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민진 Sep 22. 2023

도시 수렵채집인의 치팅데이

 이른 아침, 난 기후 위기와 관련한 세미나를 들으러 테헤란로에 도착했다. 다행히 아는 사람이 없는 학술회의였다. 아침 일찍 움직여서인지 몸이 피로했지만 그래도 해방감이 들었다. '출근 안 하는 게 어디냐.' 난 미간에 주름을 잡고 강연에 집중했다. 사회자의 소개에 따르면 강연자가 세계적인 석학이라는데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물론 강의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내가 문제였다. 정확히는 내 배가 문제였다. 난 손을 뻗어서 가방 속 밑바닥에 뭉개져 있던 오곡 쿠키 하나를 꺼냈다. 작년 연말에 이런 비슷한 회의에 참석했다가 가방에 넣고 잊은 과자였다. 난 참호에서 보급품이라도 받은 병사처럼 조금씩 아껴먹었다. 달콤함이 입 속에 퍼져나갔다.


 난 점심시간에 닿으면 만나게 될 뷔페 요리를 상상했다. 참호 속에서 위문편지라도 까보는 병사처럼 그것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육회, 훈제 연어, 탕수육, 양송이수프. 노랗고 붉고 희여 멀겋게 보이는 그것들. 지금쯤 볶아지고 끓여지고 잘리고 있겠지. 강연자는 지금 한국을 뒤덮은 미세먼지와 이상 기후가 다 자동차와 공장의 매연이라고 일갈했다. 난 고기를 구울 때 피어나는 연기를 상상했다. 마음이 포근해졌다.


 난 스무 살 이후부터 수렵채집인으로 살았다. 고대 시대의 수렵채집인이 아니라, 도시 독신자의 수렵채집이었다. 난 이직이 잦고 여러 지방을 전전한 통에 세간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밥도 거의 다 밖에서 해결했다. 그러다 보니 난 수렵채집인처럼 맛집을 사냥하고 맛집 리스트를 모아서 끼니를 때웠다. 급할 때는 편의점 밥을 먹었고, 기회가 되면 구내식당을 이용했다. 수렵채집도 긴 세월 해보니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일하고 운동이 끝나면 동네 단골 고깃집에서 수육과 보쌈을 먹었다. 단순히 동물을 사냥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카페도 섭렵하며 열매, 뿌리 야채, 나뭇잎 등으로 만든 샐러드로 식물 자원까지 보충했다. 원활한 운동과 글쓰기를 위한 커피 열매 섭취도 빼놓지 않았다. 다른 헬스인처럼 식단을 엄격하게 하진 않았다. 대신 좀 많이 굶었다.


 보통 일할 때 난 굶었다. 배고픔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바빴다. 아침은 너무 졸려서 걸렀고, 점심도 대충 때우는 데 그쳤다. 배가 등가죽에 붙어서 퇴근하면 뭘 먹어도 맛있었다. 그렇게 버틸 수 없는 데까지 버티다가 먹는 게 내가 몸을 관리하는 비결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16시간 간헐적 단식을 해온 셈이다. 이런 걸 보면 어째 허기는 지루함에서 오는 게 아닐지 생각했다. 입이 심심하고 손이 심심할 때 군것질거리를 찾지 않나. 그래서 난 바쁘더라도 잘 챙겨 먹는 것보다, 바빠서 먹을 시간도 없는 상태를 선호했다. 직장인과 작가의 삶을 병행하면서도 운동까지 할 수 있었던 것도 내가 '바쁨'이라는 상태를 동경했기 때문이다. 난 바쁜 걸 유능한 걸로 해석했고, 바쁜 걸 인기가 많은 것, 바쁜 걸 섹시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홀쭉한 배는 바쁨이 주는 덕용 선물이었다. 그렇다. 난 내 이성을 믿지 않았다. 내 식탐은 철저하게 통제되어야 마땅했다. '역시 바빠야 해. 바쁜 도시 남자가 날렵한 몸매를 유지하는 건가 봐.' 16시간 굶고 먹는 닭가슴살. 하루 한 끼로 버티다가 먹는 수육 한 접시는 내 몸을 탄탄하게 만들어줬다.


