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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y 21. 2019

문학과 함께 걷기 예찬!

소재 <문학>

 퇴근하고 갈피를 못 잡다 망원역에 내렸다. 보기 드물게 공기가 상쾌해 내키는 대로 걸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옷 속에 돌덩이를 넣고 우즈 강에 스며들 때도 이렇게 맑았다고 한다. 어쩌면 날씨는 그 자체로 문학일지도 모른다. 한 사람을 뒤바꿀 수 있는, 그날의 기분을 달리하니까. 다행인지 아닌지 오늘은 무구한 하늘이다. 한참을 걸어도 힘들지 않을 만큼 청량하다. 괜스레 들떠 뭐라도 눈에 들어올까 두리번거렸다. 골목이 실종된 서울에서 이 부근은 신기할 정도로 길이 곱이 곱이 나 있다. 나는 집 구경 사람 구경 고양이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가 바람에 휘날려온 전단에 눈길이 갔다. 녀석은 머리 위까지 날아오르더니 내 앞에 툭 떨어졌다. 어쩐지 의미심장해진 난 종이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오픈! 초대박 세일! 헬스 등록하면 요가 필라테스 복싱까지 무료!" 난 삶 속에서 뭔가를 찾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이런저런 곳에 의미를 부여하곤 잘도 떠든다. 한낱 전단에 적힌 글자마저도 달리 보여 번거롭다. 그렇게 쉼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연희동에 다다랐다. 연희동엔 의미가 없지만, 결국 연희동에 이르렀다. '이제 어디든 들어가 앉아야겠어. 손도 아프고 다리도 쑤시고 배도 고파. 어디로 갈까.' 골목마다 카페가 그득하니 갈피를 못 잡고 헤맸다. 난 다수의 선택지 앞에서 피로를 느낀다. 어디 커피 맛이 좋을지, 어디 주인이 친절할지, 어디 의자가 안락할지, 어디 화장실이 깨끗할지 알 수 없으니까. 난 가방을 고쳐 매고 발길을 돌려 늘 가던 스타벅스에 눌러앉았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눈 오는 날씨로 시작한다. 새하얀 눈이 내리고 두 사람이 있다. 추운 날씨에 꼭 붙어서 서로를 위하는 연인. 여자는 지독하게 못생겼고 남자는 지나치리만큼 평범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한다. 문제가 되는 건 하나다. 바깥 타자들,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가득한 요즘 것들은 두 사람을 무시한다. 무관심을 가장한 괄시가 시선에 녹아든다. 남자는 내세울 게 없어서 누구도 읽지 않는 소설을 쓰고, 여자는 못생겨서 변변찮은 곳에서 일한다. 서로만 좋으면 다인 줄 알았는데 바깥에 선 이들로 인해 모진 시간을 겪는다.


 오래전 사진 속 내 모습이 촌스럽듯, 파반느도 다시 읽으니 어딘지 모르게 낡아 보인다. ‘09년 가을, 마음이 가지 않는 일을 하던 난 동네 도서관에 처박혀 무수한 책을 읽었다. 파반느는 신간 코너에 있었고 난 끼니도 거르고 이 책을 읽었다. 그때 어떤 생각을 했던가. 아마도 온전히 날 바라봐줄 연인을 바랐다. 극심하게 혼자였기에 볼품없어도 날 위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비루하지만 그래도 일 인분은 너끈한 내 취향을 보듬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세상은 돼먹지 못해도 겨를이 있을 거라고, 인연은 어긋나도 어디든 고이기 마련이라 믿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빈 커피잔을 앞에 두고 다시 이 책을 덮으니 문득 흘러간 시간이 도리 없어 보였다. 그간 나도 많이 달라졌고 이 소설도 더는 애틋하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시큰둥해져선 소설이 가진 순수한 낭만이 삐뚜름해 보였다. 세상은 한 치도 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모진 말을 소설 속 커플을 향해 중얼거렸다. 변해버린 내가 이 꼴이듯, 네가 그렇게 못생긴 여자를 사랑했다는 말도 믿지 못하겠다고. 그건 정말 소설에나 나오는 거짓말이라며. 한없이 훼손되고 닳아빠진 두 사람의 사랑을 비웃었다. 나도 한낱 치들과 같이 현실을 핑계 삼아 애타게 사랑하는 연인에게 냉소를 머금고 말았다.


