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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28. 2020

이슬아

고된 삶을 어루만지려는 각오

 거리를 걸으면 요란한 네온사인 아래 드문드문 비틀거리는 사람이 보이고사납게 치솟은 빌딩 층마다 뭔가에 분주한 굽은 등이 보인다자본의 횡포가 적나라한 도시는 시종 매섭게 보이지만언제든 우회로를 찾을  있다는 기대를 품게 한다잿빛 공기에 숨이 막힐  같아도 밤만 되면 거리엔 서늘한 낭만이 자리하니까 가끔 걸음을 멈추고 도시의 삶을 상상한다그들 각자의 내밀한 속사정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글을 쓰고 싶어 진다. 늦은 저녁  한구석에 앉아 정적에 휩싸인  뭔가를 적는다노트북을 펴고 문장을 이어나가다 보면 기분이 나지고 누추한 세간도 어여삐 뵌다수많은 작가들이 이런 키친테이블노블(Kitchen Table Novel) 생계를 꾸렸다. 알다시피 키친테이블노블이란 자신의 식탁 위에서 긁적이는 소설을 말한다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일찍이 잠자리에  가족 몰래 차를 끓이고 식탁에 앉아 뭔가를 적으며 다른 세상을 상상한다. 그의 유일한 일상의 구원은 퇴근  자신만의 작은 테이블에 앉아 글을 쓰는 시간이기 때문이다지금  시각에도 무수한 이들이 다들 그렇게 쓰고 고치고 망설이다 지우길 반복하며  밤을 보내리라바삐 돌아가는 일상은 잠시 잊고 지금 잘살고 있는지 자문하면서 문장을 쌓아 올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일기를 쓰지 않는다. 한때 열심히 쓰던 시기도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새해가 되면 빳빳한 다이어리를 사서 만져보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그것도 두어 달 지나면 자연스레 방치했다. 일기라는 건 매일 하나씩 쓴다는 약속이다. 날마다 쓰지 않으면 의미를 상실하니 실로 터무니없다. 내가 탐구생활 쓰는 초등학생도 아니고 될 턱이 없다. 쓰고 싶다는 마음이 없는 글은 그 자체로 노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일간 이슬아>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내용을 차치하고 그 양에 경악했다. 이 정도 분량을 매일 쓴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난 질보단 양을 믿는 쪽이라 우선 원고지 15매가 훌쩍 넘어가면 감복한다. 이슬아 작가는 믿을만한 작가라고 생각했다. 도망칠 구석 없이 몰아붙이는 전사처럼 보였다. 그가 펴낸 두툼한 단행본을 만져보며 경외를 가졌다. 나의 과거, 내 기억,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이 정도로 쏟아내려면 얼마나 시간을 멈춰 세우고 문장을 떠올려야 할까. 그는 근면한 노동자처럼 쓴다.


 작가 ‘올더스 헉슬리’는 66번의 반복이 진실을 만든다고 했다던데, 내 생각에 누군가의 글을 반복해서 읽으면 그 생각에 푹 빠질 수밖에 없다. 그건 맹목적인 구석이 있어서 작가의 사고체계에 나를 맞추게 된다. 내겐 서태지와 하루키가 그랬다. 스스로 사고할 필요가 없기에 편하기까지 하다. 때론 눈뜬 이의 장광설도 성경 한 구절처럼 ‘오 지저스’ 하며 받아들인다. 난 그걸 텍스트의 주술적 힘이라고 믿는다. 최근 며칠간 자기 전에 이슬아 수필을 읽었더니 그의 사고방식에 익숙해졌다. 아침 출근길에서 회사 앞 가로수를 볼 때나, 점심시간에 후배와 농담을 따먹을 때도 그처럼 각별한 단어를 골라내는 내가 느껴진다. 어쩐지 귀엽고 조금은 속된 그런 말이 입가에 맴돈다. 