 이렇게 간헐적으로 먹고사니, 먹을 기회가 오면 제대로 먹었다. 오늘처럼 뷔페를 만나면 특히 자잘 먹었다. 뷔페는 사냥 없이도 한 자리에서 산해진미를 맛볼 드문 기회니까. 뷔페를 만났을 때 영양소를 잔뜩 저장해 놓아야 수렵채집 생활을 오래 더 버틸 수 있다. 어쩌다가 회식이 생겨도 난 술 한 잔 안 하면서 고기를 계속 집어 먹었다. 선배들은 날 싫어했지만, 기회만 생기면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영양소를 축적했다.  진화생물학에 따르면 축적은 수렵채집인의 본능 아니던가. 지금 먹어두지 않으면 언제 또 먹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세미나의 섹션 1이 끝나자, 점심시간이 도래했다. 세미나장에 모인 사람들은 연단에 선 강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르르 일어나서 강의장을 나섰다. 지루함에 고통받다 죽은 좀비들처럼 눈이 풀려서는 연회장으로 몰려갔다. 입구에 들어서자, 일식, 한식, 중식이 골고루 놓여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양고기와 랍스터를 비롯한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했다. 난 시각과 냄새에 본능적으로 흥분했다. '뭐부터 먹지. 우선 속 편하게 탕으로 먹을까. 날건 피해야지. 아냐 그러면 쉽게 배가 차잖아. 그래 스테이크를 먹자.'


 난 통제력을 잃기 시작했다. 오케이. 오늘은 치팅데이! "치팅데이"는 일반적으로 "Cheating Day"의 줄임말로 사용되며, 주로 다이어트를 하거나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끔 규칙적인 식단을 무시하고 먹고 싶은 음식을 자유롭게 먹는 날을 말한다. 난 일주일 내내 피곤함에 절어 일해도 어떻게든 힘을 내서 헬스장에 간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주말에 다다르면 고생한 나를 위해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꼭 치팅데이를 가져왔다. 채찍에 사정없이 맞았으면 싱싱한 당근이라는 보상이 필요하다. 전제조건은 일주일간 버틴 인고의 시간이다. 16시간을 버텨낸 그 배고픔. 허기라는 그 통증. 야근하고도 헬스장을 간 정신력. 참고 견디고 이겨낼수록 치팅데이의 기쁨은 배가 된다. 아무리 힘들어도 평일에는 헬스장에 가야만 하고, 폭식이나 허섭음식은 금물이다. 그러다가 토요일이 오면 난 고삐를 풀고 마음껏 먹는다. 그게 바로 오늘이다.


 나는 신이 나서 에어팟을 귀에 꽂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긴 줄에 섰다. 막간을 이용해서 밀리의 서재를 켜고 박상영 작가의 신간 에세이를 읽었다. 근데 옆에서 날 힐끔거리던 회색 정장을 입은 사람이 내게 말을 걸었다.

“몸이 참 좋으시네요. 운동하시는 분인가요? 누가 보면 헬스 트레이너라고 해도 믿겠어요.”

 난 귀에서 에어팟을 빼며 다시 물었다.

"네?"

"몸 좋으시다고요. 박 과장님, 운동 많이 하시죠? 제가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사내 헬스장에서 몸이 제일 좋으시다고."

 나는 날 때부터 도시인이었다. 상대방에게 칭찬을 들으면 칭찬으로 대응해 주어야 한다고 배워왔다. 심히 귀찮았지만, 머리를 긁적이며 수줍게 대답했다.

