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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Feb 16. 2019

무라카미 하루키

흘리지 않는 사람이 지닌 위엄

 무라카미 하루키는 늘 새책을 내면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하지만 어째 작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 흔한 인터뷰조차 찾을 수 없다. 출간하면 온갖 홍보 행사에 참여하는 요즘 작가들과 달리 하루키는 두문불출이다. 그는 데뷔 이래 유별날 정도로 대외 활동을 기피해왔다. 그 결과 거대한 명성을 지닌 작가라면 하나쯤은 흘리기 마련인 말실수 하나 없다. 난 평생 하루키를 읽어왔지만, 그의 목소리를 알지 못한다. 그는 SNS에도 일절 손을 대지 않아 기자들은 과거 인터뷰 발언을 재탕 삼탕 해서 인용하곤 한다. 그만큼 하루키는 오직 작품으로만 독자와 힘을 겨뤄왔다. 세상이 그를 노벨문학상 후보로 치켜세우고, 선인세로 수십억을 쥐여줘도 그를 볼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책장뿐이다. 집필과 무관한 활동과는 거리를 두고 매일 아침 근면한 노동자처럼 쓰는 그의 라이프 스타일은 이제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 정시에 집필을 시작해 정량의 원고를 써낸 후 퇴근하는 검약한 작업 방식은 그의 소설과 똑 닮아있다. 기상천외한 섹스신만 빼면 모든 게 평균에 가까운 남자의 모험이다. 그를 보면 사진가 '척 클로스'의 명언이 떠오른다.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난 그저 일하러 갈 뿐이다.” 


 일요일 아침 주위에 널린 책을 펼친다. 눈꺼풀이 무거워 가벼운 책을 고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은 내가 즐겨 집는 주전부리다. 모로 누워 한 발을 베개에 올리고 술술 넘겨본다. 별 시답잖은 내용이 가득하지만, 어깨에 힘을 뺀 문장이 정갈하다. 그는 세상사 메이는 법 없이 느슨한 얘기를 한다. 누군가 내게 전작주의(全作主義)에 관해 묻는다면,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즉시 떠올릴 것이다. <상실의 시대>를 처음 읽었던 스무 살 무렵부터 난 여전히 그의 곁을 맴돌고 있다. 처음 소설에 재미를 붙일 무렵 서늘한 방 한구석에서 그의 소설들을 읽었다. 소설을 웬만큼 읽자 알록달록한 제목이 붙은 에세이가 눈에 들어왔다. 작품에 대한 호감이 인간 하루키로 번져나갔다. 그는 이제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도 인스타그램에 들어가면 그의 문장을 옮긴 무수한 피드를 읽어볼 수 있다. 독자는 하루키의 지적인 사생활을 통해 일상에 사사로운 질감을 섭취한다. 이번 글에서는 하루키의 대표작을 통해 흘리지 않고 사는 검약한 하루키의 작품세계를 탐구해본다.  


노르웨이의 숲(1987)


 <노르웨이의 숲>은 와타나베라는 남자가 막 도착한 비행기 안에서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들으면서 과거를 회상한다. 와타나베는 오랜 친구였던 기즈키의 자살로 큰 충격을 받는다. 대학교에서 기즈키의 연인이었던 나오코와 재회하면서 사랑에 빠지지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던 나오코 마저 자살을 택한다. 와타나베는 다시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고 하지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바깥세상에 나설 준비가 됐는지 알지 못한다.

 <노르웨이의 숲>의 배경이 되는 1960년대 후반은 일본에서 ‘전학공투회의’가 한창일 때다.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고 체제를 전복하려는 학생들이 대학가를 점거하고 목소리를 드높인다. 이들과 멀찍이 선 화자 ‘와타나베’는 눈에 불을 켠 무리를 미심쩍어한다. 사색보다는 일갈하길 좋아하는 행동주의자가 만든 세상은 얼마나 포악한가. 와타나베는 교정을 홀로 거닐며 스스로 고립되길 자처한다. 세계는 이념 투쟁으로 요동쳐 다수는 그 성난 호랑이에 올라탄 형세다. 변혁의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사회와 동떨어진 와타나베 같은 청년을 루저로 취급했다. 하지만 하루키는 텅 빈 방에서 체념을 머금은 채 한 여인을 그리는 와타나베의 처지에 이입했다. 와타나베는 교외의 어느 한적한 마을 셋방에서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고 마일즈 데이비즈의 재즈 넘버를 듣는다.

