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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Oct 06. 2023

시리와 함께하는 시티런

 난 발을 구르며 신호등을 바라봤다. 난 신경이 예민해진 개처럼 앞뒤로 몸을 들썩였다. 허벅지에 힘을 준 채 당장이라도 출발할 태세였다. 횡단보도 신호등의 걸어가는 사람 형상에 파란불이 들어왔다. 보도에 선 사람들이 아스팔트의 검음 표면 위에 칠해진 하얀 줄무늬를 밟으며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난 그들 사이를 유유히 헤치며 내달렸다. 애플워치는 목적지까지 3킬로미터가 남았음을 알렸다.


 2017년, 해외 파견 1년이 되던 때 툴루즈의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다. 나는 타향살이를 하며 정서적으로 메말라 있었다. 일이 고된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어렵게 도달한 그때까지의 시간들이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다. 마치 주머니에 넣고 잊어버린 쿠쿠다스처럼 정신과 몸이 훼손됐다. 서른 초반, 난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 하기 싫은 일에 종일 매달려 산다는 게 너무 참담했다. 성과급 평가에서 바닥을 찍을 정도로 일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인데 이 꼴이라니.' 우울해지니 침대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살도 불었다. 라코스테 피케티의 단추가 힘겹게 매달려있었다. 하루종일 할 일을 미루다가 새벽까지 붙들다가 자는 일이 잦아졌다. 일터에 늦게 나타나니 서울 본사에서 경고 메일이 날아왔다. 장래는커녕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마음만 들었다. 


 우울했던 시절, 작가에 대한 꿈도 희망도 모조리 접자고 결심했던 프랑스의 겨울. 그래도 가끔씩이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은 운동이었다. 툴루즈의 외곽에 살던 나는 일터에 가기 위해 자주 걸었다. 프랑스는 교통비도 비싸서 버스도 타기 아까웠다. 운동도 할 겸 걷기를 시작했지만 얼마 못 가 지쳐버렸다. 그 시절 내 귀에 고운 목소리로 책에 관해 얘기해 준 팟캐스트 빨간책방의 이동진, 김중혁 작가를 잊지 못한다. 그들은 내 출퇴근길의 동반자였고, 내가 피식이라도 웃을 수 있게 도와줬다. 두 작가와 한 시간 정도를 걷다가 일을 시작하면 그나마 힘이 났다. 햇볕을 쬐고 땀을 흘리니 기분이 나아졌다. 그때 난 내가 호르몬의 영향 아래 있지 않나 생각했다. 대낮에 슬슬 뛰어만 다녀도 기분이 나아지는구나. 외로운 나날, 내가 어울리는 친구는 이동진과 김중혁 콤비 외에 사이좋기로 유명한 세로토닌과 멜라토닌 듀오뿐이었다.


 그렇게 걷기로 우울감을 이겨내다가 어느 날부터는 뛰기 시작했다. 겨울 어느 날 너무 추워서 오늘은 못 걷겠다고 생각하고 버스정류장에 섰다. '누가 프랑스는 일 년 내내 따뜻하고 했어. 안 와본 놈들이 뭘 모르는 소릴 하더라.' 배차 간격이 길기로 유명한 툴루즈 시내버스는 번번이 날 추위에 떨게 했다. 그렇게 추위에 떨면서 기다리다가 우연히 버스정류장 옆 허름한 중고 가전기기 매장 진열대에 놓인 애플워치를 봤다. 올려놓은 모양새를 보니 방금 누군가가 중고로 팔고 간 모양이었다. '아! 애플은 중고도 비싸네. 저 조그만 게 무슨 200유로나 하냐.' 4년째 구형 구형 카시오 손목시계를 타고 다니던 난 영롱하게 빛나는 애플워치를 보자마자 탐났다. '이런 걸 애플병이라고 하나.' 필요해서 사는 게 아니라 예쁘니까 필요해지는 증세였다. 내 탄식과 함께 갑자기 메타버스 차원이동 블록체인 다중우주 타임슬립 효과가 내 머릿속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내가 애플워치를 사야만 하는 12가지 이유가 엑셀시트처럼 착착 정리되는 게 느껴졌다. 환한 대낮에 애플워치를 차고 도시를 달리는 내 모습이 그려졌다. 


 다음 날 나는 거금 주고 산 애플워치를 위해 뛰었다. 워치로 운동앱을 켜자 숫자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5, 4, 3, 2, 1. 난 달리기 시작했다. 내 첫 러닝이었다. 애플워치 속에 사는 고운 목소리의 시리는 내게 기분 좋은 음악을 틀어줬고, 날씨까지 알려줬다. '오늘 날씨는 대체로 맑은 편이며, 추천 곡은 자주 들으시는 곡 always awake입니다.' 난 그간 듣지 못했던 한국말을 들으니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뛰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시리는 1킬로마다 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칭찬을 늘어놨다. '오늘은 페이스가 좋네요. 어제보다 1분 기록이 단축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근처에 뭐가 있는지 속속들이 알렸다. '우측으로 가시면 지난주에 방문한 카페가 있습니다.' 난 미션임파서블의 IMF요원이라도 된 것처럼 시리와 교신하며 내 운동량을 기록했다. 처음 자전거를 배웠던 그때 그 순간처럼, 나는 첫 러닝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다리가 몸으로 감기면서, 들숨과 함께 풍경이 서서히 내 뒤로 서서히 사그라지는 모습은 하루키가 자신의 묘사한 그대로였다. 


