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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11. 2020

퇴근길의 홀가분한 산책

소재 <퇴근>

 금요일이라 그런지 종일 쾌하다. 지난주엔 그렇게 힘에 부치더니 죽으란 법은 없나 보다. 뉴스에선 연일 사망 소식이 들리는데 난 왜 이리도 흐뭇할까. 매일 소설을 읽으며 누군가의 감정에 이입하지만, 현실에서는 감도가 떨어진다. 난 종일 수없이 누군가의 고역을 마주했지만, 그때마다 눈치나 보기 바쁘다. 빨리 나 할 거나 끝내고 물러서고 싶다. 딴청을 피우는 게 제일 속 편하다. 소설은 서사에 몸을 맡기면 일시적인 문제에 그치지만, 현실은 문턱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다. 공감도 근력이라는데 실전에서는 도통 써먹질 못한다. 내가 잘하는 건 역시 내 안위뿐이다. 내 건강, 내 글, 내 독서, 내 산책 오로지 나에 관해서만 골몰한다. 슬픔을 공부하자고 제안하는 어느 평론가의 말이 귀에 거슬린다.


 시계가 여섯시를 가리키고 난 금요일 퇴근길을 만끽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에어팟에서 서정적인 곡이 울리니 살 것 같다. 전 지구적 재난도 노이즈 캔슬링에 걸러진다. 자괴는 설핏 스치는 데 불과하고 분홍빛 거리가 뺀질거린다. “우리는 정말 한 계절밖에 없는 걸까요? 여름 한 철? 그리고 이제 지난 건가요?"(가벼운 나날 중) 난 봄이 올 때마다 이 문장이 생각난다. 회의하다 말고 몰스킨 귀퉁이에 적기도 했다. <가벼운 나날>은 ‘제임스 설터’가 자주 적는 중산층의 삶, 거기에 담긴 번지르르한 일상에 생긴 미세한 균열을 파고든 작품이다. 특유의 민감하고 세심한 촉으로 누구나 행복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가정 한복판에 뚫린 구멍을 그린다. 평균치를 상회하는 삶이라는 건 누군가에겐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정작 본질은 딴 데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사회 시선을 의식해 유한계급을 연기하는 꼴이 못내 우습다. 세수하고 침대에 몸을 뉠 때야 비로소 찾아오는 엉성한 감각을 모른척해 버린다.  


 도시의 해가 저물 즈음 거리 체증은 숨이 막히게 증가한다. 하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대기가 식어가는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분주한 버스는 휘황한 빛을 머금고, 건물 너머로 서늘한 바람이 넘실거린다. 일과를 마친 혼곤한 얼굴들이 사랑스럽다. 평소 먹지도 않던 생맥주와 통닭이 당기는 밤 풍경이다. 통닭은커녕 요즘은 거리 두기 기간이라 커피집에도 잘 못 간다. 난 스무 살 이후 거의 매일 커피집을 전전하며 살았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혼자 살기 시작한 이래 이렇게 홀로 집에 처박혀 있던 적은 처음이다. 난 퇴근하는 즉시 사람이 북적이는 커피집에 둥지를 틀곤 했다. 맥북을 붙잡고 소용없는 짓을 하며 놀았다. 웹이라는 망망대해를 홀로 소요하다 보면 종일 사무실에서 복닥거렸던 내가 해방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늦은 새벽까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취객 사이에서 기를 쓰고 버티는 거다. 귀를 틀어막으면 칵테일파티 효과처럼 내 의식에만 귀를 기울일 수 있다. 소설을 읽기도 하고, 구글맵으로 여러 도시를 구경하다가 종국엔 쇼핑몰 사이트에 이르러 통장 잔고를 0에 가깝게 수렴한다. 수년을 이래도 질리지 않는 걸 보면 ‘암체어 트레블러’로서 난 괜찮은 미덕을 지닌 셈이다.


 사실 뭔가에 열중하기엔 집이 더 조용해서 좋다. 침대가 뒤에 있으니 졸리면 자빠질 수 있고, 부엌에 라면이 있으니 냄비에 물을 올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집에선 누추한 마음이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종일 어둠을 머금었던 방구석엔 낭만이 깃들지 않는다. 반면 동네 카페는 채광이 좋고 커피 향이 그윽해서 사천 원을 내도 아깝지가 않다. 무엇보다 내 고독을 지켜봐 줄 사람이 있다는 게 매력이다. 난 타인의 시선에 긴장 상태로 뭔가를 적는다. 자세도 꼿꼿하게 유지하고 미간을 구긴 채 일류 작가가 된 기분을 흉내 낸다. 그건 마치 한창 그녀의 눈길을 갈구했던 더벅머리 시절의 나처럼 시선을 쟁취하기 위한 투정에 가깝다. 홀로 되려고 카페에 가고 늘 대열에서 이탈하면서도 누군가의 인정을 바라는 내 꼴이 우습다.