 여러 해 전에 <미녀는 괴로워>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당시 명절에 대히트를 친 이 영화는 버젓이 뚱뚱한 여성을 수술해 미녀로 탈바꿈시켰다. 잘 빠진 몸매로 단숨에 스타가 되는 뻔한 영화였다. 코믹의 주된 요소는 외모 비하에 있었고 늘 그렇듯 미녀 노릇은 짜릿해 보였다. 영화가 극장에 걸린 지 십 년이 훌쩍 넘었고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그 멋있던 오우삼의 비둘기 신이 이제 유치한 밈으로 돌아다니는 시대가 왔다. 예쁘면 모든 게 형통하다는 호언이 기정사실이 된 지 오래다. 이런 세태를 보면 이제 위선보다 못한 위악이 판을 치고 있음을 느낀다. 숨죽이고 눈을 흘기던 이들이 이젠 대놓고 누군가의 외모를 희화화한다. 이 도시에서 박민규 작가가 적었던 파반느의 사랑은 자취를 감췄다. 부끄럽기도 하고 부러워지는 걸 막을 도리도 없어서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솟는다. 소설은 해석이 분분하지만, 결론은 비교적 명확하다. 한국을 떠나서야 행복할 수 있다는 장담이다. 야만적인 이 도시에서 버텨봤자 빌어먹을 미인대회를 멈추지 못하리라는 낙담이 베어진다.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재회한 소설 속 결말부에는 두 사람이 개인주의가 확고한 독일에 산다는 맺음이다. 작가가 아쉬운지 하나 더 붙인 또 다른 결말에서는 일본으로 떠난다. 여기만 아니라면 그런대로 살만한 걸까. 난 도피는 꿈도 못 꾸는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는데, 출근보다 싫은 건 없는 삶을 사는데, 소설은 소설일 뿐인가. '탈출하지 못하면 이 모양 이 꼴로 산다는 거야 모야.' 난 이 소설이 버겁고 두려워졌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는 어떤 격려도 받지 못한다는 말이 무책임하게 들렸다.


 배가 고파서 근처 기사식당으로 향했다. 당연한 듯 생선 백반이 주문으로 들어갔다. 혼자 밥을 먹기 편한 식당이다. 다들 지쳐 보이고 밥을 뜨기 바빠 주위를 볼 여력이 없어 보였다. 칠천 원에 고등어와 장조림이 나왔다.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뉴스를 보며 식사를 했다. 뉴스에서는 고위층 인사의 비리와 향응에 대한 내용이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선은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그릇을 치우는 아주머니의 손놀림이 어찌나 재빠른지 손님이 나간 지 10초 만에 새 테이블이 생겼다. 기자들을 피해 급히 들어가는 유력 인사의 발걸음은 그보다 날랬다. 박민규 소설가는 이 야만의 도시에서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으로, 모든 걸 ‘시시하게’ 만들면 된다고 알려준다. 시시하게. 그깟 얼굴, 그깟 돈, 그깟 강남, 그깟 외제 차. 다 시시하긴 하다. 근데 정말 그게 가능할까. 말처럼 쉽게 떵떵거리는 치들을 무시할 수 있을까.


