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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19. 2021

허지웅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채광 좋은 카페옆자리에 학생들이 모여서 과제를 하는 중이었다날이 이렇게 좋은데   짓이었다그들은 귀찮은 보고서 따위는 빨리 해치우고 나가  생각에 혈안이  있었다엉덩이가 들썩거리는  느껴질 정도였다무슨 과제인고 하니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교수가 꼽아준 영화 중에 하나를 골라서 보고 독후감을 쓰는 과제였다전공도 아닌 교양수업이니까 줄거리 요약과 교훈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블로그만 찾으면 그만이었다블로그나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은 너무 전문적이지도 그렇다고   글도 아니라서 베끼기도 좋다구글이라는 바닷속에는 온갖 해산물이  있으니 과제하기  좋은 세상이다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친구가 원하는 내용이  들어찬 어획물을 끄집어냈다기쁘게도 영화의 사회적 의의와 감독의 이력까지 세세히 정리한 페이지였다나까지 덩달아 쾌재를 불렀다. '이놈들 가면 우아하게 글을   있겠구먼.' 영화는  시간이지만 요약한 글을 편집하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없었다한편으로는  절대로 과제에 도움이 될만한 글은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앞으로도 무용하고 쓸데없으며 신변잡기에 가까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글을  것이다무용지물 박물관에 보존되기에 적합한 그런 .


 난 교수들이 어떤 영화를 꼽아서 과제를 내줬는지가 무척 궁금했다. 귀를 기울여 보니 교수들이 딱 좋아할 만한 영화였다. <제8요일>, <글루미 선데이>, <트윈 시스터즈>,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내일을 위한 시간> 아주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고루하고 낡아빠진 리스트도 아니었다. <카사블랑카>나 <레베카>가 아닌 게 어디야. 만약 내가 교수라면 학생들을 위해서 어떤 영화를 골랐을까. 이렇게 짜깁기하는 걸 뻔히 아는 상황에서 고르는 게 의미가 있긴 있는 걸까. 그래도 학생 중에 이렇게 화창한 날 기꺼이 컴컴한 방에 틀어박혀서 영화를 틀 친구가 있을지도 몰라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다. 우선 맵고 짠 영화 위주로 골랐겠지. <아수라> <불한당> <무뢰한>같이 폭력과 욕이 난무하는 영화라거나, 반대로 <노팅힐> <어바웃 타임>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처럼 여심을 잡을만한 달곰한 워킹 타이틀 표 로맨틱 코미디도 좋겠다. 그래도 애들이 이왕이면 한 번은 볼만한 영화를 고르는 게 낫지 않을까.


 내가 주관하는 모임이 있어서 시즌마다 영화를 고른다. 대화하기에 괜찮고 누구나 쉽게 볼만한 영화이면서도, 적당히 먹물 냄새가 나야 했다. 그 적정한 선을 부여잡기 위해 나름 고심한다. 작품 리스트가 모임의 질을 결정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자주 쓰는 방법은 '단쓴단쓴'이다. 당근과 채찍처럼 처음엔  사탕 같은 작품을 입에 넣어주고, 방심한 틈을 타서 다음 모임에서는 에스프레소처럼 쓰디쓴 먹물 영화로 균형을 잡는다. 그러다 다시 케이크를 시켜서 당을 채운 후에 마지막으로 홍삼진액처럼 도전정신을 자극하는 예술영화로 피날레를 장식한다.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고르는 게 포인트다. 고등학교 때도 난 영화 큐레이션에 일가견이 있었다. 공부보다는 비디오 가게만 드나들던 나로서는 자습 시간에 영화를 트는 역할이 즐거웠다. 불법 다운로드한 영화를 시디로 구워와서 교실 텔레비전에 틀었다. 나만의 베스트 10에서 한 편을 골라 녀석들의 표정을 살피면서 영화를 봤다. 혹시나 지루해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애들이 막 웃으면 나까지 덩달아 행복했다. 지극히 평범 그 자체인 내가 교실에서 유일하게 도드라진 순간이었다. 그땐 영화를 어떻게 골랐을까. 애들의 취향을 단숨에 사로잡을만한 영화가 필요했다. 요즘으로 치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나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같은 영화면 그만이었다. 내가 당시에 교실에서 튼 영화 중에 가장 반응이 뜨거웠던 영화는 <파이트 클럽> <더 게임>이었다. 데이비드 핀처의 스타일 넘치는 스릴러 영화였다. 누구 말마따나 걸작은 모든 취향을 무력화시킨다. 내가 아무리 긴 생머리에 사연 있어 보이는 초췌한 여성을 이상형으로 꼽아도 단발머리를 한 김태리가 나타나서 활짝 우승면 그것으로 게임 끝이다.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영화를 싫어할 사람은 없으니까.


 과제를 다 해치운 학생들은 두 시간을 아껴준 블로거에게 감사 댓글 하나 남기지 않고 바로 셀카 삼매경에 들어갔다. 카페 벽에 아이폰을 고정하고 이런저런 포즈를 찍어 오늘 과제하러 모인 시간을 기념했다. 인스타그램에 어떤 식으로 담길지 뻔했다. 필터를 씌운 사진을 올리곤 #과제하러모였는데사진만찍음 ㅋㅋㅋ 이런 식으로 해시태그를 달겠지. 그 나이 때의 가벼운 들썩임과 까르르 거리는 웃음소리에 기분이 좋아졌다. 잘 놀길, 원 없이 놀아서 더는 놀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놀아대길. 취업하고 매일 러시아워에 갇혀서 하루를 잠식당하기 전에. 집에 가면 자빠져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오기 전에. 군대 가기 전에. 일어나서 다시 일터로 가는 길이 무겁게만 느껴지기 전에. 사실 삶이 크게 달라질 거 없는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을 내일로 이뤄진 결집체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기 전에. 아마 어른이 되면 익명의 블로거가 포스팅한 글로 과제를 해치우던 밤을 추억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그들은 카페 밖으로 우르르 나섰다.


