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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un 18. 2020

유아인

숱한 얼굴을 지어내는 솜씨

 유아인이 남달리 보이는 건 왜일까. 그건 틀림없이 <버닝> 때문이다. 종수를 연기한 그의 텅 빈 얼굴과 이상한 천진함이 꽤 긴 시간 기억에 남았다. 포크너 같은 소설을 쓰고 싶었던 종수는 마일즈 데이비즈 재즈 선율에 맞춰 춤을 추는 여자를 사랑하지만 잃고, 개츠비 같은 놈을 만나면서 작가가 된다. 당시엔 이 영화가 별거 없어 보였는데, 극장을 나서자마자 그의 몸짓이 만든 언어를 해석하느라 긴 밤을 걸었다. 누군가 고요한 내면을 훔쳐보는 기분과 함께 저물어 가는 여름밤이 파주 안개처럼 서늘했다. <버닝>에서 유아인은 본능적으로 어떤 시기를 잃어버린, 도저히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어떤 경계를 넘은 얼굴을 한다. 이후 그가 나온 영화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늘 다른 얼굴로 날 맞았고, 실망하는 법은 없었다. 


<버닝>(2018)


 작가 지망생인 ‘종수’(유아인)는 낮에는 택배 일을 하고 밤에는 글을 쓴다. 싱크대 옆에 변기가 달린 허름한 방이지만 개의치 않는다. 노트북을 열고 이야기를 만들어 낼 공간이면 족하다. 종수는 일찍이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했다. 어려서부터 집은 늘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다. 성마른 기질에 화를 참지 못해 일을 망치는 아버지. 그런 남편을 피해 일찍이 집을 나간 엄마. 때 이른 결혼으로 종수의 인생에서 사라진 누나. 종수는 다 떨치고 서울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가까스로 대학은 졸업했지만, 학자금 대출이 잔뜩 밀려 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도 잘 모른다. 종수에게 세상은 미스터리 그 자체다. 해결 불가능한 문제를 잔뜩 던져놓고는 외면하는 의문투성이다. 그런 마음을 소설로 적으려 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안 온다. 거칠게 쌓아 올린 콘크리트로 매워진 잿빛 도시는 종수가 내디딘 시선 아래 펼쳐진다. 달동네 어두침침한 방에서 서울 시내를 바라보는 유아인의 얼굴이 화면 가득 차오른다.

 종수는 느닷없이 제 앞에 나타난 고향 친구 ‘해미’(전종서)와 가까워진다. 하루 벌어 하루 살기는 매한가지인, 가족과 떨어져 사는 두 사람은 비슷한 듯 달라 보인다. 종수는 해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다. 해미는 종수가 어릴 적 우물에 빠진 자신을 구해줬다고 말하지만, 종수는 우물의 존재조차 아리송하다. 어릴 적 두 사람이 나눈 대화라곤 종수가 해미에게 기습적으로 던진 “넌 너무 못생겼어”라는 말뿐이다. 해미에겐 상처로 남은 기억이지만, 망각하길 주저하지 않는 종수는 그녀의 입술에 온 정신이 팔려있다.

 영화의 마지막 꼭짓점은 ‘벤’(스티븐 연)이다. 여행을 다녀온 해미와 함께 나타난 벤은 ‘개츠비’처럼 부유하고 마찬가지로 의심스럽다. 거대한 집에서 사람들과 파티를 하고, 모호한 말로 해미의 관심을 독차지한다. 종수는 늘 벤과 붙어있는 해미를 보는 게 고통스럽다. 종수는 벤에게서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다. 열등감 때문인지 해미를 벤에게서 떼어내지 못한다. 두 사람 앞에 불쑥 나타난 벤은 극을 이끌어가는 미스터리의 핵심이다. 종수는 해미의 실종과 함께 그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낡은 트럭을 끌고 그의 뒤를 밟는 종수는 점점 더 까닭 모를 혼란에 빠져든다.