 와타나베를 둘러싼 주위 사람들은 버릇처럼 목숨을 끊는다. 칠판에 무언가를 적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학생처럼 망설임이 없다. 반복되는 죽음은 횃불처럼 그를 비춘다. 와타나베는 그 과정에서 여러 여인과 섹스에 탐닉한다. 그를 둘러싼 여인들은 다정하지만, 결코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수 없다. 재빠르게 도약하는 세상은 멀찍이서 달아나고, 뒤처진 와타나베는 방탕하게 시간을 허비하는 데 익숙하다. 그의 일상엔 재즈와 술, 기괴한 상상이 곁가지처럼 솟아있다. 시대의 소음을 피해 멀리 달아난 청춘은 고독에 사로잡혀 돌아올 리 없는 여인을 그린다.

 <노르웨이의 숲>은 한국에 1989년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당시 세계는 냉전 시대가 옅어져 가던 시점이었다. 경제는 고도로 성장했지만, 세상을 바꾸겠다는 정신적인 동력이 갈피를 잃은 상태였다. '상실의 시대'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이 소설은 개인의 내밀한 삶이 사회 정의보다 중요할 수 있다고 속삭였다. 갑자기 넥타이를 매고 회사에 출근해야 했던 청년들이 공허에 시달릴 때 소설은 정당한 개인주의의 가치를 선물한 셈이다. 이 작품의 인기를 바탕으로 점차 하루키의 다른 소설들까지 한국에 출간됐다. '하루키 바이러스'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고, 그는 한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외국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렉싱턴의 유령(1997)


 1991년 무라카미 하루키는 유럽과 미국을 오가다가 거품경제에 휘청이던 일본으로 돌아왔다. 오랜 유학 생활에 지쳤던 그는 일본 사회의 뒤틀린 공기를 마주하고 극심한 소외감을 느낀다. 현재 그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놀랄만한 일이지만, 90대 초 일본 독자들은 하루키의 문학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유독 미국 문학을 동경했던 하루키는 당시 일본 문단에서 '레이먼드 챈들러'나 '스콧 피츠제럴드'의 아류 소리를 들었다. 당시 유럽 독자들의 인기를 바탕으로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라선 하루키는 일본 문단과 자국민의 냉대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단편집 <렉싱턴의 유령>은 여전히 일본 사회에서 외톨이임을 느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방인의 시점으로 일본 사회를 바라본 첫 소설집이다.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다중우주론에 가까운 하루키 특유의 세계관은 이 시기에 공고해졌다.

 <렉싱턴의 유령>에 수록된 7편은 본디 쓸쓸하고 공허한 이야기다. 탈 국적의 모호한 세계관과 미국 문화에 대한 맹목적 동경이 곳곳에 배어있다. 캐릭터는 단순하다 못해 심심해 보이는 삶을 살아가고, 오직 재즈와 클래식, 독서와 서구식 요리라는 취향에만 골몰한다. 작가는 사회 정체성이 연약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내밀한 속내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데 공을 들인다. 여자 없는 남자들은 커피를 앞에 두고 기묘한 이야기를 떠올린다. 잠을 자다 새벽에 깨서 집 안에서 유령을 본 남자는 그 사실을 자신만 알고 집주인에겐 숨긴다. (렉싱턴의 유령) 사랑하는 아내가 죽은 후에 그녀가 남긴 수천 벌의 명품 옷에 갇힌 남자는 새가 되어 훨훨 날아가는 환상을 품는다. (토니 타키타니) 전업주부는 자신 앞에 나타난 녹색 짐승의 고백을 듣고 어떤 기억을 떠올린다. (녹색의 짐승) 낯선 사람과 마주한 학생은 학창 시절에 왕따를 당했던 경험을 털어놓는다. (침묵) 얼음사나이와 결혼한 여자는 모험에 가까운 자신의 삶을 회고한다. (얼음사나이)

