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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Sep 27. 2023

스타벅스가 낳은 작가

 스타벅스 오전 11시, 창가 자리. 맥북으로 글을 쓰는데 옆자리에 두 소년이 초콜릿 밀크셰이크를 하나씩 올려놨다. 스타벅스에는 밀크셰이크가 없지만, 생크림과 초콜릿 시럽이 잔뜩 들어 있는 그 음료를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보나 마나 이탈리아에는 없는 이탈리아식 작명을 붙인 무슨 치노 무슨 카노 같은 음료겠지. 두 사람 머리보다도 큰 음료잔은 딱 봐도 순대국밥 가격은 훌쩍 넘어 보였다. 수입이 줄어들면서 긴축 재정을 펴는 나로서는 저런 여유가 부러웠다. 과거에는 살찔까봐 줘도 안 먹었는데, 이제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니 달달한 맛이 확 땡겼다. 둘은 동시에 가방에서 문제집을 꺼내고 그 옆에 트로피처럼 음료잔을 올려놨다. 스타벅스에서 숙제하면 더 잘된다는 걸 벌써 눈치챘다니 제법인걸.


 얼마 못 가 두 사람은 문제집을 덮고 요즘 사는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난 모니터를 보는 척하면서 두 사람을 관찰했다. 은은한 조명에 밀크셰이크면 뭐든 털어놓을 수 있기 마련이다. 딱 보니 문제집은 대화의 매개에 불과했다. 흰 후드티를 입은 아이가 빨대로 입만 쭉 빼고 쪽쪽 마시고 입맛을 다시면서 얘기했다.

'너 걔 봤어? 아까 옷 입은 거. 완전 다 벗고 다니던데. 걔 완전 관종이야.'

 검은색 나이키 모자를 쓴 친구가 샤프를 꼭 쥐고 대답했다.

'그래 난 못 봤는데. 옷이 왜? 좀 튀었어?'

'몰라 입다 말았던데. 선생님이 그런 건 뭐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제 타투도 다 허용하는데, 옷 가지고 누가 뭐라고 하겠어. 근데 평소에 봐도 걔는 좀 너무 나대더라.'


 난 초등학교도 일진 뭐시기 같은 게 있나. 두 사람 얼굴과 차림새를 살폈지만 그럴 리는 없어 보였다. 밀크셰이크를 먹는 초등학생은 없으니까. 가늠이 어려웠지만, 내 눈에는 초등학교 고학년쯤으로 보였다. '나도 저 나이에 저런 얘기를 했던가. 그때 타투하고 헐벗고 다니던 애가 반에 있었나.' 나는 정말 둘의 대화를 엿듣지 않았다. 쓰던 글이 이제 막 궤도에 오른 참이었고, 무엇보다 내가 엿들으면 아이들이 혐오하는 눈빛으로 날 흘겨보며 야 저 아저씨 쳐다본다며 그냥 가자고 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제 얼굴보다 큰 밀크셰이크를 마시며 소곤거리는 두 사람의 목소리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도 없이 잘 들렸다. 문제 하나 풀고 쪽쪽. 문제 또 하나 풀고 속닥속닥. 어른들과 차별화된 고주파 대역을 쓰는 바람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ASMR처럼 내 청각을 간지럽혔다.


 내가 하도 뚫어지게 치노인지 카노인지 하는 음료를 바라보니, 흰색 후드티를 입은 아이가 나를 쳐다봤다. 눈빛에서 내쏘는 공격성을 느꼈다. 난 바로 눈을 깔았다. 궁예 앞에서 기침소리를 낸 기분이었다. 그림의 떡은 계속 보면 그만인데, 스타벅스의 밀크셰이크는 쳐다보면 보면 실례다. 난 다시 반대쪽 다리를 꼬고 쓰던 글에 집중했다. '여기서 웃기는 에피소드 하나 넣으면 딱인데.' 점심을 굶고 쓴 커피만 마셨더니 몸에 당이 확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도 저거 하나 시켜 먹을까.' 사이렌 오더를 만지작 거리는데, 두 사람이 하는 얘기가 귀에 담겼다. 난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고스란히 되살려내는 그들의 대화를 본능적으로 글로 옮겼다. 장난과 심각함을 오가고 웃음과 정색이 공존하는 작용과 반작용의 순간들이 글로 박제됐다.


