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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Oct 13. 2023

약간의 힘을 줘본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지겨웠다.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서 하나마나한 보고서나 써야 하는 팔자라니. 사무실 전화가 울리면 화면에 뜨는 번호만 봐도 맥 빠지는 한숨이 나왔다. 결말이 다 정해진 단막극. 뻔한 에피소드. 거기서 거기로 보이는 등장인물. 거대한 불행이 닥쳐오지 않는다면 고만고만한 하루가 반복될 터였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를 매일같이 반복해서 이동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정년 보장과 연금 빼면 시체라는 말을 내 입으로 하다니. 내 삶이 그런 거였나. ‘동일한 것의 반복’을 의무로 삼아야 하다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 마지않는 하루라니.


 내 삶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에어팟에서 시리가 내게 속삭인다. '어쩌다 이렇게 되긴, 네가 그렇게 되기를 바랐잖아. 안정된 직장을 찾으려고 몇 년을 공부하고, 손실 없이 살아보려고 채권형 삶에 시간을 꼬라박았잖아.' 그렇긴 하다. 난 비트코인이 유행해서 세상이 떠들썩할 때도 별 동요 없이 살았다. 내가 이룬 안정이 조금이라도 훼손될까 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난 고작 코인노래방에서 비트에 랩을 하며 위안 삼았다. "왜냐면 난 내가 내 꿈의 근처라도 가보고는 죽어야지 싶더라고! 이 밤이 와도 이 밤이 가도 I'm always awake!"


 내가 그토록 불러대던 랩가사와 거리가 먼 삶으로 살면서 쟁취하려고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퇴근 후 3시간이다. 난 그저 퇴근길을 즐기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침 8시부터 퇴근만 벼르곤 했으니까. 직장에서는 일도 잘 못하고 한숨이나 푹푹 쉬는 박 과장이었지만, 퇴근만 하면 소문난 헬창이 되었다. '퇴근하면 남다르게 살아야지. 동일한 것이 반복되는 삶이 아니라, 일상이 ‘차이의 반복’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즐기는 거야! 좋았어! 늘 하던 걸 매번 되풀이해도, 퇴근만 하면 순간 내 하루는 그 어떤 하루와도 같을 수 없었다. 난 좀 다르니까. 뭐가 달라? 난 무려 '운동하는 직장인'이야!


 지금이야 운동하는 직장인이 수두룩하지만, 2009년 당시에는 나처럼 리프팅벨트를 어깨에 걸치고 헬스장에 가는 인간은 많지 않았다. 운동은 어떻게 남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가. 가장 먼저 몸이 변한다. 사무직 직원 답지 않게 배가 들어가고, 팔뚝이 단단해진다. 운동에 관한 이론을 습득하고, 글로 연재하니 내게 운동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 덕에 자신감이 붙은 난 신이 나서는 어디 가서도 쫀쫀한 티를 입고 운동한 티를 냈다. '어, 쟤는 헬스도 하고 책도 쓴대. 범상치 않네.' 난 이 말을 듣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차이의 생성이 있는 한 내 일상은 결코 ‘죽은 시간’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이때부터 무겁기만 하던 출근길 발걸음에도 힘이 실렸다. 체력이 강해지면서 삶을 소화하는 효율이 좋아졌다. 수많은 취미를 가지고도 지치지 않았다. 


 난 그간 차곡차곡 쌓여온 운동 경험을 고스란히 녹여, 운동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에세이도 꾸준히 브런치에 연재했다. 내게 운동은 동일한 것의 반복인 일상을 차이의 반복으로 변모시키는 힘이었고, 이를 통해 오늘과 내일이 각기 다른 하루로 분화했다. 내가 쓴 글은 좋은 반응을 얻었다. 난 운동이 지닌 고양감을 믿는 사람이지만, 그걸 바깥으로 표출하면서 비로소 내 삶이 달라졌다고 느낀다.  


 내가 운동에 관해 글을 쓴 이유는 단순했다. 우리 각자의 모든 삶이 예술 작품이 될 수는 없을까? 왜 세상 모든 물건이 예술의 대상이 되는데 우리의 삶은 예술일 수 없는 것일까? 운동은 내가 예술적으로 살 수 있게 해 줬다. 운동은 우리의 일상을 닮았다. 단조롭다 못해 무미건조해 보일 정도로 메말랐다. 하지만 그 표면 밑에는 수많은 격정이 숨어 있다. 