 난 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때 그 애플워치를 차고 달린다. 시리와 교신하며 내 운동량을 체크한다. 서울에서 뛴다는 건 프랑스에서의 러닝과는 살짝 다르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달린다는 것은 무수한 장애물과 멈춤 신호를 감내하며 달리는 것이다. 파란불이 사그라들면 제자리걸음을 해야 하고, 앞에 사람이 많으면 비켜나서 달려야 한다. 교통량과 보행자 수가 엄청난 서울 시내는 달리기에 최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에서 달리는 데는 그만한 매력이 있다. 시티런은 어디든지 갈 수 있고, 주변을 살필 수 있는 여유를 줘서 지루하지 않다. 마치 스크린 속 영화를 보는 것처럼 계절의 변화, 구름의 움직임, 네온사인의 영롱함을 관찰하기도 한다. 현대 도시는 빛의 제국 아닌가. 시티런은 르네 마그리트의 신비로운 그림처럼 빛과 어둠을 머금은 피사체를 즐기는 과정이다. 또한 시티런은 아주 천천히 뛰는 게 매력이다. 


 나는 언제나 배낭을 메고 다니는데, 그 튼튼한 배낭에는 노트북과 책 한 권 그리고 잡동사니가 들어있어서 운동 효과를 배가시킨다. 걷다가 뛰고 그러다가 잠시 쉬기도 하는 느슨한 방식으로 몸을 단련한다. 도심에서는 빠른 속도로 뛸 수 없으니 좁은 보폭으로 스텝을 리드미컬하게 밟아 나가는 것이 요령이다. 직선주로의 활력보다는 류현진의 슬로 커브처럼 유려한 곡선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힘들면 걷고, 걷다가 지루해지면 벤치에서 쉬거나 카페에 들어가서 목을 축여도 좋다. 완독의 부담 없는 독서처럼 곤두서거나 다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만큼만 한다. 


 시리는 이번 달 내가 뛴 거리가 무려 140킬로라며 나를 추켜세웠다. 애플워치는 폭죽을 터뜨렸다.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5킬로씩은 뛰던 게 쌓여 낸 성과다. 작은 목표를 세워 성취할 때 분비되는 호르몬이 바로 도파민이다. 달리기라는 작은 목표도 꾸준히 성취하다 보면 도파민이 분비된다. 반복은 습관이 되고, 습관이 쌓이면 다음 성취로 이어진다. 도파민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으니까. 난 러닝을 하면서 내가 호르몬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걸 깨달았다. 난 러닝을 끝내고 샤워를 하며 생각한다. 지금 내가 얻은 건 도파민인가 세로토닌인가. 그건 지금 내게 어떤 힘을 가져다주나. 저 먼 프랑스 땅에서도, 지금 바로 여기에서도 그들은 내 곁을 지키고 서 있다.


 최근에 러닝크루를 만들어서 사람들과 뛰고 있다. 소모임 형태로 하나둘씩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러닝크루에 가입했다. 준영이는 이별의 아픔을 땀으로 달래기 위해, 은서는 곧 있을 바디프로필을 위해, 상우는 사난냄새 맡으러. 모두 다른 각자만의 이유를 가지고 러닝을 하러 나왔다. 그중에서도 내가 얘기한 슬로러닝, 멀리 가지 않고 도시를 걷는 듯 천천히 함께 뛸 수 있다는 말에 끌렸다는 의견이 가장 많았다. 운동을 못하는 자신도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왔다고. 운동을 전혀 못해서, 남에게 피해가 갈까 봐, 혼자 하면 너무 두려워서 그간 못했다는 말도 들을 수 있었다. 난 얘기한다. 누구나 어차피 처음에는 다 서툴다. 우리가 윤성빈 김종국도 아니고 어째 그렇게 잘하겠나. 운동은 잘 해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그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초보는 초보대로, 운동을 미처 배우지 못한 사람은 서투른 대로, 살이 찐 사람은 찐 대로, 저질체력은 그 체력 하에서 운동을 즐기는 저마다의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운동이라는 것은 무슨 정도가 있고, 어떤 자격이 있어서 하는 게 아니다. 비교를 위한 기록은 터무니없다. 운동을 누군가를 이기거나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면 차마 나서기가 버겁다. 이게 무슨 대입을 위한 혹은 진급을 위한 시험도 아니고 점수와 성취도를 평가하나. 운동은 즐기는 것이다. 과정에 모든 것이 담긴 삶의 동력이다. 오늘 슬로 러닝은 출판사 건물 앞에서 끝이 났다. 난 빌딩 화장실에서 간단하게 땀을 덜어내고, 세수를 했다. 상기된 얼굴과 물에 젖은 머리가 촉촉했다. 난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인사를 건넸다. 애플워치를 보니 이제 막 5킬로미터를 넘었음을 보여줬다. '벌써 5킬로가 넘었네요. 오늘 컨디션이 좋으시군요.' 기록을 보니 30분간 킬로당 7분 정도의 시간을 소요했다. 난 시리를 종료시키고 애플워치를 회의모드로 전환했다. 오늘도 러닝 완료! 오런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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