 <버닝>엔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저물어 가는 여름밤, 대남방송이 다 들리는 파주의 한 외진 마을에서 해미는 춤을 춘다. 다 낡은 축사 옆에서 손을 휘저으며 생경한 몸짓을 한다. 근처에 세워둔 포르셰에선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펫 연주가 울리고 그녀의 춤은 점차 고조한다. 그녀를 지켜보는 정체 모를 남자 벤은 어쩐지 슬퍼 보이는 미소를 띤다. 또 다른 장면, 용산 다가구 주택가의 허름한 방에서 종수는 해미와 섹스를 한다. 그때 희미한 빛이 침대 맡에 드리운다. 고개를 든 종수는 방을 관통한 그 빛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마치 무언가 심오한 뜻이 있다는 듯이. <버닝>은 의문이 하나씩 드러나다 점차 들불처럼 번지는 영화다. 이창동은 매번 해독 불가한 이미지를 안겼지만, 버닝은 그 정도가 심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려고 하니 영화를 보는 내내 바둥거린다. 실체가 잡히지 않으니 자꾸만 뒤척인다. <버닝>은 말한 것보다 하지 않은 게 더 중요해 보이고, 보이지 않는 게 엄연히 존재하는 세상을 서술한다. 영화는 언어가 미처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지점에 다다르고, 어떤 결핍을 남긴 채 스크린 밖으로 사라진다.

 작가가 되고 싶은 종수는 윌리엄 포크너 같은 글을 쓰고 싶다. 종수는 포크너의 소설에서 자신과 동류의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포크너의 소설 <Barn Burning>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이 작품은 신흥 귀족에 대항하기 위해 헛간 방화에 나선 ‘레드넥’들을 다룬 이야기다. 소설과 달리 종수는 저항이라고 할 만한 무엇도 할 수 없는 처지다. 항거는커녕 본인의 거처를 특정할 수 없는 약자다. ‘그녀’라는 부재를 품은 종수는 창밖으로 남산이 보이는 방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종수는 처절한 몸짓으로 뭔가를 갈구하는 해미를 떠올릴까? 소설에선 해미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조소를 떨쳐내고 끝내 외롭지 않았으면 싶다.


<#살아있다>(2020)


 <#살아있다>는 느닷없이 좀비가 등장한 여의도의 어느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다. 집에서 게임이나 하다 잠이 들었던 준우(유아인 분)는 깨어나자마자 아파트 단지 내에도 좀비가 가득하다는 걸 눈치챈다. 고립된 유아인의 처지는 요즘 우리와 다르지 않아서 더 실감이 난다. 그는 옷차림에서 행동거지까지 집에서 버티는 데 이골이 난 사람처럼 연기한다. 사람을 공격하고 먹기까지 하는 좀비는 여타 다른 영화 속 좀비와 크게 다를 건 없어 보인다. 영화에서 중요한 건 좀비보다는 오히려 유아인을 한 아파트에 가두고 그를 지켜보는 재미를 얻는 게 중요하다. 그의 변화무쌍한 표정과 익살스러운 말투를 지켜보는 재미가 영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살아있다>는 첫 장면부터 관객을 강력하게 사로잡는다. 우선 준우가 잠에서 깨자마자 뉴스의 켜는 것으로 간단한 상황 조성을 한 후, 아파트 단지에서 울리는 비명이 긴장을 고조시킨다. 바로 이어서 준우의 집에 무단 침입한 수상쩍은 남자의 등장으로 영화는 달릴 준비를 마친다. 어떤 전후 사정에 대한 설명 없이, 마치 준우가 방에서 몰두하는 1인칭 게임처럼 주변 환경과 득실대는 적만 눈에 들어온다. 영화는 초반 설정이 없다시피 하고, 이야기의 맥락을 추측할 만한 일말의 단서도 없다. 그냥 곧장 위기상황에 뛰어드는 꼴이다. 이 첫 신의 긴장감과 속도감은 상당한데, <#살아있다>의 미덕은 영화 초반에 구축한 몰입도를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준우에겐 골프채라는 무기와 라면과 맥주 몇 캔이라는 식량이 있고, 앞으로의 미션은 가족의 생사를 파악하고 모자란 식량을 채워 넣고, 건너편 아파트에 홀로 고립된, 게다가 미녀인 유빈(박신혜 분)과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 영화는 마치 퀘스트를 깨나가는 게임처럼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온갖 수를 동원한다.


