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지 않는 호기심으로 다방면을 아우르는 교양인
아침 7시 알람이 울린다. 어서 일어나야 한다. 몸을 일으키기만 하면 기계처럼 출근 준비를 마칠 것이다. 십 년을 넘게 해온 짓이 아닌가. 근데 좀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알람을 끄고 십 분 후를 기약했다. 곤혹스러운 몸뚱이가 이불속으로 녹아든다. 초조한 마음으로 잠에 빠졌다. 몇 번이나 켜고 껐을까. 더는 지체할 수 없을 때가 돼서야 가까스로 눈을 떴다. 어렵사리 몸을 추스르고 어제 듣던 팟캐스트를 켰다. 언제부턴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난 <이동진의 빨간책방>을 벗 삼아 출근 시간을 지탱해왔다. 운전하면서도 러닝머신 위에서도 이동진 작가는 소설가 김중혁과 신나게 떠든다. 빨간책방은 7년의 대장정을 끝으로 종영했지만 난 전 회차를 정주행 한 것도 모자라 그냥 생활 전반에 배경음악처럼 깔아놓고 산다. 이 나긋나긋한 아저씨가 뭐가 좋은지 좀처럼 질리지 않는다. 뿐만이 아니다. 난 그가 추천한 책을 읽고, 그가 기고한 글을 빠짐없이 찾아 읽으며 자투리 시간을 용해한다. 그가 사회를 맡은 시네마톡 행사에 예매하고, 그가 추천리스트에 올린 영화를 챙겨본다. 그가 매긴 별점과 내 별점을 비교하고, 그가 쓴 평론을 읽으면서 내 감상과 비교해 보는 게 어느새 일상이 되었다. 근면한 작가 이동진은 일상 곳곳에 자신의 지성으로 축대를 쌓아놓고 나를 불러들였다. 난 그 속에서 꽤 많은 특권을 누리며 사는 중이다.
이동진은 평론가라는 정체성 외에도 여러 결을 지녔다. 그는 14년간 기자로 활동했던 언론인으로 저널리즘에 입각한 글쓰기에도 능하다. 또한 3권의 기행 수필을 쓴 여행작가이기도 하다. 여기에 더해 이동진은 소문난 애서가로 독서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출간했고, 최근엔 자신의 서가에 담긴 책과 물건을 탐구하여 쓴 <파이아키아>라는 두꺼운 책을 냈다. 이처럼 난 그의 그칠 줄 모르는 지적 호기심을 옆에서 구경하면서 모방한다. 그를 롤모델로 삼고 맹목적으로 흉내 내기에 이른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어쩌면 속아 넘어가면서도 그냥 믿어버리는 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세계관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 어떠한 의문도 제시하지 못할 때 사람은 위험해질 수도 있지만, 그가 균형 잡힌 지식인이라면 그보다 믿을만한 도피처도 없을 것이다. 나는 그의 탐험가 기질을 믿고 어느 분야든 따라가서 어쭙잖게 찧고 까분다. 문학은 물론 경제학, 도시공학, 뇌과학 그 싫어하던 세계사까지 그의 저서에는 다방면의 지식이 산재해있다. 이동진을 보면 호기심이 많다는 건 삶이 지루할 수 없는 이유로까지 느껴진다. 어디든 가리지 않고 들어가서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태도는 일직선의 방향에 골몰하던 내게 방사형으로 넓어지는 삶도 충분히 가치가 있을 수 있음을 알려줬다.