"아유 제가 무슨, 감사합니다. 근데 이런 평범한 몸으로는 그쪽 일 못해요. 오히려 저보다 날씬하신데요. 근데 제가 인사를 드린 적이 있나요? 죄송합니다. 제가 머리가 나빠서."

 그는 수줍게 웃어 보이면서 손사래 쳤다.

"저 모르시겠어요? 저 옆 사무실 김 대리예요. 과장님."

 난 기억이 안 났지만, 기억이 나는 척 화답했다.

"아 어쩐지 눈에 익는다고 했다. 어떻게 여길 다 오셨어요."

"저도 과장님처럼 기후 위기에 관심이 좀 있어서요."

 나는 오전에 들은 내용이 거의 없어서 당황했지만, 다행히도 그는 더는 묻지 않았다.

 내가 구석진 자리로 가서 혼자 식사하려고 하자 그가 날 불렀다.

"선배님, 달리 일행 없으면 같이 들어요."

"아, 네"


 난 언제 과장님에서 선배가 됐는지 어리둥절했지만, 호의가 고마워서 그이 옆자리에 앉았다. 유튜브를 켜고 김하성 홈런 영상을 보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아는 사람을 만났으니 별수 있나. 못내 모른 척하고 지나치지 않은 그가 미워졌다. 후배 입장에서는 인사 안 하고 지나가는 게 더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내가 양송이수프를 한 입 떠먹자, 후배는 의외라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선배, 그런 것도 드세요? 엄청나게 가려서 드실 것 같았는데 의외네요.”

 나는 왠지 그의 기대를 배반한 것 같아서 겸연쩍게 얘기했다.

“난 그냥 다 먹어. 내가 식단까지 했으면 지금보다는 몸이 더 좋았겠지. 내 팔 좀 봐. 흔들거리잖아. 식단 하면 이렇게 안 돼."

“정말요? 그렇게 안 보이는데. 그렇게 먹고도 지금 몸 유지하시는 게 대단한 거죠? 저도 왕년에 몸 만들 때 고생 좀 했거든요. 기름지고 짠 음식을 못 먹으니, 나중에는 손이 다 떨리더라고요.”

난 겨우 한 입 뜬 양송이수프를 보며 중얼거렸다.

"나 이제 겨우 한 입 먹었어. 식단 얘기 좀 그만해. 속 편이 좀 먹게."


 나는 헬스 후에 주로 닭가슴살을 챙겨 먹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끼 식단을 지켜내진 않는다. 누구나 다 닭가슴살에 방울토마토 그리고 현미 햇반 130g짜리 하나만 먹으면 살이 빠지고 몸에 각이 진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가는 우울증을 면치 못할 것이다. 특히 나처럼 먹는 것에 열광하는 사람이 식단까지 하면 사는 맛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난 열량과 단백질 섭취량을 꼼꼼히 계산한다거나, 양송이수프 한 그릇에 벌벌 떨지 않는다. 그렇다고 먹고 싶은 걸 다 먹고살지는 못해도 정말 먹고 싶은 게 있을 땐 먹으면서 스트레스를 푼다. 온종일 일하고 저녁에 운동까지 했는데 매끼 풀때기랑 닭가슴살만 먹을 순 없다. 지속할 수 없는 식단은 식단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난 먹을 걸 먹되 내 나름의 기준을 갖고 먹는다. 난 아무리 맛있는 걸 먹더라도 이왕이면 단백질이 풍부한 육류를 택한다. 튀긴 건 열량이 높기 때문에 이왕이면 굽거나 찐 음식을 먹는다. 피자보다는 치킨이 낫고, 치킨보다는 스테이크나 보쌈이 낫다. 비싼 뷔페라면 육류보다는 생선이 건강에 더 좋고, 이왕이면 소스나 국물 없이 최대한 날것으로 먹고자 한다. 이것마저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후배 말마따나 식단을 조절하지 않고는 지금 몸을 유지하기도 어렵다. 명색이 <운동의 참맛>을 쓴 작가인데 배 나오고 근육이 축 처질 순 없으니까.


