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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용 Jan 14. 2020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겠지만


한 달 만에 할머니를 찾아뵈었습니다. 할머니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요양원에 계니다. 방문객 명단에 이름을 적고 엘레베이터로 5층에 올랐습니다. 한 요양보호사님이 할머니는 저 방에 잠깐 누워계신다고 일러주셨습니다.


할머니는 나와 동생을 보고 반가운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초등학생 같은 짧은 머리를 하고 따뜻해 보이는 보라색 조끼를 입고 계셨습니다. 오늘따라 혈색이 좋아 보이셨습니다. 93세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얼굴이었습니다. 우리는 먹기 좋게 준비한 과일들을 꺼냈습니다. 할머니는 과일을 정말 좋아하셨습니다. 함께 살 때는 그 사실을 잘 몰랐는데, 그녀는 한사코 모두가 먹고 남은 음식만 드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생신을 축하드린다고 전했습니다. 당신은 '그래, 오늘이 내 생일이야? 고맙다.'라며 웃었습니다. 동생은 '우리 이름 기억나세요?'라고 물었고, 할머니는 한창 고민하시더니 나와 동생의 이름을 반대로 말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시간은 잊어도 우리의 이름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당신은 문득 내 손을 잡았습니다. 손톱에는 빨간 매니큐어가 어설프게 발라져 있었습니다. 내가 손을 마주 잡고서 '할머니, 손이 차셔요.'라고 말하자, 그녀는 '늙으면 그렇지. 늙으면 그래.'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문득 그녀를 생각하며 지은 시를 떠올렸습니다. '들에는 봄볕이 나리는데 / 송악산 봄처녀는 어디로 떠나고 / 그 많던 꽃은 어디로 저물었나'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시였습니다.


나는 이른 나이부터 오랫동안 할머니와 살았습니다. 할머니는 근면했으나 옛날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젊었으나 게을렀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함께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평생토록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겠지만, 손을 맞잡은 순간만큼은 영원이기를 바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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