그의 말을 경청했던 기억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내게  잊지 못할 추억이다. 압구정 CGV 아트하우스에서 <걸어도 걸어도> 보고 밖을 나서 역까지 걸어가던 가을날의 골목길 풍경도 각별한 기억으로 아있. <원더풀 라이프>를 보고 글쓰기 모임 멤버들과 얘기를 나눴던 시간이나, <아무도 모른다>를 보러 간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내 손을 꼭 잡았던 그의 온기도 다 기억이 난다. 그리고 몇 해 전 돌아가신 키키 키린의 고운 모습도 아련하고 그립다.


  개인적으로 어떤 감독이   작품이라도  마음에 감명을 주었다면  감독을 잊을  없다고 생각. 그건 책이나 노래, 연극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예술가가   대륙 어디선가 사망했다는 짤막한 기사도 절대로 심상하게 넘길  없다.  친척이 죽었다는 소식보다, 내가 인상적으로  작품을 만든 작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크게 다가오는  마찬가지다. 같은 이야기를 통과한 사람이 가지는 동류의식은 어떨 때는 혈연보다  짙은 색을 띤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내게 좋은 이야기를 주었고, 그와 시간을 쌓아가면서 진심을 연통한 사람끼리의 비밀스러운 유대가 생겨버렸다. 비록 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은 까맣게 모를 일방적인 사랑이지만, 이런 연대감은 가족주의나 민족주의와 같은 강력한 이데올로기마저 쉽게 초월해버린다.


 한국은 일본이라는 나라에 응어리가 맺혀있지만, 어느 자리에서든 고레에다 히로카즈 얘기만 나오면 다들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오직 그의 영화만 떠올린다. 영화가 지닌 보편적인 공감대는 일본어를 쓰고 일본 소도시를 배경으로 영화를 찍어도 이야기  자체로서 살아남는다. 실로 영화적인 추억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영화는 대부분 일본의 평범한 가정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어머니의 정서와도 크게 멀지 않다. 오히려 낯선 나라에도 나와 영혼과 정신을 교통   있는 누군가가 살고 있다는 기쁨과 위안이  게 다가온다. 위기에 봉착해서 허우적거리는 인물과 함께 고민하다 보면 심리적 거리감 점차 지워지게 마련이다. 영화가 가진 이런 탈국적성은 이웃 얼굴도 모르고 사는 요즘 세상에서는 뭉클한 구석으로 느껴진다. 일단 감명 깊은 작품을 만나면  작가를 누구보다 가깝게 생각하고 어쩌면 평생 그를 마음에 두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누가 추천하거나 알려주지 않아도  감독님의 영화가 극장에 걸리면 아무 생각도 없이 우선 가서 본다. 그와 나는 묻고 따지고  사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도 나오기 전에 감독 이름만 듣고 계약을 했다 어느 유명 배우 말처럼 나도 그와  사이 각별함을 뻐기기 바쁘다.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에는 유별난  없는 글이 가득 실려있지만, 생활인으로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대목에는 종종 밑줄을 쳤다. 작가로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권태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매일  고쳐 생각하고, 그런 고민을 자신의 블로그에 담아뒀다. 쉽게 잠이 오지 않는 새벽 자신을 다독이는 문장이 빼곡하다. 창작의 동력을 얻기 위해서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자신에게 이른 말까지 탈탈 털어내서 쓰는 모습에서는 끝없이 자신을 긁어모아서라도 창작을 해야 하는 작가의 고단함이 엿보. , 마치 카페 옆자리에 앉은 친구처럼 다리를 꼬고 그의 고충을 엿들을  있었다. 그만큼  세상은 해결할  없는 고민이 가득하고, 글로 쓰거나 영화로 만든다고 해서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비관적인 어조를 읽어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렇게  사람과 삶 전반에 놓인 고민들을 나누다 보면 더는 그의 작품을 냉정하게 판단할  없다. 우린 더는 남이라고 부르기 어려워진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화려하지 않지만 정확한 단어를 조탁하는 솜씨가 있는 작가다. 그건 아마도 쉽게 재단하지 않는 그의 화법이 지닌 특징일 것이다.  아는 만큼만 말하려고 잠시 말을 고르는 순간이 좋다. 화려한 언변으로 말을 잘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확하게 말을 잘하는 사람도 있다.  개인적으로 수줍고 주저하는 말투를 지닌 사람을 좋아하는데, 그건 아마도 아무것도 확신할  없는 세상에서 부쩍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기 위한 기제일 것이다. 그래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글에서나 영화에서나 주저할  끌린다. 납득할 수 없는 헤피엔딩을 경계하고, 무작정 인물을 끌어내리는 무책임한 슬픔도 용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모든 사항에 대해서 물렁물렁한 사람은 아니다. 특히 사회 현안과 영화 연출과 같이 자신이 물러설  없는 지점에서는 단호하다. 예를 들면, 영화가 어떤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거나 작품을  관객의 반응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지적에 대응할 때는 말투부터 거칠어진다.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삶에 대해서 자신이 비난할 권리는 없지만, 누군가에게 잣대를 들이밀며 무례하게 굴면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자세다. 온갖 고민이 출몰하는  도시에서 상식의 선을 지켜내겠다는 각오로 들렸다. 그는 자신의 영화를 지독히도 정의하기를 거부했지만,  그런 상식의 선이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인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지키려는 영화의 본령이 아닌가 생각했다.


 책에 수록된 글은 시간 순서가 아니라 주제에 따라 묶여있다. 그래서 읽다 보면 젊은 고레에다와 이제는 지긋이 나이가  고레에다가 번갈아 나온다. 30대와 60 바라보는 그는 확실히 다른 사람으로 느껴진다. 영화를 만들어 오며 그가 생각한 것도 미세하게나마 달라져 왔다. 나이를 매해 한 살씩 먹다 보니 지금  나이가 자연스러운 것처럼, 그의 영화를 매해 즐기다 보니  소년 같던 그가 이제 중견 감독이 되었다는 사실에 약간은 사무친 기분이 든다. 얼마나  그의 영화를 누리며   있을까.  새삼스럽게 그와 이렇게 나이를 먹을  있다는  행운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고마움을 글로 남겨서  늦기 전에 표현하고 싶었다. 그가 내게 선사한 영화적 순간에 하나하나 코멘트를 달면서 전에는 쑥스러워서  말하지 못했지만 당신이 만든 세계를 누리며  행복했다고 감사를 표하는 글을 썼다.


 몸에 힘을 주던 시기를 넘어 느슨하게 풀리는 것마저 받아들여야 하는 요즘에 이르기까지 그는 근면하게 영화를 만들어왔다.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있다면 제목에도 붙은 '작은'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일 것이다. 예술가로서 그가 가진 겸양으로도 보이는 '작은'이라는 수식어는  어떤 수다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적이다. 소설이 결코 대설이 아닌 것처럼, 숨죽이며 사는 보이지 않는 이들마저 결코 모른 척하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로 읽힌다. 예나 지금이나 그가 만든 작은 세계를 신뢰하며 찾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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