이동진이라는 사람의 핵심은 독서라는 지층을 기반으로 한다. 독서는 시간 제약을 넘어 제3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터준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에 굳이 가지 않더라도 지중해 공기를 마실 수 있고, 남수단 내전을 직접 체험하지 않아도 그들의 비극과 공명한다. 독서는 누군가의 삶을 상상하고, 어느 순간 실제보다 현현한 감각을 얻어오는 능동적인 경험이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독서의 신비로운 기쁨을 나누고픈 욕심을 피력한 바 있다. 나는 처음 책을 만졌을 때, 냄새를 맡아보고 지근거리에 두며 애정을 쏟던 애송이 시절을 기억한다. 그렇게 읽는 책들이 모여 취향이 생겼고 이를 발판 삼아 내 이야기가 한 권의 책으로 엮이길 기대하며 산다. 조르바와 개츠비가 날 찾아왔고 그들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 발품 팔아 크레타 섬에 들르지 않아도, 복잡한 뉴욕 어퍼이스트사이드를 걷지 않아도 독서는 날 어디로든 떠밀었다. 난 책을 가방에 넣고 사무실의 김 대리 신세에서 벗어나 침대에 걸터앉아 문학 소년이 된다. 침대 위 30촉 백열등에 의지해 더듬더듬 문장을 읽어 내려간다. 이렇게 이동진은 어느새 내 일상에 스며들어 의식하지 못한 새 하나의 세계관이 되었다. 여전히 쉼 없이 뭔가를 읽어 내려가는 그의 세계를 경애한다.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2017)
<이동진 독서법>은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버린 별점 아저씨 이동진을 향한 글이다. 주로 자신이 천착한 예술을 대상으로 글을 써왔던 이동진이 마치 리버스 샷처럼 방향을 틀어 자신에 관해 쓴다. 이동진의 말과 문장엔 익숙하지만, 인간 이동진엔 어두웠던 이들에게 선물 같은 책이다. '이동진식 삶'의 정체는 독서라는 지층을 기반으로 한다. 그의 삶에 있어서 독서란 지성의 토대다. 인생이라는 한정된 시간에서 독서는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제삼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터준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에 굳이 가지 않더라도 지중해 공기를 마실 수 있고, 남수단 내전을 직접 체험하지 않아도 그들의 비극과 공명한다. 뭐든 유튜브로 보는 시대에 독서의 즐거움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낡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동진에 따르면 독서는 12시간 넘게 지속해도 지치지 않는 유일한 오락이다. 그는 한 영화제에서 종일 영화를 보다 구토를 한 기억을 언급하며, 독서만큼 장시간 몰입할 수 있는 매체는 없다고 자신한다.
이동진은 흥미 위주의 독서를 추천한다. 재밌을 수 있다면 어쨌든 계속할 수 있으니까. 완독에 대한 부담을 버리고, 독서를 신성시하는 고정관념을 떨쳐내면 한결 읽기가 수월하다. 우선 독서에 근력을 붙이면 어렵고 두꺼운 책도 거뜬해진다. 매일 성실하게 탐독하면 독서는 습관으로 굳어진다. 겨우 1인분의 삶을 구해내는 정도지만, 언어를 통해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 도달할 수 있다. 문학은 누군가의 삶을 상상하고, 어느 순간 실제보다 현현한 감각을 얻어오는 능동적인 경험이다. 그 신비로운 기쁨을 나누고픈 애서가의 자기 고백은 구구하고 절절하다. 그는 책과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를 상기한다. 처음 책을 만졌을 때, 냄새를 맡아보고 지근거리에 두며 애정을 쏟기 시작한 시절을 말한다. 누구나 독서를 향한 애틋한 기억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다. 독서가 쌓여 취향이 생기고, 이를 발판 삼아 하나의 인생이 세워진다. 이동진은 독서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쁨을 보편적인 것으로 느껴지게끔 자신의 세계를 확장한다.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그 영화의 비밀, 2009)(그 영화의 시간, 2014년)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는 박찬욱, 봉준호, 이명세 등 한국의 영화감독을 인터뷰한 책이다. <그 영화의 비밀>은 756페이지, <그 영화의 시간>은 652페이지로 작가의 집념이 고스란히 녹아든 영화 책이다. 형식주의자로 통하는 이동진은 영화 대사를 고스란히 질문으로 옮기는 독특한 방식으로 인터뷰를 진행한다. 감독은 자신이 직접 쓴 대사가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통에 고심 끝에 답변을 내놓는다. 관성적인 질문을 피한 탓에 신선하고, 질문 자체에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평론가와 감독은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 속에 인터뷰를 진행한다. 제대로 질문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답을 얻을 수 없듯, 인터뷰어가 어떤 질문을 하느냐가 대화의 질을 좌우하는 법이다. 이동진은 자신이 만든 틀 안에서 치열하게 고민한다. 감독들이 지치진 않을까 우려하게 될 만큼 처절한 대화가 이어진다.
