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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Oct 04. 2023

새내기 전업작가의 지출명세서

 오랜 세월 월급을 받으면서도 지폐를 쥔 기억이 없다. 수많은 청첩장을 쌩까서 그런 것 같다. '야, 5만 원만 대신 내줘'로 퉁치다 보니 사임당 님과도 멀어졌다. 편의점에서 카카오페이를 암행어사의 마패처럼 휘두르며 다녔다. 내 돈은 그냥 계좌에서 오르락내리락할 뿐이었다. 그 숫자가 0이 되지 않는 한 내 삶은 달라질 게 없었다. 난 요즘 흔한 주식이나 펀드도 하지 않고 살았다. 하다못해 실손 보험도 하나 없다. 그냥 계좌 하나를 트고 들어가 보지도 않았다. 뉴스에서 비트코인과 재개발 지역 땅 투기 열풍을 보도할 때도 난 천하태평이었다. '참 열심히들 사는구나.' 경기가 어쩌고 저쩌고, 물가가 어쩌고 저쩌고 말이 많아도 시베리아 벌판 한가운데 우뚝 선 늑대의 그림자처럼 내겐 너무 멀기만 한 얘기였다. 


 난 은행도 거의 가지 않았다. 가끔 은행에 가도 달곰한 맥심 모카골드를 마시면서 우먼센스나 여성동아 따위의 여성지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하지만 창구에만 앉으면 심각한 표정을 짓고 달아날 궁리만 했다. 뭐가 뭔지도 모르는 복잡한 은행서류 사인을 하고 있노라면 이상하게 속고 있다는 피해 의식이 떠나질 않았다. 왠지 모르게 루저가 된 기분이랄까. 내 관심사는 그보다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섹스, 이성을 오르가슴에 다다르게 하는 비법 같은 자극적인 기사에 가 있었다. 그러니까 내 삶은 여성지에 끼워진 속옷 광고 따위에 가까운 삶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책을 많이 읽으면서도 경제서는 읽은 적이 없다. <경제학 콘서트>나 <돈의 인문학>처럼 돈의 문화사를 교양으로 익혔지만, 정작 워렌 버핏 같은 부호가 돈 버는 법에 대해 얘기할 때면 귀를 닫았다. 그런 걸 배울 시간에 재밌는 영화나 하나 더 보는 게 이득이라고 여겼다. 


 나는 여전히 은행처럼 매끈한 빌딩에 들어서면 기가 죽는다. 대도시 태생인데 마인드는 소작농이다. 거대한 돈이 오가는 곳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낀다. 쥐꼬리 만한 월급이지만 나는 쥐꼬리를 우려내서 그럭저럭 잘 살아왔으니까. 세상에 재밌는 게 얼마나 많은데 굳이 돈까지 알고 싶지는 않았다. 좋은 아들이자 어느 조직의 일원으로서 어디 가서 폐 안 끼치고 살 정도면 그만이었다. 난 내 1인분만 지탱할 수 있다면 큰돈을 벌겠다는 야망 자체가 없다. 어느 카페에 가서든 커피 한 잔 정도는 가격 신경 쓰지 않고 시킬 수 있으면 족하다. 회전초밥집에서는 접시 색깔을 따지지만 불만은 없다. 연어랑 광어를 원 없이 먹을 순 없지만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부당하다는 것 정도는 글로 쓸 수 있는 내가 좋다. 


 직장을 다닐 때 마지막 월급은 600만 원이었다. 15년의 직장생활은 초봉 150을 세 배 넘게 올려놨다. 난 퇴직을 하고 나서야 내 정확한 월급을 알았다. 내가 그간 모아둔 돈도 마찬가지였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난 그간 큰돈 쓴 일이 없고, 큰돈 벌 일도 없었다. 꽤 무탈하게 살아왔다. 월급이 나오는 한 나 혼자 살기에는 충분했다. 어디 손 안 벌리고 당당하게 살았다. 하지만 이제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고는 생활이 되지 않는다. 퇴직 두 달째, 수익명세서가 나왔다. 난 은행 앱을 켜고 엑셀에 소득과 지출을 옮겨 적었다. 15년간 월급을 받으면서 몇 번 보지도 않던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계산했다. 오르락내리락. 내리락. 내리락. 뭐야. 내리락. 초조했다. 퇴직 후에 내 계좌에는 백만 원 넘는 입금 내역이 사라졌다. 무수한 붉은 글자에서 입금을 나타내는 파란 글자는 드물었다. 인생의 장이 하안가로 돌아섰다.