 4년간 노량진 고시원에서 버텼던 한 친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매일 인터넷 강의를 듣고, 아침부터 줄을 서서 선생 말을 목 빠져라 듣고 있노라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다고. 발을 디딜 틈 없이 빼곡한 강의실에선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기도 버겁다고. 고시원 쪽방은 머리 하나 들어가기 어려운 창문뿐이라 공상이 깃들 리 없다. 그러니 매시간 기계처럼 줄줄 외는 수밖에. 녀석은 곱창을 격렬하게 씹으며 아이작 아시모프 소설 속 사이보그가 된 것 같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난 4년 동안 녀석에게 곱창을 대접했는데, 그는 이제 한 소도시 공무원이 되어 노량진을 잊고 산다. 난 뜨끈한 커피잔을 앞에 두고 녀석을 떠올렸다. 녀석의 작은 방과 매일 입던 남색 아디다스 츄리닝이 아른거렸다. 요즘 녀석은 그토록 원했던 생각이란 걸 하고 살까. 서점에서 신간 소설을 사서 읽고 술자리에선 족집게 강사 말에 심취했던 그 시절을 떠벌일까. 카톡을 하나 보내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일 년에 한 번쯤은 일기를 쓰고 싶을 때가 있다. 이를 닦다가 불현듯 오늘을 적고 싶다며 입을 헹군다. 하루하루 스치는 게 영 불안해서 뭐라도 쓴다. 몇 자 끄적이면 이슬아처럼 귀여운 에피소드가 나올 것 같다. 하지만 수납장처럼 그날을 개켜주리라 믿었던 일기장은 단물 빠진 껌처럼 심심한 소리만 가득했다. 내 삶은 두 시간에 한 번은 ABC 초콜릿이라도 까먹어야 버틸만한 지루한 일뿐이더라. 공들여 쓰면 뭔가 달라지리라 믿었지만 쓰면 쓸수록 신세 한탄만 남발한다. 요즘 글을 쓸 때도 비슷한 고민에 시달린다. 일상의 소소한 것을 끌어다가 글로 옮기는데 성에 차지 않는다. 왜 열심히 글을 쓰던 이들이 신춘문예에 도전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밑천이 떨어지면 자연스레 타인을 그려 넣고 싶어 진다. 마음대로 안 되는 세상 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창작에 손이 간다. 내 가만한 나날엔 별스러울 게 없으니까. 


 난 쓰니만 못한 소설 하나를 서랍에 담고 산다. 어디에도 말하지 못한 죽은 이야기다. 난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지독하게만 느껴진다. 나 하나 지키기도 버거운데 오롯한 세계를 지탱해낼 여력이 없다. 박상영 작가처럼 곡예에 가깝게 일과 창작을 병행할 배포도 없다. 그랬다가는 그처럼 밤마다 야식과 폭음에 시달릴 게 뻔하다. 그래서 난 늘 하던 대로 책과 영화를 볼모로 잡고 쓴다. 창작자가 만든 근사한 기성품을 매만지며 은근슬쩍 거기에 내 삶을 얹는다. 일류 작가가 차려놓은 밥상에 내 김치볶음밥도 곁들인다그의 황금 숟가락 옆에 내 허름한 나무젓가락도 가지런히 놓는다. 허름한 일상마저도 예술로 만들어내는 작가의 문장을 인용하며 내 눅눅한 기분을 떨쳐낸다. 그러면 좀 낫다. 


 영화와 책을 기틀 삼아 작게나마 숨통을 틘다. 사무실에 갇혔던 내 사고를 허물고, 벨 에포크 파리든 대공황기의 뉴욕이든 비자 없이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다. 결코 다가설 수 없을 누군가의 인생을 읽는 느낌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들에게 말을 걸고 싶을 때 난 글을 쓴다. 쓰고 싶은 게 있을 때 시작하는 글은 서두부터 힘이 넘친다. 연필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손을 키보드에 얹기만 해도 문장이 쏟아진다. 삶의 느낌과 감촉을 매만지려는 각오가 키보드에 옮겨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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