비평이란 영화를 얼마나 아는지 명시하는 글이 아니다. 영화를 독해하는 일은 순전히 대화에 가까워 결국 개인의 감각을 서술하는 데 그친다. 인위적으로 만든 의미란 때론 공허해서 영화 비평을 무용하게 보이게끔 한다. 결국 평론가는 글이 가진 필연적인 오차를 받아들이고 어떤 느낌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이동진은 노면이 거칠더라고 끝까지 파헤치는 근면한 노동자다. 관람을 통해 다다를 수 없었던 영화의 어느 한 측면을 인터뷰를 통해 섭렵한다. 영화라는 가능성을 최대치로 끌어내기 위해 질문을 다각도로 나눈다. 적어도 독자가 신뢰할 수 있도록 수없이 뒤를 돌아보며 맥락을 짚어낸다. <부메랑 인터뷰>는 양과 질 어느 측면에서도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역작이다.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2019)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는 이동진이 기자 시절에 쓴 글부터, <씨네 21>에 기고한 비평과 <이동진의 영화풍경>에 연재한 글을 비롯해 자신의 블로그에 쓴 포스트까지 모두 모은 비평집이다. 평론가의 목소리가 점점 더 사위어가는 요즘 원고지 삼천 매 분량의 책을 냈다는 것 자체가 사건이다. 그는 이 책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려 넣으며 한국에서 가장 인기 많은 영화평론가의 위상을 증명했다.
우리는 영화를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영화의 상징은 어느 정도까지 해석해야 마땅할까. 이동진은 스피노자의 “깊게 파려면 우선 넓게 파야 한다”라는 말을 자주 인용한다. "깊이 없는 넓이는 가능하지만, 넓이 없는 깊이는 불가능하다." 이동진의 영화 평론도 마찬가지로 너른 들판에서 여러 맥락을 집합시켜 의미의 선을 만든다. 가령 영화 <버닝>에 관해 쓴 원고지 80매 분량의 비평은 한 영화가 자아내는 복잡한 감정을 끈질기게 점검한다. 인물을 하나씩 둘러보고, 촬영 방식에 의문부호를 단다. 고되고 피곤해도 어쩔 수 없다. 질문이 없이는 비평은 성립하지 못한다. 2시간의 영화를 보다 보면 무수한 생각이 스친다. 평론가는 메모지를 부여잡고 흩어지는 생각을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한다. 극장을 나와서 근처 카페에 들려 생각을 짜낸다. 상념을 구슬리고 상상을 그러모아 적는다. 비평을 통찰에 몰아넣고 게을러지기보단, 장면을 잘게 쪼개서 의미를 따지는 지난한 작업을 이어나간다. 마음속에서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감각을 언어로 응축한다.
이 글을 쓰며 이동진의 책을 거실에 쌓아뒀다. 그의 문장을 더듬더듬 읽던 지하철의 공기를 떠올렸다. 잠 못 드는 침대 위에서 30촉 백열등으로 비춘 애틋함이 느껴진다. 이동진은 내 일상에 스며들어 의식하지 못했지만, 오늘 새삼스레 고마움을 표한다. 특히 7년간의 시간 동안 늘 곁을 지켜줬던 <빨간책방>과 이번 주에 92회를 맞은 라이브톡 행사는 내 삶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여전히 쉼 없이 뭔가를 사랑하고 구축하는 그를 경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