 은행 앱으로 내 계좌를 연표로 늘어놨다. 자산의 역사는 가히 평탄했다. 꾸준한 오름새. 그 흔한 대출 하나도 없는 깨끗한 상승이었다. 그렇다고 호들갑 떨만한 지나친 상승곡선으로 흥분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2023년에 접어들자 대공황이 왔다. 수입은 없고 지출만 있는 자금경색이 온 것이다. 각오한 침체였지만 당황했다. 내겐 부채의 내성이 없었다. 이것은 분명히 그간 돈을 멀리해서 생긴 부작용이다. 돈을 벌면서도 돈과 멀리 살 수 있었던 건 축복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제 돈을 벌지 않으니 돈과 가까워졌다. 행복을 말하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을 굳이 입에 올리지 않는다. 건강을 얘기할 때는 건강하지 않을 때뿐이다. 돈도 마찬가지다. 난 이제 돈을 쓸 때마다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의식한다. 돈을 벌 때마다 숫자가 얼마나 커졌는지 계산한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퇴직할 당시 내 목표는 그간 모아둔 돈을 털어먹지 않는 삶이었다. 적어도 1년간은 뒷걸음만 치지 않는다는 각오였다. 더 벌 생각은 없었다. 어느 심리학책을 읽어보니 사람은 자신이 모아둔 돈이 얼마든 그게 서서히 줄어드는 꼴은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수백 억 모은 자산가가 투자를 하다 빚더미에 오르고, 천문학적인 돈을 번 NBA 선수들이 은퇴를 하면 상당수가 파산하는 거란다. 큰돈을 만지는 자들도 그러한데 고작 쥐톨만 한 돈을 모으고 퇴직한 난 오죽하겠는가. 난 간신히 뒷걸음질을 면한 내 계좌를 훑으니 앞날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계좌 상세내역을 유심히 살펴봤다. 월급을 받던 때 펑펑 써대던 고깃값이 사라진 게 눈에 띄었다. 냉동 닭가슴살로 단백질을 채운 탓이었다. 입에서 늘 닭 비린내가 났지만 확실히 살은 빠졌다. 빈곤 다이어트의 결과였다. 아닌가, 퇴직 다이어트라고 해야 하나. 스타벅스에 지출한 돈도 확 줄어들었다. 케이크와 샌드위치 결재가 없어진 탓이다. 이토록 먹는 데 큰돈을 써왔다는 게 한심했다. 대신 이마트 결재 가격은 늘어났다. 두 달간 웬만하면 집에서 해 먹었다. 최저가 달걀과 냉동 닭가슴살, 비비고 김치와 햇반으로 연명했다. 지겨웠지만 출퇴근 없는 자유를 얻은 대가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활동 반경이 줄면서 주유비가 줄어드니 이마트에 쓴 돈과 퉁칠 수 있었다. 한 달에 몇 번씩 있던 술자리가 사라지면서 관계에 쏟는 비용도 싹 사라졌다. 퇴직을 하면 인간관계가 단출해진다더니 진짜였다. 난 관계의 기름끼를 뺐다는 말로 위안 삼았다. 


 동네에서 가장 싼 헬스장을 택해서 1년 회원권을 끊었다. 50만 원이라는 거액이 빠져나갔다. 평소 회사 헬스장에서 거의 공짜로 운동을 하던 걸 생각해 보면 뼈아픈 지출이었다. 하지만 필수적인 지출이었고, 거의 매일 헬스장에 가서 샤워도 하고 에어컨도 쐴 걸 생각해 보면 합리적인 투자였다. 출판사에서 <운동의 참맛> 선인세로 받은 돈을 헐어서 헬스장에 보냈다. 운동을 하고 쓴 글을 운동에 투자했으니 가히 선순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올렸다. 다음카카오 회사가 있는 남쪽 제주도를 향해 공손하게. 내 글을 대상으로 준 알에치코리아도 한 번 더 공손하게. 꾸벅. 


