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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Dec 13. 2020

프랑수아즈 사강

사랑 안에 거하지만 사랑을 결코 믿지 않는

 최승자 시인의 <삼십세>라는 시에 이런 시구가 있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이건 마치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가사처럼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무겁게 들린다. 서른이라는 나이는 요즘 생애주기로 따지자면 갓 학교 나와서 겨우 직장에 발을 걸칠 나이다. 결혼적령기라는 말도 옛말이지 햇병아리 같은 얼굴로 겨우 먹고사는 그런 나이에 무슨 죽음 타령인가. 사느냐 죽느냐를 논하기엔 아직 추수한 게 변변찮으니 우선 눈앞에 샛노래진 이삭들에 혈안이다. 고전 문학을 읽다 보면 생애주기가 점점 더 앞당겨지는 기분이 든다. 대문호들은 아직 뜸도 들지 않은 유예기간에 불과한 나이에 척척 인생의 중대사를 치른다. 난 젊음의 본전도 못 뽑고 늙어버렸는데 그들은 할 거 다 하고도 고작 서른이다. 인생의 경험치가 잔뜩 쌓여서 이제 쓸 일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가령,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19살에 첫 소설을 썼고, 이 작품으로 프랑스 문학비평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바로 결혼을 택한 사강은 서른이 되기 전에 두 번이나 이혼했다. 그는 25살에 첫 남편이었던 편집장 기 스콸레르와 헤어지며 "나는 새벽 4시에 잠자리에 들고 그는 아침 7시에 일어나 말을 타러 간다. 결정은 내려졌지만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생활을 계속할 수 없었다."라고 했다. 역시 작가는 늦게 잔다는 깨달음과 동시에 불과 스물 중반에 이런 곡절을 겪을 수 있다는 건 작가로서는 행운이 아닌가 생각했다.


 한국에는 격랑의 근현대사를 통과하며 마흔 살에 등단한 고 박완서 작가가 계신다. 선생은 전쟁과 이념 투쟁의 사회변혁을 다 겪으신 상태에서 펜을 드셨다. 얼마나 든든하셨을까. 그는 평생을 소설가로 살며 무수한 작품을 남기셨다. 후배와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떠나셨으니 늦은 데뷔에도 아쉬움이 덜하지 않으셨을까. 요즘은 정유정 작가처럼 문학과 별 관련 없는 삶을 살다가 마흔이 넘어 등단한 경우도 허다하다. 평균 수명이 길어진 만큼 나도 아직 늦지 않았다고 자위해본다.


 한국과 달리 다소 느긋해 보이는 저 프랑스 파리의 폴은 이십 대 초반의 청년 시몽의 구애를 받는다. 그는 직업적으로도 원숙해졌고 사회가 돌아가는 꼴에 관조적인 말을 뱉을 수 있는 서른여덟의 미혼 여성이다. 전문직을 가졌고 파리 시내 한복판에 살며 프랑스 사회의 주류로서 자부심을 느낄만한 위치에 있다. 하지만 평생의 동반자로 믿고 살았던 남자 친구 로제와의 관계가 삐걱거리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차오르는 권태는 물론이고 늘 밖으로만 돌며 자신에게 어떠한 확신도 주지 못하는 로제를 믿을 수 없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선택의 갈림길에 선 폴을 통해 남녀관계의 복잡한 속성에 대해 다양한 사유를 풀어 넣는 작품이다. 이제 마흔에 가까워진 폴은 스스로 늙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수많은 연애와 이별을 거쳤지만 남자 하나 선택하는 데 애를 먹는 게 못내 우습다. 오래된 연인 사이는 헐렁해진 지 오래고, 의욕 과다의 젊은이가 뱉는 우악스러운 낭만도 버겁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진자 운동하는 마음을 어찌하면 좋을꼬.


 나이 든 남자 로제는 여자 친구 폴을 두고 수시로 바람을 피운다. 느닷없이 폴에게 반한 젊은이 시몽은 하던 일까지 다 때려치우고 폴 앞을 서성인다. 사랑은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비이성의 영역에 있는 걸까. 폴이 두 남자를 두고 저울질하는 행태는 우리의 삶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비틀즈의 명곡 <엘리노어 릭비>에 "세상의 모든 외로운 사람들은 다 어디서 오는 거야"라는 가사가 있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사랑을 갈구하는 세 남녀가 전부 외로움에 시달리다 일을 그르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열띤 섹스를 하고 로맨틱한 말을 건네도 그 말에 진심을 담지 못한다. 과잉의 감정과 과장의 수식어만 치렁치렁하다. 사랑을 입에 담는 저 자신도 못 미더운 눈치다. 하루 내내 붙어있다가 술 한잔을 하며 속내를 털어놔도 우리 사이가 전과 같지 않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숙인다. 내 고독을 형형하게 빛내는 독백을 읊조리면 타인의 목소리는 허여멀건 소음이 된다. 이쯤 되면 프랑수아즈 사강이 생전에 했다는 인터뷰 내용이 떠오른다. "농담하세요. 사랑은 이 년 이상 안 갑니다. 좋아요, 삼 년이라고 해두죠." 이제 어찌해야 할까. 모두가 각자 다른 방에서 외로움에 져 살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멈춰 세우지도 못하는 이 애처로운 꼴을 어찌해야 할까.


