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된 삶을 어루만지려는 각오
거리를 걸으면 요란한 네온사인 아래 드문드문 비틀거리는 사람이 보이고, 사납게 치솟은 빌딩 층마다 뭔가에 분주한 굽은 등이 보인다. 자본의 횡포가 적나라한 도시는 시종 매섭게 보이지만, 언제든 우회로를 찾을 수 있다는 기대를 품게 한다. 잿빛 공기에 숨이 막힐 것 같아도 밤만 되면 거리엔 서늘한 낭만이 자리하니까. 난 가끔 걸음을 멈추고 도시의 삶을 상상한다. 그들 각자의 내밀한 속사정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글을 쓰고 싶어 진다. 늦은 저녁 방 한구석에 앉아 정적에 휩싸인 채 뭔가를 적는다. 노트북을 펴고 문장을 이어나가다 보면 기분이 나지고 누추한 세간도 어여삐 뵌다. 수많은 작가들이 이런 키친테이블노블(Kitchen Table Novel)로 생계를 꾸렸다. 알다시피 키친테이블노블이란 자신의 식탁 위에서 긁적이는 소설을 말한다. 좀 더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일찍이 잠자리에 든 가족 몰래 차를 끓이고 식탁에 앉아 뭔가를 적으며 다른 세상을 상상한다. 그의 유일한 일상의 구원은 퇴근 후 자신만의 작은 테이블에 앉아 글을 쓰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무수한 이들이 다들 그렇게 쓰고 고치고 망설이다 지우길 반복하며 이 밤을 보내리라. 바삐 돌아가는 일상은 잠시 잊고 지금 잘살고 있는지 자문하면서 문장을 쌓아 올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일기를 쓰지 않는다. 한때 열심히 쓰던 시기도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새해가 되면 빳빳한 다이어리를 사서 만져보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그것도 두어 달 지나면 자연스레 방치했다. 일기라는 건 매일 하나씩 쓴다는 약속이다. 날마다 쓰지 않으면 의미를 상실하니 실로 터무니없다. 내가 탐구생활 쓰는 초등학생도 아니고 될 턱이 없다. 쓰고 싶다는 마음이 없는 글은 그 자체로 노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일간 이슬아>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내용을 차치하고 그 양에 경악했다. 이 정도 분량을 매일 쓴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난 질보단 양을 믿는 쪽이라 우선 원고지 15매가 훌쩍 넘어가면 감복한다. 이슬아 작가는 믿을만한 작가라고 생각했다. 도망칠 구석 없이 몰아붙이는 전사처럼 보였다. 그가 펴낸 두툼한 단행본을 만져보며 경외를 가졌다. 나의 과거, 내 기억,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이 정도로 쏟아내려면 얼마나 시간을 멈춰 세우고 문장을 떠올려야 할까. 그는 근면한 노동자처럼 쓴다.
작가 ‘올더스 헉슬리’는 66번의 반복이 진실을 만든다고 했다던데, 내 생각에 누군가의 글을 반복해서 읽으면 그 생각에 푹 빠질 수밖에 없다. 그건 맹목적인 구석이 있어서 작가의 사고체계에 나를 맞추게 된다. 내겐 서태지와 하루키가 그랬다. 스스로 사고할 필요가 없기에 편하기까지 하다. 때론 눈뜬 이의 장광설도 성경 한 구절처럼 ‘오 지저스’ 하며 받아들인다. 난 그걸 텍스트의 주술적 힘이라고 믿는다. 최근 며칠간 자기 전에 이슬아 수필을 읽었더니 그의 사고방식에 익숙해졌다. 아침 출근길에서 회사 앞 가로수를 볼 때나, 점심시간에 후배와 농담을 따먹을 때도 그처럼 각별한 단어를 골라내는 내가 느껴진다. 어쩐지 귀엽고 조금은 속된 그런 말이 입가에 맴돈다.
