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시계를 보니 벌써 느지막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내 눈을 찔러댔다. 일찍 일어나 하루를 길게 쓰고 싶었는데. 짜증이 확 올라왔다. '물 한잔하고 바로 나가야겠어.' 시간이 아까우면 씻기를 생략한다. 운동복을 입으려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삐걱, 덜컥. 극심한 근육통이 몸을 지배했다. 어제 몸을 덜 풀고 한 하체 운동이 화근이었다. 무리해서 무게를 쳤더니 등부터 목까지 단단히 뭉쳤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내가 원했던 건 시원하게 들어 올리는 쾌감이었다. 그건 성공의 맛이었다. 나를 짓누르는 무게와 맞서 이겨내는 성취감. 근데 이 꼴이 났다.
어제는 최악의 하루였다. 지각해서 한소리 들었다. 끝내려던 보고서는 퇴짜 맞았다. 공들여 올린 글도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운동이라도 잘 해냈으면 좋았을 텐데. 운동으로 최악의 하루를 역전시킬 요량이었다. 막판 뒤집기 같은 거. 그레코로만 심권호처럼 쇠를 번쩍 들어서 매치고 싶었다. '이 망할 놈의 하루 다 끄지라!' 시작부터 100킬로그램. 스트레칭 생략에 자세는 무너졌다. 불과 5년 전이었다면 젊음의 호기였다. 하지만 서른 후반의 호기는 객기로 탈바꿈했다.
운동을 오래 하니 성공은 운동의 다가 아니었다. 소셜미디어 쇼츠는 성공의 그 순간을 포착한다. 근데 어디 일상이 그렇던가. 늘어진 비디오테이프처럼 지난한 게 삶이다. 히치콕은 영화란 지루한 부분을 커트한 인생이라고 했다지. <탑건>에서는 톰 크루즈가 상공에서 마하를 뚫고 승리할 때가 클라이맥스다. 그다음은 뭘까. 영화는 거기에서 커트한다. 바로 승전을 알리는 파티로 넘어간다. 맥주 한 잔, 아름다운 미녀. 그걸로 끝인가. 현실은 다르다. 클라이맥스를 뚫어내면 바로 하강이다. 속도를 줄이고 압력에 훼손된 신체를 돌봐야 한다. 파티는 언감생심 우선 씻고 좀 자 둬야 한다. 톰 크루즈 나이가 몇인데 바로 파티인가.
운동도 다르지 않다. 100킬로그램이 넘는 쇳덩이를 들어내면 반만 성공이다. 이제 그걸 다시 바닥에 내려놓아야 한다.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무게를 받아낸다. 호흡을 가다듬고 코어에 힘을 준다. 무차별적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에 맞서 속도를 늦춘다. 헬스는 그렇게 중력에 저항하는 일이다. 승리의 쾌감보다는 바르게 서 있는 게 더 중요하다. 코어 근육은 그래서 우람한 팔에 붙어있지 않다. 두툼한 가슴 근육도 아니다. 사람 몸의 핵심은 바로 몸통이다. 척추와 골반의 균형을 잡아주는 기립근에 진짜가 있다. 코어를 통해 고요하게 잦아드는 호흡이 실로 핵심이다.
어제 난 무게를 들어내면 이기는 줄 알고 설쳤다. 코어에 힘이 풀려서 지금 잘 서지도 못한다. 사람이 기립하지 못하면 운동이 무슨 소용인가. 난 계속 앓아누웠다. 베개 아래에 깔린 핸드폰은 질식했는지 꺼져있었다. ‘지금 몇 시지?’ 긴급하게 핸드폰에 충전기를 연결했다. 한입 베어 문 사과 모양이 화면에 뜨길 기다렸다. 다행히 다른 연락은 없었다. 이불은 빤 지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얼룩덜룩했다. 어디선가 퀴퀴한 냄새가 났다. 어제 입은 운동복이 소파 뒤편에 변사체처럼 늘어져있다.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한동안 멍하니 벽지를 쳐다봤다. 오스카 와일드도 파리의 꾀죄죄한 호텔에서 이런 말을 했다지. "나는 벽지와 목숨을 건 결투를 벌이고 있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이 나겠다.”
근육통은 나 같은 헬스인에게는 반갑고도 무서운 손님이다. 왠지 운동이 잘 되었다는 기쁨을 준다. 동시에 그날 하루를 빌빌거리게 만든다. 건강하게 지내려고 운동을 하는데 근육통이 생기면 몸을 움직이기도 버겁다. 운동을 잘해서 생기는 근육통은 '지연성 근육통'이다. 근육에 손상이 생기고 그걸 회복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고통이다. 보통 운동을 처음 하거나, 운동을 한참 쉬다가 하면 발생한다.
지연성 근육통이 자연스러운 통증이라면, 부상으로 인해 생기는 근육통도 있다. 관절이 상하거나 근육이 뭉쳐서 발생한다. 두 통증이 헷갈릴까. 아니다. 본능적으로 잘못된 건 알아챈다. 부상으로 인한 통증은 느낌부터 다르다. 덜컹, 삐걱하는 소리가 나고 '커억', '으헉'하는 신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지연성 근육통은 욱신거리고 하락하는 긴 호흡이 난다. 엄연히 다르다. 오늘 내 통증은 확실히 '덜컹덜컹'에 삐걱이었다. '커억'하다가 정오를 넘겨버린 신음소리였다. 16년 운동을 한 나도 이런 부상에 시달린다.