 늙은 남자 로제는 흥미로운 구석이 있는 친구다. 전에 읽을 땐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다. 로제는 폴을 영혼의 짝으로 느끼지만, 자신과는 하등 관계가 없어 보이는 젊고 천박한 여성에게 관능을 느낀다. 그는 욕정으로 말미암은 관계를 짧게 취하고 다시 폴에게 돌아가길 반복한다. 관계를 망치는 걸 알면서도 외로운 폴을 방관한다. 그는 오래된 관계가 주는 안정은 취하면서도, 성적 긴장은 다 식어버려서 폴과 잠자리를 갖는 데 애를 먹는다. 권태와 맞부딪혀 이겨내려는 의지도 없고, 오히려 대용할 수 있는 가벼운 관계에 탐닉한다. 심각할 것도 그렇다고 몹시 어려운 것도 없는 눈치다. 그는 자신이 경멸해 마지않는 여성과 관계를 맺고 말도 섞기 싫어서 도망치듯 그녀의 집을 빠져나온다. 마치 혼자 있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처럼 어느 카페테라스에서 커피를 시키고 넋을 놓는다. 로제는 시몽과 폴이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화가 나지만 그렇다고 폴에게 화를 내진 못한다.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 알기에 떠나가는 폴을 붙잡을 수 없다. 사실 그는 자신이 어떤 마음인지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애송이가 아닐까. 그건 마치 콘돔, 담뱃값, 속옷 등을 인위적으로 어질러 놓은 '트레이시 에민'의 침대 작품처럼 삶을 방치하는 태도에 가깝다. 어디로든 흘러가겠거니 하며 두 발자국 정도 뒤에 선 삶의 방조자의 시선이다.


 내가 로제라는 캐릭터에 깊이 몰입했던 건 왜일까. 결혼하지 않고 서른다섯이 된 내게 로제는 먼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의 자유를 내 것 같이 생각했을까. 로제는 고만고만한 일을 하며 젊은 여성이나 꼬시며 사는 걸 낙으로 삼는다. 그는 삶에 있어서 이제는 점잖음을 취해야 할 나이라고 느끼지만 반복되는 허무와 권태를 어쩌지 못한다.


 폴이 소설의 마지막에 다시 로제의 집으로 돌아가면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도돌이표를 마주한다. 폴은 젊은 남자에게 자신의 늙음을 고백하고 익숙한 놈팡이 로제 곁에 선다. 마음 같아서는 젊고 유능한 남자 곁에서 보란 듯이 살고 싶지만, 그와의 나이차를 수근덕거리는 주위 눈총을 견디지 못한다. 가엽고 어리석은 폴을 보는 로제의 마음도 복잡하다. 다시 가슴이 답답해지며 이제 더 쉽고 간편해진 외도에 나선다. 사랑의 권력관계에서 우위에 선 로제는 다시 같은 짓을 반복하며 살 것이다. 어질러진 침대는 굳이 치울 생각도 않고 베개 옆에 부스러진 감자튀김 조각이나 툭툭 털어내며 몸을 누일 테지.


 요즘 나이 얘기를 많이 한다. '내 나이가 몇인지 아니.' 우리 인생에 배역이 있다면 항상 드라마틱하고 진취적인 역할을 맡고 싶지만, 단 한 번뿐인 현실에서는 되레 익숙한 옷에 나를 맞추는 게 편하다. 사회가 제약하는 나이에 맞지 않는 삶을 의식한다. 나이를 먹다 보면 능동태를 수동태로 전환할 수 있는 시기가 온다.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점잔을 뺄 수 있다. 그렇게 패배도 반복되면 익숙해지고, 늘 같은 동네 같은 카페만 가는 일상도 편안하게 느낀다. 난 로제와 폴이 관능과 안식의 경계에 발을 걸친 채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걸 보면서 뻔하다고 생각했다. 모험을 떠나기엔 이제 늙어버린,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사랑을 말하는 이가 버거워진, 어떤 폐곡선을 그리는 삶.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렇게 등을 기대고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낀 채 눈을 감는 게 아닐까.


 나는 여자가 뭘 원하는지 늘 궁금해한다. 내 생각에 그들은 깊고 넓은 대화를 원한다. 어떤 대상이든 가리지 않고 다 얘기해야 마땅하다. 근데 남자들은 대화 빼고는 다 잘한다. 말이 많은 걸 남자답지 못한 거라고 믿고, 여성을 한낱 소유물로 여기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오늘날 수많은 연인이 쉽게 만났다가 헤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은 아닐까. 서로가 대화 상대로 적합하지 않기에 오래 두고 보기가 힘겹다. 커트 보네거트는 <나라 없는 사람>이라는 에세이에서 대가족이 해체되고 부부나 연인과 같이 둘만 같이 시간을 보내게 된 요즘과 같은 풍속을 이렇게 비꼰 바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은 결혼하면 딱 한 사람과 가정을 이룬다. 신랑은 친구가 하나 생기는데 그나마 여자다. 신부는 이야기 상대가 하나 생기는데 그나마 남자다." 연인이 싸우면 사람들은 대개 어떤 큰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서로에게 이런 비난을 퍼붓는 것이다. '당신은 나랑 대화가 안 돼. 말이 안 통해.' 연인이 서로에게 허술하고 취약한 건 대화를 원하는 여자와 그걸 피하는 남자가 같이 살기 때문은 아닐까. 폴과 두 남자의 대화엔 그렇게 빗나간 화살과 잘못 연산된 계산 값이 오해라는 이름으로 빗금 쳐있다. 이쯤 되면 필립 로스가 생전에 남긴 이 말을 옮겨 적는 게 적절해 보인다. "산다는 것은 사람들을 오해하는 것이고, 오해하고 오해하고 또 오해하다가,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본 뒤에 또 오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린 패배하며 산다. 고생 고생해서 겨우 닿아도 결국엔 틀렸다는 걸 알면서. 어쩌면 그 실패를 인정해버리면 속은 좀 편할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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