 이처럼 작품 속 화자들은 현실과 유리된 환상설의 세계를 떠올리며 암흑에 가까운 의식을 깊게 파고든다. 우리 사회는 보란 듯이 잘 흘러가는 듯 보이지만 개개인의 내면엔 괴물과 같은 어둠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 하루키의 눈에 비친 일본 사회는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에 불과했다. <렉싱턴의 유령>은 내성적인 분위기로 사회 문제에 무관심한 작가로 보였던 무라카미 하루키가 본격적으로 일본 사회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시기에 출간됐다. 세기말의 하루키는 작가로서 세상에 기여할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해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의 피해자 인터뷰를 정리한 논픽션 <언더그라운드>를 출간한 것도 이 시점이다. 하루키는 현실과 선을 긋던 청년 시기를 넘어 작가로서 원숙기에 접어들었다는 평을 받았다.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2013)


 다자키 쓰쿠루는 역을 만드는 남자다. 도시 곳곳에 자리한 역사를 개보수하고 철로를 놓는 일을 한다. 그는 다양한 인간들이 드나드는 역이라는 공간을 사랑한다. 언제든 홀연히 떠날 수 있고 한동안 잊고 지냈던 누군가와 재회할 수 있는 장소다. 소설의 첫 장에서 그는 말한다. 죽음밖에 생각할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고. 이 난데없는 고백엔 고통스러웠던 과거와 의미를 상실한 현실이 뒤섞여있다. 그는 역을 통해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한다. 나는 왜 그들에게서 버려졌는가.

 쓰쿠루에겐 네 명의 친구가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름에 저마다의 색을 품은 멋진 친구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한 모임을 통해 쓰쿠루와 친해졌고, 완벽한 다섯 명의 공동체를 이뤘다. 책의 표지에서 알 수 있듯 색채가 불분명했던 쓰쿠루는 친구들 덕에 무사히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5라는 완전함은 더 할 필요도 뺄 필요도 없는 무결한 상태다. 하지만 어느 날 알 수 없는 사건으로 쓰쿠루는 공동체에서 축출된다. 이후 16년간 삶을 무의미하게 버텨내던 쓰쿠루는 여자 친구 사라를 만나며 마음을 다잡는다. 하지만 사라는 쓰쿠루의 가슴이 텅 비어있다는 아리송한 이유로 그와 헤어지려고 한다. 그리고 쓰쿠루에게 과거 친구들을 다시 찾아 떠나라고 제안한다. 나는 왜 5의 공동체에서 버려졌는가. 그것을 궁금해 본 적조차 없던 쓰쿠루는 사라의 말대로 여정을 떠난다. 죽음밖에 선택지가 없다고 믿었던 '색채 빠진' 이 남자가 맞닥뜨리게 될 친구들은 어떤 모습일까.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다 읽고 나면 ‘회한’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다. 하루키는 늘 그랬듯 회한이 많은 사람이다. 그때 내가 조금만 달리 행동했더라면 그녀를 붙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지금과 다른 생이 펼쳐졌을까. 그건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는 감정보다는 내가 누리지 못한 가능성의 세계를 상상하는 태도다. 과거의 가능성은 하루키에게 또 다른 우주를 선사하고, 현재와 닮아 보이지만 묘하게 뒤틀린 가상의 세계에서 맘껏 뛰논다. 이 소설은 <1Q84>로 신드롬에 가까운 문화 현상을 일으켰던 무라카미 하루키가 4년 만에 발표한 장편 소설이다. 21세기 이후 무거운 주제 의식을 담아왔던 하루키가 개인성의 상실이라는 본연의 주제로 돌아가 여전히 환상적인 이야기꾼이라는 걸 증명해냈다. 일본에서는 출간 6일 만에 100만 부를 돌파했고, 한국에서는 초판만 20만 부를 팔아치운 유례없는 히트를 기록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2015)