사람들은 조금만 익숙해지고 더 나아가 능숙해지면 방심한다. 고작 관악산에 오르고 히말라야를 정복한 것처럼 군다. 산을 오르면 천지가 코앞이라고 허풍을 떤다. 성공에 심취한 탓이다. 운동의 핵심은 눈에 보이지 않는 코어라는 걸 망각한다. 점점 다룰 수 있는 무게가 올라가면 설레발을 친다. 인스타그램에 좋아요 수가 올라가면 무서울 게 없다. 이런 시건방은 일종의 인지편향이다. 부상의 악령을 부르는 착각이다. 그래 겸손은 힘들다. 난 <운동의 참맛>이라는 책을 내고도 이 꼴이다.
부상을 방지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원칙이다. 배운 대로 하는 것이다. 기본이 중요하다. 뻔한 말이지만 악마는 기본기에 있다. 나뿐 아니라 거의 모든 헬스인이 헷갈려하는 게 무게와 자극이다. 헬스 할 때는 보통 그날 할 종목과 그 종목을 얼마나 단련할지 세트수를 정한다. 가령, 난 하체 운동 스쿼트는 일주일에 2회, 5회씩 5세트를 한다. 무게를 올리면 자연스럽게 세트당 운동 횟수가 줄어들고, 자극을 생각해서 가벼운 무게로 횟수를 늘리면 운동이 과연 잘 된 건지 의구심이 든다. 그래서 그 적당한 무게를 찾고자 바벨을 꼈다가 뺀다.
보통 전문가들은 세트당 8~12회를 추천하고 5세트 정도를 추천한다. 가벼운 무게에서 점차 무게를 늘려나가다가, 최고 지점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피라미드형 운동을 추천한다. 하지만 운동에 재미를 붙이면 욕심이 나게 마련이다. 왠지 힘을 과시하고픈 허영이 올라온다. 스테레칭과 몸 풀기가 귀찮아진다. 더 높은 무게로 나아가고픈 상승 욕구가 올라온다. 옆에 운동 좀 하는 사람이 오면 정수리까지 테스토스테론이 치솟는다. 허영심이 무게를 더 들어내라고 아우성을 친다. 주위 눈치를 보며 내 무게가 아니 쇠와 씨름한다. 노화를 인정하기 싫어서 무게를 내리지 못하고 버텨낸다. 그 순간부터 헬스는 운동이 아닌 노동으로 바뀐다.
헬스에서 무게 욕심 다음으로 어려운 게 속도다. 속도가 빨라지면 부상 위험이 올라간다. 헬스는 천천히 하는 운동이다. 속도를 제어하는 헬스의 방식을 이른바 ‘네거티브’라고 불리는 '신장성 운동'(eccentric 방식)이라고 말한다. 운동 동작을 할 때 '천천히 속도를 제어'하면서 자극을 음미하는 방식이다. 속도를 늦추면 근육에 적당한 대미지를 주면서도 부상 위험은 막을 수 있다. 이런 걸 '보디빌딩식 운동'이라고 말한다. 오직 근육에 부하를 주기 위한 동작이므로 '고립 운동'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말로 부르든지 상관없다. 중요한 건 속도를 늦추는 데 있다.
신장성 운동은 어려운 책을 읽을 때의 원리와 같다. 어려운 책을 벼르지 않고 빠르게만 읽어봤자 제대로 소화할리 없다. 천천히 읽어야 하는 책은 그 '느림'이 독서의 핵심이다. 운동도 마찬가지로 천천히 근육의 자극을 느끼는 과정에서 독서의 정독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 완전히 이해하고 씹어 먹는 과정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헬스는 무게를 들어내는 게 아니라 근육에 상처를 내는 운동이다. 몸에 잔잔하게 퍼져나가는 통증을 느끼면서 미소 짓는 종목이다. 아무리 무거운 걸 들어도 자극을 주지 못하면 근육이 원하는 만큼 발달하지 않는다.
나 역시 신장성 운동의 원리를 잘 알면서도 다친다. 여전히 서두르며 운동하다가 삐끗한다. 일터에서 현란한 템포에 취해있다가 헬스장에 들어가면 마음이 급해져서 그렇다. 헬스를 끝내도 저녁에 해야 할 일이 서른아홉 가지는 되니까 여유가 없다. 느긋하게 하다가는 하루가 다 질 것 같다. 요즘에는 헬스 할 때 마음을 가라앉히고 속도를 제어하려고 노력한다. 무게도 천천히 올린다. 헬스장을 거닐면 바깥과 다른 느린 템포를 느낄 수 있다. 헬스에 숙련된 사람일수록 천천히 무게를 느끼면서 하는 게 보인다. 근육에 자극을 먹이는 맛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운동을 즐긴다. 근육을 단련하는 그 과정 자체에 몰두한 모양새다. 김종국이 말한 헬스의 딸기맛이 바로 그 은은함에 있지 않을까.
운동하다 보면 내가 운동을 하는 이유를 되묻는다. 새삼스럽게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하나. 우람한 근육은 부차적인 이유다. 코어는 좀 더 깊숙한 곳에 있다. 호흡이 가빠지는 곳에 보인다. 몸이 뜨거워지고 땀이 흘러내릴 때 알아챈다. 아 거기에 있구나. 세트를 막 끝내고 허리에 손을 짚을 때 미소가 새어 나온다. 아 거기에 있구나. 목이 타서 커피를 한 모금 빨고 다시 쇳덩이를 붙들 때 얼핏 깨닫는다. 아 거기에 있구나. 난 참 그게 이상하다. 뭐 하러 그렇게 아름다운지. 어차피 보이지도 않을게 뭐 그리도 좋은지. 마라탕 한 그릇이면 후회막심할 거면서 뭐가 그리도 뿌듯한지. 운동은 그렇게 제법 의미심장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