 난 헬스장에 들어서서 시퍼런 쇳덩이와 교감한다. 쇳덩이를 만지는 순간과 그것이 내 몸에 자극으로 다가오는 장면이다. 근성장의 지각 경험은 관능적이다. 얕은 신음과 땀이 흘러나온다. 쇳덩이를 몸에 싣고 정해진 범위에서 몸을 자극한다. 세포가 분열하고, 근육은 터진다. 몸이 뒤틀릴 만큼 고통스럽지만, 표정을 숨기고 기계화된 리듬감을 놓치지 않는다. 하나둘셋넷다섯.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아름다운 분열을 체감한다. 순간이 영원처럼 길어지고, 거울 속 나는 전과 다르게 부풀어있다. 나를 스스로 관찰하는 거리감이 생긴다. 주체와 관찰 대상 모두를 겸하는 나. 그리고 어느 순간 헬스장 기구들과 헬스장에 모인 사람들, 그들의 호흡이 내게 전이되면서 내 기계화된 리듬은 시간에 비트를 쪼개 넣는다. 16비트! 32비트!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 아닐까? 중요한 것은 일상의 단조로움이 아니라, 그 안에 숨어 있는 차이를 끄집어내는 행위, 그럼으로써 우리의 삶을 예술화하는 실천 행위일 것이다. 난 헬스장에서 또는 트랙에서 심장박동과 유사한 리듬을 발견할 수 있다. 무료한 일상에 어떻게든 힘을 불어넣는 자들. 비트가 시작되면 몸이 먼저 움직이듯, 내가 쓴 운동에세이는 퇴근하는 직장인을 쇠 냄새나는 헬스장으로 끌어당겼다.  


 내가 쓴 운동에세이가 인기를 끌자,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게 됐다. 책, 영화, 글쓰기를 나 혼자 즐기는데 그치지 않고 온갖 커뮤니티 모임을 개설해서 수많은 사람들과 나의 취향을 주고받았다. 최근에는 내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강연도 시작했다. 내가 운동을 즐기고 그걸 글로 쓰는 작가의 삶을 신기해하는 분들이 내가 여는 독서모임과 글쓰기모임을 찾아왔다. <운동의 참맛>이 인기를 끌면서 내가 연 러닝크루에도 사람이 붐빈다. 내 책을 읽고 헬스장 등록했다는 DM도 받고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뿜어내는 영향력을 실감하고 있다. 내게 강연을 의뢰하는 분 대다수는 운동하는 작가로서의 이야기와 취미로 삶을 바꾼 경험에 대해 강연해 주기를 바랐다. 난 기꺼이 내 삶이 돌아가는 원리를 꺼내어 보였다. 


 운동을 하다 보면 언제 어디서든 함께 들고뛰는 동료들을 발견할 수 있다. 나와 헬스를 하는 여자친구, 함께 뛰는 크루원들 그리고 전혀 모르는 데도 함께 같은 공간에서 땀을 흘리는 것만으로 애정하는 헬스장 회원들이 보인다. 최근에는 일면식도 없는 분들과 대화를 한다. 몇 달 전 내가 운영하는 강연을 찾아온 한 동년배의 친구는 '갭이어'를 보내고 있다고 얘기했다. '직장 때려치우고 놀고 있어요.' '왜요?' '그냥 뭐. 그렇게 됐어요.' 그는 쭈뼛거리며 다가와서 내 책에 사인을 받았다. 그는 내게 속삭이듯 얘기했다. 잘 읽었다고, 요즘 운동을 시작했다고. '갭이어'는 일을 잠시 중단하고 향후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는 시간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인문학적 고찰이다. 하지만 그는 철학책 대신 헬스장 회원권으로 갭을 메우고 있었다. 그는 이별로 인해 극심하게 외로웠고,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에 시달렸지만 내가 연 모임에서 활력을 되찾았다. 나이키 운동화를 사서 러닝을 시작했다. 평생 하지도 않던 운동을 하는 동시에 글쓰기와 독서를 시작했다. 며칠 전 한껏 목소리가 굵어진 그가 내게 얘기했다. '그저 열심히 몸만 움직였을 뿐인데 삶이 쾌적해졌어요.' 그는 아침에 헬스장에 가는 것만으로 인생의 다른 수를 도모할 힘을 얻어낸 셈이다. 


 내가 살면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화산 폭발이나 쓰나미가 아니다. 실로 두려운 것은 그냥 하루가 사라지는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시간이 흐르고, 이룬 것 하나 없는데 날이 밝고, 별 이유도 없이 날씨가 화창한 게 두렵다. 제대로 살지 못한 기분에 시달리면 불쾌한 기분에 젖어 꿈자리도 뒤숭숭하다. 더군다나 뉴스에서는 죄 없는 사람을 괴롭히는 악인이 가득하고, 우울한 나머지 사람이 너무 많다. 이룬 건 없는데 어떻게 이 세상에 마음을 붙일 수 있을까. 사람들은 다들 잘 나가고 해외여행도 밥 먹듯이 가고 출세하는데 난 뭘 하는 걸까. 운동은 당신이 비틀거릴 때 빛을 발한다. 헬스장은 다녀오기만 하면 성공이다. 내가 운동을 하는 이유는 세상 아름다운 것이 지나가기 전에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몸을 만들면 의미 없던 세상이 작게나마 어여삐 뵌다. 내 피 같은 전세보증금을 걸고 얘기할 수 있다. 일단 움직여보자. 아침 햇살을 받고 프로틴 음료를 마시면서 스쿼트를 해보자. 이 밤이 와도 이 밤이 가도 I'm always aw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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