 오늘은 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어렵사리 집으로 향했다. 우리 동네는 조용한 게 매력이다. 상권은 죽어있지만 고요한 골목을 매일 걸을 수 있다는 건 축복에 가깝다. 저녁 밤공기가 봄의 완연함을 알린다. 이 계절을 붙잡고 싶어 고개를 젖히고 숨을 들이켰다. 봄은 매해 영락없이 반복되는데 난 항상 첫 손님처럼 환대한다. 올해도 다르지 않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니 들뜸이 가시질 않는다. 거리를 두라는 문자를 쓱 지우고 동네 한 바퀴를 더 걷다가 들어갔다. 집에서 고립되는 시간이 길어지니 독서량은 확실히 늘었다. 고립을 핑계 삼아 쉼 없이 읽었더니 온갖 곡절을 다 거친 기분이다. 이야기 속 힘들고 노여운 사연을 내 일처럼 공감하며 읽었다. 이렇게 누군가를 상상하는 연습을 하다 보면 곤혹스러운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는 데도 익숙해질지 모른다. 소설은 내게 오락거리에 불과하지만 이런 일말의 기대 없이 독서를 한다고 거짓말은 못 하겠다. 오늘은 문장이 정갈하기로 유명한 ‘제임스 설터’의 산문집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을 읽고 있다. 


 서울은 내게 사적인 은유다. 내가 자라며 불만을 가졌던 자본의 횡포가 적나라하면서도, 언제든 우회로를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는 도시다. 낭만과 효율이 공존하며 늘 격정적이면서도 때론 한없이 잿빛에 가깝다. 거리는 요란한 네온사인과 비틀거리는 사람이 즐비하고, 사납게 치솟은 빌딩엔 층마다 뭔가에 분주한 이들이 그득하다. 난 가끔 걸음을 멈춰 세우고 이 도시를 구성한 그들을 상상한다. 저 사무실 어느 자리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의 인생엔 어떤 사연이 담겨 있을까. 난 내면의 복잡성을 토로하는 굽은 등을 떠올리며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을 읽어나갔다.


 제임스 설터는 공군에서 조종사를 했고, 이후엔 작가로 살았다. 설터는 공군 기지에서 작전에 투입되는 긴박한 삶에 만족했지만, 늘 책을 읽고 글을 쓸 시간이 부족했다. 노트를 무릎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굴려보며 단어를 고르는 삶이 절실했다. 그의 글은 한끝 다르기 위한 다툼의 연속이었고, 이 짓을 평생 해도 질리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막연하게 흘러가는 오후가 온통 문학을 위한 공간이라면 나가서 뭐든 할 수 있지 않을까 미루어 짐작했다. 고민 끝에 전역을 택한 설터는 허투루 쓰지 않았고, 한 철이 지나감을 여러 권에 남겼다.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은 제임스 설터가 살아온 시간이 파편처럼 담겨있다. 꽤 긴 시간 그와 대화를 나눈 기분이 든다. 


 제임스 설터의 작품은 줄곧 마음산책에서 펴내는데, 표지를 전부 화가 ‘던컨 한나’의 그림으로 채웠다. 일상을 스케치한 무심한 투가 인상적인 그림이다. 무표정하고 때로는 생기 없어 보이는 여성이 관람자를 도발적으로 응시한다. 그림 대부분이 야릇한 분위기라 어쩐지 야한 소설처럼 보일까 봐 지하철에서 읽으면 신경이 쓰인다. 사실주의적 에로티시즘 역작이라 불리는 설터의 문체를 상상하는 도구로 던컨 한나의 그림만큼 잘 어울리는 게 없다. 사소한 기미가 보여도 덤덤하게 생이 일그러지는 꼴을 응시하는 설터의 글과 비슷하다.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의 표지는 봄처럼 청량한 풍경이다. 먼 길을 떠나기 전에 잠시 편지를 쓰려고 공원 풀밭에 자리를 잡은 한 여성이 고개를 숙이고 펜을 들고 있다. 우아하고 간결한 문장을 꾹꾹 눌러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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