 문득 아이들이 습관처럼 사용하는 '에바야?'라는 말이 궁금해졌다. 구글에 검색해봤다. '오버한다'를 뜻한다고 나왔다. (다행히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아니구나) 자꾸 말끝마다 에바야, 라고 묻는 걸 보니 좋은 의미는 아닌 것 같았다. 죄다 오버센스에 가까운 말만 뱉어놓고 에바라고 묻는 건 좀 이상하니까. 그냥 충청도 분들이 '기야?'라고 묻는 것과 비슷한 추임새가 아닐까. 내 눈에는 아이들 사이에 감도는 과잉을 확인하는 의식처럼 보였다. 오버하는 걸 그만둘 수 없으니 지금 신나 있다는 걸 서로 확인하며 결속을 다지는 것이다. 난 가라앉은 젊음보다는 약간 조증에 가깝게 호들갑을 떠는 애들이 사랑스럽다. 나도 저 나이쯤에는 꼰대 같은 세상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이 즐겁게 노는 것이라고 믿었다. 아슬아슬한 욕설을 뱉고 금기에 가까운 짓을 일삼으며 젊음을 시위하는 게 좋았다. 어느 학자가 그러던데, 어른들이 아이들을 못마땅하게 보는 건 자신들보다 어려서 오래 사는 걸 시기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속 좁은 어른 같으니. 그래서 아이들은 더 보란 듯이 가장 예쁜 소녀에게 무턱대고 사랑한다고 고백해버리는 짓을 특권처럼 저지른다. 그때 그 시절 경솔했던 나는 내가 서른 살이 넘어서도 아이답게 찧고 까불며 살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지금 나를 되돌아보니 딱 녀석들이 검색해서 과제에 베끼기 좋은 글을 쓰는 신세였다. 그런 삶이 막 서글프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했다. 의식할 새 없이 단숨에 흘러버린 시절을 아무렇게나 보낸 건 아니었으니까.


 최근에 허지웅이 쓴 <살고 싶다는 농담>을 읽었다. 조금 '에바'해서 말해보자면, 그의 책을 재밌게 읽다가 회전초밥집 그릇 색깔을 구별 못 해서 육만 원이 넘게 나왔다. 어쩐지 입에서 살살 녹더라. 내가 보기엔 허지웅은 술자리에서 보면 더 재밌을 만한 사람이었다. 이런저런 곳에 관심이 많고, 말투가 필요 이상으로 완강해서 듣는 맛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글은 시퍼렇게 날이 선 칼 같았다. 이번 책도 그가 쓴 책들과 결은 다르지 않았다. 그에겐 늘 고독한 시간이 있었고, 즐겨본 영화가 있었으며, 유심히 지켜본 사회문제가 있었으니까. 다방면에 두루 한소리 늘어놓는 솜씨도 여전했다. 내가 쓰고자 하는 신변잡기형 글인 터라 참고할만한 구석도 많았다. 다만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그가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본 적 없던 삼인칭 대명사가 자주 등장했다. 중병에 걸렸다가 새 삶을 찾아서일까. 삶은 혼자일 수 없다고 수줍게 고백하는 느낌이었다. 그의 글을 읽을 때 자주 느꼈던 도사린 가시가 없어졌다. 세상은 혼자고 좋은 어른 따윈 없으니 기껏해야 책이나 읽으라는 식은 분명 아니었다. 단언하던 문장이 조금 희미해졌고 대신 고마웠던 사람들을 찾아내서 조망했다. 자기가 냉소적으로 굴어도 끝내 주변에 버티고 서서 우스갯소리를 던졌던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게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인 것 같다. 기대하지 않았던 온기에 마음이 놓이면서도, 과거에 촌철살인으로 굴었던 매서운 허지웅이 그리워졌다. 이런 변화는 노화의 여파일까. 헬스장 대신 요가를 하기 시작했다는 취향의 변화일까. 가장 도드라졌던 점은 청년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조언을 하겠다는 선의였다. 뭔가를 비판하는 글쓰기 대신 어린 친구들을 바른길로 인도하고 싶다는 말은 내겐 꼭 '김난도' 작가의 책 서론처럼 읽혔다. 흑화한 김난도랄까.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 대신 아파보니까 청춘 짧더라고 말해주는 동네 형 같았다. 다시 암이 재발하면 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호기로운 말투는 여전했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글을 쓰겠다는 허지웅은 분명 다시 태어난 것처럼 보였다.


 난 계속 허지웅의 글을 읽을 것 같다. 수필은 어쨌든 사람을 보고 읽는 글이다. 난 생활인으로서 그가 당면하고 사는 바에 관심이 많고, 좀처럼 인정하지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그의 문체에 영향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가 과거를 후회하고 자책하며 어쩔 땐 다 망했다는 식으로 굴다가도, 끝내 고쳐내서 살겠다고 다짐하는 태도를 좋아한다. 그는 냉철한 독설가의 면모를 갖춘 셀럽이라 종종 구설에 오르지만, 호승심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걸 본 적은 없다. 창피함을 감수하고라도 뱉었던 말을 번복할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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