 하루키는 새벽에 일어나 조깅을 한다. 오전엔 네 시간가량 글을 쓰고, 식사는 생선이나 채소를 즐긴다. 그는 그날 수개월을 쏟은 소설을 탈고해도 노트북을 덮지 않는다. 그에겐 정량의 글자를 새겨 넣는 시간이 중요하다. 이른 오후엔 독서는 하고, 밤이면 늘 앉던 소파에서 재즈 스탠다드를 듣는다. '존 콜트레인' 보다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격렬한 연주를 선호하고, 비밥보다는 깔끔하고 서정적인 웨스트코스트 재즈를 턴테이블에 올린다. 술은 위스키와 맥주를 좋아하고, 소파 옆에선 고양이 씨가 목을 긁으며 하품을 한다. 하루키는 교토 외곽에 살며 도심의 개츠비들과는 거리를 둔다.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부자지만, 저녁 시간은 언제나 텅 비어있다. 그가 구축한 리듬은 매일매일 같은 궤도에 머문다. 시계를 보니 저녁 9시다. 이 밤이 저물어갈 즈음 놀랍게도 그는 벌써 잠자리에 든다.

 난 하루키에게서 일종의 수도승과 같은 정절을 본다. 그가 구축한 일상은 흘리지 않고 사는 자의 위엄이 있다. 세상을 향해선 말을 아끼고, 까치발을 든 채 세속과 거리를 둔다.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세상과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 하루키 자신의 문학과 취향에 관해 적은 책이다. 잘못하면 자기 자랑으로 치우치기 딱 좋은, 자의식이 빽빽한 글이지만 하루키는 제 취향을 너끈히 설명해낼 수 있는 사람이다. 사사로운 일에 끝없이 의미를 부여하는 그의 작법은 이제 클래식으로 자리 잡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샐러리맨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산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책 제목처럼 하루키에게 작가라는 직업은 그저 출근하고 퇴근하는 존재 양식이다. 그는 글쓰기에 있어서 어떤 과장이나 이상화도 없다. 그의 규칙적인 삶은 온 세상이 노벨상 후보로 치켜세워도, 책 출간도 전에 수백만 부 이상 팔아치워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가 세상과 담쌓고 만든 이야기는 대체로 어떤 것일까. 난 한 마디로 그의 글을 ‘회한’이라고 정의한다. 하루키 소설 속 화자는 그의 또 다른 자아에 가깝다.  마치 도플갱어처럼 같은 얼굴을 하지만, 정작 삶에선 마주칠 리 없는 평행우주를 사는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상상할 수 있지만,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지향이다. 그는 자신과 다른 세계에 사는 한 남자를 떠올리며 내가 걸을 수 있었지만 걷지 못했던 삶을 소설에 쓴다. 나는 하루키가 그려낸 무수한 가능성의 삶을 경외한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2009)


 며칠 전부터 등에 담이 생겨 통증이 가시질 않는다. 운동을 마쳤을 땐 미세한 삐걱거림에 불과했던 욱신거림이 이젠 내 의식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마음이라는 게 참 이상해서 운동을 거르니 집중력마저 흐트러진다. 난데없는 무기력과 우울은 등허리 어디쯤 들러붙어 요지부동이다. 막 들고나온 따끈따끈한 신작 소설에도 좀처럼 손이 안 가고, 목전에 다다른 일만 한시바삐 처리하기 바쁘다. 마치 시시포스가 받은 형벌처럼 큰 돌덩이를 등에 지고 오르내리는 기분이다. 줄줄 새는 잡념은 타르처럼 생각의 점이지대를 무너뜨리고, 식욕만 들끓어 치킨을 당의정 삼아 버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매일 새벽마다 수 킬로미터를 달리는 이유에 관해 이렇게 답한다. “때때로 매일 달리고 있는 사람을 보고, ‘그렇게까지 해서 오래 살고 싶을까’하고 비웃듯이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오래 살고 싶어서 달리고 있는 사람은 실제로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설령 오래 살지 않아도 좋으니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은 온전한 인생을 보내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달리고 있는 사람이 수적으로 훨씬 많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발을 땅에 내딛는 시간은 내 육체를 현현하게 느끼게끔 한다. 규칙적인 운동은 일상을 고르게 다듬는다. 하루키는 달리기가 단순히 운동 이상의 의식과 같은 행위라고 강조한다. 발을 내디디는 순간 땅과 직교하며 뻗어 나갈 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생동감을 느낀다. 그는 루틴을 지켜나가며 육체의 단련을 창작의 원천으로 치환한다. 흐트러짐 없이 한 발 한 발 차곡차곡 문장을 쌓아간다. 