 난 사실 파반느를 두 남녀의 멜로드라마가 아닌 제삼자 요한의 소설로 읽었다.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는 두 사람을 잇는 메신저이자, 독자와 유사 선상에서 작가처럼 사변적 사고를 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선 맺어지기 힘든 연인을 소설상 구원으로 이끈다는 설정 자체가 작가적 시점이다. 그는 펜을 든 위치에서 소설의 구조를 도식화했다. 다소 비약이 있지만 듣는 재미가 있었다. 가령 "누구나 사랑을 원하면서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까닭은 서로 불 꺼진 모습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은 어떤가. 현실세계의 사랑은 상상력에 기인하고, 연애의 시작은 이해가 아닌 오해에 불과하다. 나를 알아본 사람을 나조차 믿지 못한 체 만나고,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착각한 상대를 사랑한다. 그러다 현실의 절단면을 마주하면 때늦은 실망을 느낀다. 그의 모든 걸 이해한다는 오해, 그녀가 더없이 아름답다는 오해, 그는 변하지 않을 거란 오해, 그에게 내가 필요할 거란 오해, 그가 지금 외로울 거란 오해, 그런 그녀를 영원히 사랑할 거라며 오해한다.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커다란 오해로 사랑에 수렴한다. 연애할 땐 그 이미지를 지켜내느라 진이 빠지고, 헤어지면 텅 빈 집에 남아 어긋난 기대를 비웃는다. 플라톤은 인간이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건 사실 착각에 불과하다고 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실체가 아니라 ‘이데아’를 본다. 절대적 이상화에 빠져 한참은 부족한 그의 얼굴에 모나리자를 그린다. 이데아는 매일 반복되는 생활에서 점차 벗겨진다. 누추한 삶이 반복되면 환영은 사라지고, 오직 상상력만 유효한 시간이 온다. 그때부턴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달리 보일 것이다.


 난 어릴 적부터 마이클 잭슨을 좋아했다. ‘스릴러’부터 ‘유 아 낫 얼론’을 들으며 자랐다. '09년은 유달리 여름이 일찍 찾아와 6월부터 더위가 시작됐다. LA에서 공연을 준비하던 잭슨도 나처럼 더웠는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주치의에게 잠을 이룰 수 있게 해 달라 요청했고, 의사는 강력한 수면마취제 '프로포폴'을 치사량으로 투여해 잭슨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당시 난 그가 의문사로 죽었다는 보도를 접하고 망연했다. 서태지가 결혼을 했었다는 사실보다 더 큰 충격적이었다. 그건 어쩌면 내 젊음의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사실 난 그의 애처로운 마음을 모르진 않았다. 그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신호는 명백했으니까. 잭슨은 어릴 적과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백반증에 시달리며 피부가 하얘졌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탑스타였지만 늘 투병에 시달렸다. 점점 변하는 그를 보며 그가 행복하지만은 않다고 미루어 짐작했다. 그건 아마도 동질감 같은 거였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는 삶 뒤에 내제 한 외로움이 보였다. 무너지는 얼굴은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며 많은 이들이 그를 성형중독으로 몰았다. 그는 네버랜드 안에서 온갖 오해로 무성한 말들에 시달리다가 어느 날 아침 사라졌다. 난 엄청난 규모로 성황리에 펼쳐진 그의 장례식을 텔레비전으로 보며 음습한 삶의 정체를 떠올렸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질병을 안고 작품을 썼다고 한다. 현대인이 앓는 각종 질병을 온몸에 품었다. 사망하기 16년 전부터는 곧 죽는다고 떠벌리고 다녔을 정도였으니까. 늘 불면증과 만성 통증에 시달렸던 그는 잠이 안 오면 열차 시간표를 읽었다. 밤낮을 거꾸로 살며 집필에 몰두했고, 여행보다는 관광지 안내책자를 읽으며 만족했다. 프루스트는 평소 일이 틀어지기 전에는 우리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 행복은 몸에 좋지만, 마음을 키우는 건 슬픔이라며 고통 없는 인생의 허망함을 강조했다. 그는 통증이 뭔가를 깨우친다고 믿었고, 그 생각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포갰다. 그는 마들렌을 먹다가 불현듯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코끝을 간질이는 홍차 향기가 잠든 심연을 떠올리게 했다. “갑자기 모든 기억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맛은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고모가 차에 살짝 담가 내게 건네주던 바로 그 마들렌 맛이었다.” 난 저녁마다 홍차와 마들렌 대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신다. 저녁 11시,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고개를 드니 카페 직원들이 분주하다. 잔여들이 나가주길 바라는 눈치다. 난 153번 버스를 타고 영등포를 지나 내린다. 여전히 바람은 시원하고 커피 때문인지 피로한 기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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