 난 노트북에서 눈을 떼고 등을 의자에 기대고 마지막 남은 커피 한 모금을 비웠다. 난 퇴직을 하고도 동네 스타벅스에서 글을 쓰고 있다. 십 년 간 스타벅스에서 글을 쓰던 버릇을 떨치지 못했다. 직장을 다닐 때는 적금이라도 붓는 것처럼 투자했다. 스타벅스를 작업실 삼아 한 달에 30만 원씩은 썼다. 스타벅스를 매일 가니 전 지점에서 내게 아는 체를 했다. 근데 요즘에는 수입이 줄어들어서 커피 한 잔만 주문해서 버틴다. 왜 난 이런 빈곤한 처지에도 스타벅스를 끊지 못할까. 난 언젠가 독자에게서 이런 평을 들었다. '이 작가는 스타벅스랑 커피 없으면 글 못 쓰는 것 같다.' 정확한 평가였다. 내 글의 4요소는 남자, 여자, 커피, 스타벅스였다. 난 스타벅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대화하는 남자와 여자를 적었다. 귀로 듣기보다는 눈으로 관찰하고 상상력을 보태서 적었다. 저마다 사연을 지닌 제각기의 사연이 스타벅스 창가 자리에서 쏟아졌다. 왜냐? 스타벅스에는 도시 사람의 허위의식, 통념, 상투성과 같은 것이 있으니까.


 스타벅스에는 항상 백색소음이 들려온다. 도시의 굉음, 카페용 음악소리, 대화의 떠들썩함, 덜컹이는 그릇 소리가 실내를 진공 상태로 만든다. 사람들은 이 소음 속에서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난 그걸 어디엔가 떠들썩한 무관심이라고 적었다. 사람들은 커피를 앞에 놓고 대화를 시작한다. 커피와 이성은 사람이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세팅이다. 여기에 화룡점정으로 카페인이 몸에 퍼지면 말문이 트인다. 시원한 '아아'가 속을 뚫어내면 사람들은 서슴없이 자신의 통념을 쏟아낸다. 거기에는 감정이 있고 의도와 계략도 있다. 호소가 있고 떠보는 식의 옅은 거짓말도 함께다. 난 이런 스타벅스의 혼란상을 글로 옮겨 적는다.


 두어 시간만 스타벅스에 있어보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뻐꾸기를 날리는지, 얼마나 많은 자가 알면서도 못 알아듣는 척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애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남을 관찰하면서 노트북을 두드리는지. 난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면서 상대의 눈을 본다. 저들은 흔들리고 다잡고, 떠보고 붙들어 매는 관계의 테트리스가 한창이다. 난 이런 속된 도시 사람들의 정서가 내 글로 옮겨지기를 바란다. 이러니 난 스타벅스에 발목이 묶였다. 난 글이 안 나오면 옆을 관찰하고, 저 멀리 창가 자리에서 떠드는 친구들을 지켜보면서 영감이 떨어지기를 고대한다. 내 글이 사람들의 통념과 허위의식을 짚어내기를 바라면서 된장 냄새나는 글을 쓴다.


 파란 폴로셔츠를 입은 아이는 최근 집요하게 카톡을 하는 아이가 골칫덩이라고 했다. 싫지는 않은지 말에 리듬이 있었다. 멍청하다느니 이상하다느니 불평을 했지만, 얼굴엔 호기심이 다 드러났다. 어찌나 귀여운지 만약 그 애한테 저 표정으로 구박을 했다면 나라도 계속 톡을 해댈 것 같았다. '정 떨어지게 하는 표정은 내가 보여줄 수 있는데.' 혐오를 자아내는 미간 찌푸림을 너는 아직 모르는구나. 인중을 길게 늘어뜨리고 눈을 조금 뒤집으면 주먹을 부르는 얼굴을 만들 수 있는데. 두 친구는 자기 반 아이들 얘기를 끝내고는 각자 집안 사정을 대화테이블에 올렸다. 짜증 나게 구는 부모와 폭력적인 언니 얘기에 한창이었다. 술만 마시면 폭력적으로 구는 아버지와 땅 문제로 시끄러운 친척들 얘기도 빠지지 않았다.


 아이들이 고개를 쑥 빼고 대화에 집중하는 모습은 창밖으로 보이는 봄꽃이 무색할 만큼 귀여웠다. 이 공간을 장악한 두 소년 덕분에 온도와 습도까지 조금씩 올라가 있었다. 색감은 좀 더 파스텔톤으로 부해졌고, 배경 음악은 ‘카페에서 틀기 좋은 음악 100선’처럼 흔해빠진 멜로디 대신 귀에 착 감기는 보사노바풍으로 바뀌어 있었다. 두 어린이는 자신들이 내뿜는 강력한 자장을 모르는 눈치였다. 그걸 알면 얄미운데 모르니까 더 어여삐 보였다. 난 노트북을 펴고 두 사람의 이야기를 마저 쓰기 시작했다.