 <#살아있다>의 또 다른 재미는 시종일관 재기발랄하다는 점이다. 지루할 새를 주지 않고 온갖 아이디어를 동원해서 오락 영화가 가진 본분을 다한다.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히치콕의 <이창>과 같은 심리스릴러와 달리, 요즘 시대에 걸맞게 SNS를 사용하는 방식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시각적인 재미를 안겨준다. SNS는 구조 요청에서부터 주인공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하는 것과 동시에 이 영화가 지향하는 소통의 끈이기도 하다. 어쩌면 <#살아있다> 속 재난이란 좀비 그 자체가 아닌, 통신이 불가한 상태에 진입한 것과 다르지 않다. 외부와 통신을 시도하기 위해 드론을 띄워 신호를 잡아내려고 애쓰는 모습은 ‘살아있다’라는 제목의 목적어가 네트워크가 아닐까 짐작하게 한다. 그래서 준우가 고립되는 곳은 아파트지만, 정작 그가 더 답답함을 느끼는 건 오프라인의 막막함이다. 준우는 재난이 있기 전에도 장 보러 나가기도 싫어할 만큼 집에서 게임이나 하는 한량이었고, 게임상에서 가상의 캐릭터로 이름 모를 타인(마치 좀비와 다를 거 없는)과 얘기하는 데 더 익숙한 녀석이다.(유빈에게 하는 어눌한 말투를 보라) 만약 그가 온라인 상태에서 게임을 지속할 수 있었고, 한 박스의 라면과 플라스틱 생수만 부엌에 있었다면 탈출할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 바깥보다 통신상에서 더 큰 정체성을 가진 준우는 스마트폰 없이 한시도 못 버티는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좀비는 이 영화의 맥거핀에 불과하다. 준우가 난세의 영웅처럼 집을 뛰쳐나와 진정한 어른이 되는 과정을 위해 무찔러야 하는 적의 무리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건너편 아파트에서 청초한 얼굴로 준우의 구출을 기다리는 유빈과 함께 역경을 피해 탈출하는 줄거리의 <#살아있다>는 소년을 문밖으로 끌어냈다는 점에서 엄연히 성장 영화로 봐야 마땅하다.


 때론 형식적인 제약이 연출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아파트 단지와 방이라는 공간 제약은 그 안에서 나름대로 규칙을 만들어간다. 갇혀있다는 사실을 통해 생존 방식이 정해지고, 살 수 있는 조건이 부여된다. <#살아있다>는 아파트 단지 세트를 정밀하게 제작했는데, 그게 영화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키가 되었다. 아파트 공화국에 사는 한국인은 누구보다 아파트 단지에 애착을 가진다. 익숙한 공간이 가진 정서적 이입이랄까. 아파트 내부 작은 공간 하나하나가 모두 내가 사는 집과 다르지 않아서, 준우가 움직일 때마다 같이 행동하는 기분이 든다. 난 개인적으로 복도식 아파트에 추억이 많은 편이어서 그런지, 문을 열고 나와 좀비를 피해 긴 복도를 달려 나갈 때 더 큰 재미를 느꼈다. 나 역시 그렇게 지지고 볶고 소란스럽게 놀았으니까.

 <부산행> 이후 종전에 없는 히트를 했지만, 한국에서 좀비 영화는 낯선 영역이다.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 데다가 검증된 시나리오를 구하기도 어려워 제작이 난망했다. <#살아있다>는 큰 예산 없이도 아기자기한 아이디어와 세밀한 세트장, 세간과 소품을 이용한 귀여운 에피소드로 승부를 보는 영화다. 특히 유튜브 시대답게 1인 방송 촬영을 하고, 모든 걸 인스타그램 용 영상으로 남기는 장면이 잦다. 비슷한 예로 두 주인공의 먹방을 프레임을 나눠 배치한 장면은 영화가 가진 지향점을 드러내는 신이다.


 난 도시 사람을 좀비처럼 느낄 때가 있다. 공항이나 콘서트장처럼 낯선 이들로 붐비는 장소에 혼자 갈 때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서울의 과밀한 인간들은 드세고 폭력적이라 부딪치고 부대끼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럴 때마다 난 한강 다리를 걷는다. 스쳐는 행인의 얼굴을 멀찍이서 바라볼 수 있는 거리감이 있는 공간이다. 나랑 비슷한 부류의 인간을 찾아보기도 하고, 낯선 개인의 오롯함에 감탄하기도 하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다리 위를 걷는 건 도시에서 독립성을 얻을 수 있는 드문 행위다. 군중 속에서 혼자가 되려고 발품을 파는 것이다. <#살아있다>의 좀비는 식인종이긴 하지만 사실 그렇게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다. 좀비가 혐오스러운 건 몰려다니고, 무심하며 사려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을 피해 문을 닫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준우의 모습에서 퇴근 후에 옷을 벗어 던지고 침대에서 피로를 삭이는 나를 발견한다. 준우는 게임을 할 수 없고, TV도 안 나오자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직감한다. 그에게 <안나 카레니나> 같은 소설 한 권만 있었다면 어땠을까. 바보 같은 소리지만 준우에게 컵라면과 맥주가 아닌, 이야기의 세계가 있었다면 좀 더 고립이 수월해지지 않았을까. 취향이라는 건 혼자된 인간에게 어떤 걸까 생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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