 난 대체로 운전을 해서 출근한다. 꽉 막힌 여의도를 통과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시동을 건다. 출근길은 마음이 약한 시간이라 그런지 차 안에서 듣는 라디오가 달콤하다. 아침부터 지하철과 버스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출근하면, 일과가 시작하기도 전에 지쳐버린다. 고요한 차 안에서 커피를 마시며 좋아하는 음악을 흥얼거리는 기분을 떨쳐내지 못한다. 하지만 구원이 없는 차로에 갇히면 금세 운전대를 잡은 걸 후회한다. 골목이 비좁아 주차가 번거롭다 보니 잠시도 방심할 수 없다. 운전대를 한 번 잡으면 사냥개처럼 잔뜩 곤두선 채 앞만 봐야 한다. 조금 방심할라치면 먹잇감이 불쑥 튀어나오고, 난 순수한 분노를 뽐내며 욕지거리한다. 그래서 요즘엔 출근길의 혼돈을 비껴가려고 걸어서 출근한다. 꽤 긴 시간이 걸려도 서두르지 않고 걷고 또 걷는다. 도시는 걸을 때 살만한 장소로 탈바꿈하니까. 요즘처럼 선선한 날씨에 이어폰을 귀에 꽂고 꽉 막힌 차로를 굽어보자. 걸을 때야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게 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하루키는 이런 문장을 적는다. “달리는 것에는 몇 가지 이점이 있다. 우선 첫째로 동료나 상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특별한 도구나 장비도 필요 없다. 특별한 장소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달리기에 적합한 운동화가 있고, 그럭저럭 도로가 있으면 마음 내킬 때 달리고 싶은 만큼 달릴 수 있다.” 걷기와 달리기는 그런 의미에서 별다른 수고 없이 도시에서 오롯한 기분을 얻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행위다. 거치적거리고 부대끼는 것들을 끊어내고 도시의 생김새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집중하며 단독자의 시간을 즐긴다. 이런 태도는 하루키가 지닌 달콤한 고독을 향한 지향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하루키는 평생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만 써왔다. 군중과 몇 발자국 떨어진 외로운 남자.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엔 관계를 떨쳐낸 인간 하루키가 있다. 그는 소설에 다채로운 세계를 그렸지만, 어김없이 작은 체구로 어딘가를 향해 가는 남자에게 펜을 쥐여준다. 마치 아웃복싱을 하는 무하마드 알리처럼 날렵한 문장이 돋보인다. 남자가 달리며 바라보는 풍경은 하루키의 문체처럼 가볍고 청량하다. 하루키를 보면 사진가 '척 클로스'의 말이 생각난다.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난 그저 일하러 갈 뿐이다.” 하루키는 기상천외한 섹스신만 빼면 모든 게 평균에 가까운 남자의 여정을 적는다. 거기엔 별다를 게 없지만, 쉼 없이 다단해서 결코 지루하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무라카미 하루키는 출간 외에는 좀처럼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소설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가 나온 이듬해인 2014년 작심한듯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 응했다. “일본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는 일본의 문제에 대해 책임 회피를 지적하며 자국민의 역사의식을 비판했다. 계속되는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에 대해 오래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 그가 언론과 5년 만에 인터뷰에 나서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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