 두 친구는 어찌나 사이가 좋아 보이는지 단짝으로 보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걱정거리를 제 일처럼 걱정했고, 그들이 평생을 골치 아파할 부모와의 갈등도 진심으로 위해줬다. 나는 본의 아니게 엿들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두 사람은 내가 취약한 공감이라는 덕목을 실천하고, 번번이 미끄러지는 다정함이라는 미덕을 몸소 보여줬다. 그중에서도 내 귀를 사로잡은 건 ‘그 애’ 얘기였다. 자꾸만 눈에 띄는 그 애. 두 친구 모두 신경 쓰지 않는 척 하지만 확실히 눈길이 가는 그 애. '요즘 신경이 쓰이는 그 애 얘기라면 나도 좀 알지.' 오케이 이걸로 써야겠어.


 그들의 알콩달콩함이 내 컴컴한 원고에 빛을 비췄다. 세상에 알콩달콩함이라니. 내가 지난 십 년간 글을 쓸 때 이 부사를 쓴 적이 있던가. 깜찍할 정도로 구식인 관용구가 튀어나와 버렸다. 근데 정말 알콩달콩하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한 길이 없는 모습이었다. 흰 후드티를 입은 친구가 신이 나서 얘기했다.

'내가 진짜 재밌는 거 알려줄까? 들어볼래?

'뭘?'

'걔 장난 아니래. 넌 몰랐지.'


 두 아이는 그렇게 내밀한 정보를 교환하며 서로의 돈독함을 확인하고 있었다.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며 절대 발설하지 않기로 약속하는 것이야말로 우정을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 내 치부와 약점을 다 드러내고, 내가 이만큼 네게 드러냈으니 너도 보여줘야 한다고 강요하는 다분히 종교적인 의식이었다. 서로의 비밀을 어떤 증표처럼 지니고는 다른 친구들을 배척할 때 써먹는 사귐의 방식이라면 나도 잘 알았다. 그런 청교도적인 폐쇄성이야말로 그 시절이 가진 우정의 근간 아닌가. 난 두 사람의 얼굴을 살펴보며 과연 누가 먼저 그 약속을 깰지 추측했다.


 밀크셰이크는 두 사람의 우정을 축하하는 트로피처럼 얼굴 옆에 꼭 붙어 있었다. 벤티 사이즈에 담긴 음료가 쭉쭉 줄어들 때마다 무슨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까르르 소리가 났다. '너희들은 그렇게 맘 놓고 셰이크를 마시면서 어쩜 그렇게 말랐니. 난 그게 제일 부럽다.' 그러다가 한 친구의 밀크셰이크가 공책으로 엎어졌고, 당황하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둘 다 어쩔 줄을 몰라해서 내가 가서 치워주고 싶은 마음을 어렵게 억눌렀다. 뒤늦게 휴지를 더 가지러 간 친구는 쏟은 친구가 미안해하지 않도록 괜찮다는 말을 연발했다. 서로 상대를 먼저 닦아주고, 어디 묻은 데는 없냐며 매무새를 살펴줬다. 그곳에 바로 평화가 있었다. 두 사람을 가자지구로 보내면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도 단 삼일이면 끝날 일처럼 보였다. 두 소년의 케미스트리는 내가 절대 쓰지 않는 또 다른 단어 중 하나인 순수와 우정의 결정체였다.


 새로운 친구를 사귄 지 꽤 오래된 느낌이다. 퇴직한 후로는 친구와의 만남을 싹 끊었다. 그럴 돈도 여유도 없었다. 부모님을 뵌 지도 오래다. 비단 기존 친구들이 다 결혼하고, 주말이면 마트에 아이들을 데려가야 한다는 사명감에 날 잊어서 섭섭한 게 아니다. 내 처지가 새로운 사람과 긴 시간 소통하고 무람없이 굴 수 있을 만큼 편해지는 과정과 멀어진 것뿐이다. 성적 긴장감 없이 한 사람과 관계를 지속해 본 지가 꽤 됐다. 무엇보다 어떤 인간적인 호감을 드러내는 게 쉽지 않다. 내가 드러낸 호의가 떠안게 될 책임이 부담스러워졌다.


 어릴 적엔 누군가에게 너무 많이 말하고, 너무 많이 설명하고, 지나치게 개입하고, 지나치게 흥분하는 방식을 통해 친해지는 게 내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친구로 가는 통로를 잘 찾지 못한다.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을 하는 식이다.  요즘 내가 터득한 방식은 관계의 긴장감에서 벗어나 혼자 살아가는 요령이다. 마음을 동요케 만드는 복잡한 관곌랑 일찍이 멀어졌다. 어째서 타인에 대한 이해는 아무리 잘해도 늘 약간은 빗나갈 수밖에 없는지 더는 고민하지 않는다. 고요함을 내가 이룬 최대의 성취로 여긴다. 고요함을 목돈 저축처럼 쌓아놓고 산다. 고독한 마음을 이리저리 가져다 쓰면서 이야깃거리를 찾아낸다. 이미 나보다 앞서 고독과 씨름하다 종국엔 혼자 놀기의 달인이 된 작가들을 형님으로 모신다. 그들이 쓴 책을 지혜랍시고 받든다.


