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민진 Feb 16. 2019

김구라

가리지 않기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일요일 오후 이수역 귀퉁이 한 카페에 앉았다. 책과 노트북을 꺼내다 힐끗하니 옆자리에 지금 막 소개팅을 시작한 남녀가 보인다. 입이 텁텁한지 연신 물을 마시는 여자와 보기 힘들게 넥타이를 꽉 조여 맨 남자다. 재빨리 훑어보곤 책에 집중하려고 하지만 자꾸만 눈길이 간다. 남자는 지속해서 무언가를 얘기하지만, 여자는 단답형으로 응한다. 몸을 쭉 내민 남자는 이런저런 농지거리를 건네지만, 분위기는 쉽지 않다. 소개팅에서 처음 만나 남녀가 잘되기 힘든 이유는 자명하다. 세상의 결이 다채로운 만큼 이 도시엔 다양한 인간이 모여 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동체의 틈바구니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만, 저마다 다름을 인정한 채 거리를 둔다. 두 사람의 각기 다른 인생행로처럼 관심사는 서로 빗겨 나간다. 바야흐로 개개인의 취향을 신봉하는 시대가 아닌가. 낯선 그들은 오직 서로의 다름을 절감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다.


 난 김구라를 유독 좋아한다. 평소 TV를 안 봐도 그가 진행하는 몇몇 프로그램은 꾸준히 찾는다. 난 그의 박학다식함이 좋다. 비록 식자층 앞에서는 쉬이 주눅 들고 물정에 어두운 이 앞에서는 옷고름을 풀고 일갈하는 그지만, 그런 속된 면에서 사람 냄새가 나는 건 왜일까. 틈만 나면 잡지식을 자랑하는 김구라는 예능이 가진 무용함의 보완제가 된다. 그는 무명 시절부터 시사와 정치, 성의학, 연예, 팝 칼럼, 주식투자 등 가리지 않고 맡아왔다. 한 마디로 최근 유행하는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과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는 여러 코너를 통해 각계 분야의 전문가와 만나지만 대화가 막히는 법이 없다. 마치 깊이 파기 위해 넓게 파기 시작했다는 철학자 스피노자의 전언처럼 각 분야에 두루두루 깃든다. 김구라를 보면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가 생각난다. 가난한 환경 탓에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한 서자 출신의 이덕무는 오직 책 읽는 일을 천명으로 여겼다. 그의 저술 총서 <청장관전서>엔 역사와 지리, 초목과 곤충,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지적 편력이 녹아있다. 정조에 의해 뒤늦게 규장각 초대 검서관이 된 이유도 그의 지식이 나랏일에 요긴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시대와 쓰임은 다르지만, 난 김구라가 실학자 이덕무만큼 대중에 기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난 <썰전>의 애청자였다. 김구라는 좌우에 진보와 보수 논객을 끼고 대화를 나눴다. 두 진영은 사사건건 대립하지만, 김구라는 특유의 포용력으로 이론적 상충을 현실에 꿰맞췄다. 김구라는 자신이 속물이고 세태에 타협하는 사람임을 숨기지 않았다. 지적 허영을 훈장처럼 달고 걱정을 가장한 독설로 자리를 불편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문제 앞에서도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접점을 찾아냈다. 양 진영의 두 논객이 정치 이상과 현실 논리에서 갈피를 못 잡을 때도 타협에 가까운 건 늘 김구라였다. 정치라는 모두가 손사래 치는 화두 앞에서도 가장 일상에 가까운 예시를 들어 끼워맞춘다. 그러니까 김구라는 ‘박이부정’(博而不精)의 태도로 어느 한쪽 치우치지 않고 중도를 걷는 사람이다.


 난 박학한 이를 동경한다. 어떤 주제를 꺼내든지 몇 가지 지식 정도는 뱉을 수 있는 지식인을 쫓는다. 그러니 미련하게 예능을 보면서도 머리에 주워 담을 쓰임을 생각한다. 최근 <알쓸신잡>과 같은 교양을 중시하는 예능이 많아지는 것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시청자가 늘어남을 보여주는 근거가 아닐까. 평소 여러 모임에서 대화를 나눌 때도 이야기의 층위가 다양한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다. 사무실에서 보고서를 써도, 친구와 카톡을 해도 심지어 블로그에 글 한 줄 적을 때도 다방면의 지식은 생각지도 못한 깨달음을 준다. 늘 서점에 들러 수북이 쌓인 책들 사이에서 조급 해지는 건 내 얇디얇은 인식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정독과 사색의 시대를 뒤로하고 이곳저곳 들쑤시며 더할 나위 없이 안도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