 이렇게 난 치팅데이에도 내 나름의 요령을 갖고 먹는다. 이게 내가 식도락은 놓지 않으면서 최악은 피해 먹는 요령이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자 후배는 신기한지 내 식사 습관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난 <운동의 참맛>을 사서 보라고 눙치고는 식사에 집중했다.


 내가 한 번에 세 그릇을 퍼오자, 후배는 내가 너무 잘 먹는다며 감탄을 연발했다.

“와 정말 많이도 담으셨네. 정말 엄청나게 드시나 봐. 설마 그릇별로 요리를 카테고리화한 거예요? 선배 진짜 고수다.”

난 이성을 잃고 터져 나온 내 식탐이 부끄러워져서는 겸연쩍게 웃으며 먹기 시작했다.

"내가 이거 먹으려고 그 고생을 하면서 운동하고 굶는 건데. 오늘 나 날 잡았다. 섹션 2에 못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나갈 거다."

"선배는 소문대로 의지가 대단하네요. 진짜 바쁘게 사신다는 건 들었는데. 역시 선배는 계획이 다 있구나."

"너는 칭찬이 입에 발렸구나. 오늘 너 나랑 처음 대화했잖아. 날 어떻게 안다고 말끝마다 내 칭찬이야. 고맙긴 한데, 진심은 몇 퍼센트 섞인 거냐?"

"에이 선배, 제 표정 보면 몰라요. 저는 진실만 얘기해요. 제가 어디 가서 누굴 그렇게 칭찬하는 경우는 드물어요."

"드물기는. 안 봐도 삼천린데. 나쁘게 말하면 아부 같지만, 난 네 말솜씨가 더 부럽다. 난 좋게 보인다. 너의 그 너스레 솜씨, 나도 좀 배워야겠다."


 나는 후배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수렵채집인의 삶과 다른 안정된 가정을 꾸린 후배의 삶도 꽤 다이내믹했다. 아이들 때문에 운동하기 어려워진 일상. 회사에서 혼자 먹는 도시락의 맛. 기후 위기 관련한 세미나를 여러 번 찾아다녔다는 취향. 내 치팅데이는 어느새 물 건너가고 연회장은 대화의 장으로 탈바꿈했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여유였다.


 난 사는 게 바빠서 늘 식사를 때웠다. 난 먹는 걸 즐기는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식사는 아니었다. 영양소 섭취이자 에너지의 보충이기는 했지만, 그 앞에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여자친구와 밥을 먹을 때도 재빨리 먹기에만 급급했다. 집에서는 서서 닭가슴살을 데워서 3분 만에 끼니를 때웠다. 정말 3분 안에 한 끼를 다 먹는다. 어떻게 보면 내 식사 시간은 또 다른 의미의 치팅데이가 필요했다. 지금 밥을 먹는 이 시간만큼은 바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가짐이 그것이다. 여자친구는 그러면 언제 여유 있게 살 수 있냐고 늘 내게 묻는다. 난 대답할 수 없지만 곧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말하며 현재를 유예시킨다. 내가 날 속이지 않으면 그런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평온한 표정을 하고 천천히 음식을 즐기며 말을 걸어온 후배가 내게 오늘 가르쳐준 교훈이다.


 난 황홀한 치팅데이의 마지막을 설탕이 잔뜩 든 에스프레소로 마무리했다. “그래, 치팅 데이잖아.” 배가 부르니 만사가 태평해지는 기분이었다. 난 후배와 번호를 교환했다. 가끔 만나서 에스프레소를 즐기자고 약속했다. 후배는 다리를 꼬고 구두를 달랑달랑하면서 내 카카오톡 사진들을 스케치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며칠간 나를 괴롭히던 미세한 우울감도 싹 사라졌다. 오늘은 과식했으니, 저녁에 기필코 운동하러 가야지!

이전 06화 행복은 반복의 욕구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