 도무지 줄지 않는 지출도 있다. 예스24 골드 등급을 몇 달째 유지할 정도로 책을 엄청나게 사들이고 있다. 시간이 많아진 덕에 독서량이 팍 늘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을 이용하려고 노력했지만 도무지 적응되질 않았다. 책에 메모와 낙서를 하며 독서하는 내 버릇 때문이었다. 그래서 주말이면 알라딘 중고서점까지 걸어가서는 헌 책을 사 온다. 책은 나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장신구이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 내겐 책이 필수 세간이다. 냉장고 세탁기와 다를 게 없다. 집이 좁아져서 웬만한 건 다 당근 마켓에 팔아 젖혔지만, 책은 높이 쌓아놓고는 난 작가니까, 하고 위안 삼고 있다. 책은 그렇게 내 삶을 가장 나답게 꾸미는 인테리어가 되었다. 


 최근에 온라인 독서모임을 자주 해서 화면으로 사람들을 마주할 때도 책은 배경화면으로 그만이었다. 뒤에 책을 잔뜩 쌓아놓고 화상회의를 하면 내가 마치 시대의 지성으로 불리는 움베르토 에코라도 된 것처럼 넉넉한 기분이다. 그 자그마한 사각 틀 안에 무엇을 둘 것인지가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대변해 주는 것이다. 집은 좁아졌지만 화면 속 나는 책에 둘러싸인 지식인이다. 계좌에는 대공황이 왔지만 문화자본은 충만하다. 카톡 프로필과 인스타그램에도 최근에 산 책을 올려놨다. 난 사각 프레임 안에서도 지식인을 연기하면서 없이 사는 삶에 장신구를 달았다. 이것만큼은 포기하지 못하겠다. 단기 알바를 해서라도 책 값은 벌고 살 생각이다. 


 최근 뉴스를 보니 결혼과 출산을 바라보는 청년들 대다수의 시각이 '굳이 할 필요는 없다.'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한다. 집값 상승과 근로소득으로는 4인 가족을 이루기 어렵다는 판단이 일정 부분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청년들은 이런 세태를 문제시하지도 않는다는 앵커의 논평이 인상적이었다. 그 말은 궁지에 몰려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선택으로 삶의 궤도를 수정한 것이라는 의미였다. 마치 멀쩡한 회사를 박차고 나와 돈 걱정을 하고 있는 나를 위로하는 말처럼 들렸다. 시간당 최저임금 9,620원을 월 노동시간으로 환산하면 대략 200만 원 정도다. 난 한 달에 딱 그 정도만 벌 생각이다. 그리고 내게 어울리는 지출을 할 것이다. 점점 더 불필요한 건 줄여가겠지만, 문화자본에 쏟는 돈을 깎아낼 생각은 없다.


 한 사람의 소비 패턴을 살펴보면 그가 어떤 삶을 사는지 알 수 있다. 돈을 모아서 명품을 사는지, 적금을 드는지, 모조리 여행에 쏟는지, 술값에 탕진하는지에 따라 판단을 달리할 수 있다. 효율과 생산성을 위해 일하는 사람인지, 절정과 쾌감에 쏟는 걸 우선하는지도 갈린다. 미국 예술가 바바라 크루거는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라는 문자 작품으로 대번에 유명 작가가 됐다.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의 명제를 비튼 이 문구는 쇼핑백처럼 보이는 빨간색 테두리에 붙여져 소비사회의 시각적 이미지를 표상했다. 내 계좌는 점점 초라해지지만, 내 소비패턴은 문화생활에 치중하면 좋겠다. 언제까지나 YES24, 알라딘, CGV, 교보문고, 아트하우스 모모에 내 돈이 빠져나가길 바란다. 확실히 스타벅스는 좀 줄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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