4년간 노량진 고시원에서 버텼던 한 친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매일 인터넷 강의를 듣고, 아침부터 줄을 서서 선생 말을 목 빠져라 듣고 있노라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다고. 발을 디딜 틈 없이 빼곡한 강의실에선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기도 버겁다고. 고시원 쪽방은 머리 하나 들어가기 어려운 창문뿐이라 공상이 깃들 리 없다. 그러니 매시간 기계처럼 줄줄 외는 수밖에. 녀석은 곱창을 격렬하게 씹으며 아이작 아시모프 소설 속 사이보그가 된 것 같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난 4년 동안 녀석에게 곱창을 대접했는데, 그는 이제 한 소도시 공무원이 되어 노량진을 잊고 산다. 난 뜨끈한 커피잔을 앞에 두고 녀석을 떠올렸다. 녀석의 작은 방과 매일 입던 남색 아디다스 츄리닝이 아른거렸다. 요즘 녀석은 그토록 원했던 생각이란 걸 하고 살까. 서점에서 신간 소설을 사서 읽고 술자리에선 족집게 강사 말에 심취했던 그 시절을 떠벌일까. 카톡을 하나 보내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일 년에 한 번쯤은 일기를 쓰고 싶을 때가 있다. 이를 닦다가 불현듯 오늘을 적고 싶다며 입을 헹군다. 하루하루 스치는 게 영 불안해서 뭐라도 쓴다. 몇 자 끄적이면 이슬아처럼 귀여운 에피소드가 나올 것 같다. 하지만 수납장처럼 그날을 개켜주리라 믿었던 일기장은 단물 빠진 껌처럼 심심한 소리만 가득했다. 내 삶은 두 시간에 한 번은 ABC 초콜릿이라도 까먹어야 버틸만한 지루한 일뿐이더라. 공들여 쓰면 뭔가 달라지리라 믿었지만 쓰면 쓸수록 신세 한탄만 남발한다. 요즘 글을 쓸 때도 비슷한 고민에 시달린다. 일상의 소소한 것을 끌어다가 글로 옮기는데 성에 차지 않는다. 왜 열심히 글을 쓰던 이들이 신춘문예에 도전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밑천이 떨어지면 자연스레 타인을 그려 넣고 싶어 진다. 마음대로 안 되는 세상 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창작에 손이 간다. 내 가만한 나날엔 별스러울 게 없으니까.
난 쓰니만 못한 소설 하나를 서랍에 담고 산다. 어디에도 말하지 못한 죽은 이야기다. 난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지독하게만 느껴진다. 나 하나 지키기도 버거운데 오롯한 세계를 지탱해낼 여력이 없다. 박상영 작가처럼 곡예에 가깝게 일과 창작을 병행할 배포도 없다. 그랬다가는 그처럼 밤마다 야식과 폭음에 시달릴 게 뻔하다. 그래서 난 늘 하던 대로 책과 영화를 볼모로 잡고 쓴다. 창작자가 만든 근사한 기성품을 매만지며 은근슬쩍 거기에 내 삶을 얹는다. 일류 작가가 차려놓은 밥상에 내 김치볶음밥도 곁들인다. 그의 황금 숟가락 옆에 내 허름한 나무젓가락도 가지런히 놓는다. 허름한 일상마저도 예술로 만들어내는 작가의 문장을 인용하며 내 눅눅한 기분을 떨쳐낸다. 그러면 좀 낫다.
영화와 책을 기틀 삼아 작게나마 숨통을 틘다. 사무실에 갇혔던 내 사고를 허물고, 벨 에포크 파리든 대공황기의 뉴욕이든 비자 없이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다. 결코 다가설 수 없을 누군가의 인생을 읽는 느낌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들에게 말을 걸고 싶을 때 난 글을 쓴다. 쓰고 싶은 게 있을 때 시작하는 글은 서두부터 힘이 넘친다. 연필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손을 키보드에 얹기만 해도 문장이 쏟아진다. 삶의 느낌과 감촉을 매만지려는 각오가 키보드에 옮겨붙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