 하루를 정확하게 나눠 쓰는데 도사가 됐다. 출퇴근이 사라지니 무리하는 게 없어졌다. 사고 싶은 걸 못 사고, 하고 싶은 걸 못하지만 하기 싫은 걸 피할 수 있는 권리가 생겼다. 그래서 평온하기만 한 삶을 촘촘히 쪼개 쓴다. 누가 그러던데 놀이가 인류문명 발달의 핵심이라고. 잘 노는 사람이 가장 문명화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난 쓸데없다고 말하는 짓을 쓸데없다고 생각하지 않고 열심히 한다. 돈이 되지 않는 원고를 쓰고 돈이 되지 않는 책을 읽는데 시간을 쏟는다. 이제 당치도 않은 해로운 소망에 탐닉하지 않는다. 특히 아파트, 차, 주식, 회식, 회의와 같은 단어와 멀어진 게 맘에 든다.


 밤이 늦으면 번잡한 외로움이 찾아들지만, 어느 정도 실상을 알기에 더는 톡 창을 열지 않는다. 매일 똑같은 거리를 똑같은 구도로 관찰하며 글을 쓰는 데 익숙해졌다. 스타벅스는 내가 현실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초록빛 네버랜드다. 내 펜대는 사람이 아니라 작은 변화에 주의를 기울인다. 오늘의 날씨나 커피 맛이라든지 계절이 변화처럼 느긋한 나무의 색감 같은 거. 카페 안으로 들어오는 빛의 각도와 사람들의 옷차림까지.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거리의 흐름에서 미묘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활기찬 공원의 아침과 비교적 썰렁한 주말의 공기, 평일만 되면 바짝 긴장감이 높아지는 차도, 단 몇 시간에 불과하지만 달라져 버린 하늘의 색감을 의식할 수 있게 되었다.


 프리랜서 작가가 되면서 미세하게나마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직장을 가지 않으니 사람을 어여삐 보게 됐다. 아마도 거리가 벌어져서 생긴 호사로 느껴진다. 더는 부대낄 일이 없으니까. 이맘때쯤 사무실은 한 해 성과를 정리하고 있을 터였다. 난 내일 마감할 원고와 씨름하며 오늘만 살고 있었다. 창밖에는 계절의 변화가 한눈에 다 보였다. 노르스름한 빛이 나무를 감쌌고, 하늘에는 무구한 정적이 흘렀다. 난 매일 같은 시간에 와서 같은 커피를 마시는 이들과 같이 잘 지내고 있다. 직장을 다닐 때는 미처 알아보지 못한 순간을 만끽하고 있다.


'야 나가자.'

'어디 가게?'

'몰라, 그냥 시내로 가자.'


 아이들은 예상보다 금세 얘깃거리가 떨어졌는지 자리를 떴다. 주위 공기가 그들의 부재에 따라 식어버렸다. 두 사람이 앉던 자리를 한 연인이 차지했다. 격앙된 목소리에 다툼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난 관심이 없어서 귀를 닫으려고 했다. 약속을 왜 어기느냐,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거친 말이 오갔다. '아니 왜 싸우고 난리야.' 나는 귀를 닫고 다시 내 글에 빠져들었다. 또 다른 사연이 시작된 참이었다. 내 예상대로 뻔한 갈등. 그렇지만 내 예상과는 미세하게 다른 그런 양상.


 남자는 몸 좋은 폴 오스터처럼 잘생겼고, 입은 옷도 말쑥해 보였다. 마치 소개팅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풀을 잔뜩 먹인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에 반해 여자는 집에서 막 나온 것처럼 복장이 가벼웠다. 흰 엄지발가락에 버켄스탁 닥스 슬리퍼가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나는 한 끗 다른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결함을 성격처럼 내재한 클리셰 범벅의 드라마. 그리스 신화처럼 꽤 숙명적인 구석이 있는 파국. 나는 몸을 웅크리곤 다시 내 일처럼 그 사연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 사이렌 오더로 치노인지 카노인지 하는 음료를 주문했다. 생크림을 가득 올렸다. 내 시선 안에서 두 아이들과 스타벅스 식구들은 삶의 한순간을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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