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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용 Jun 24. 2019

아버지는 손톱을 바투 깎아 주었다


어릴 적엔 손톱 깎는 일을 싫어했습니다. 주말이면 아버지는 '어디 손톱 좀 보자. 아이고 귀신 나오겠네.' 하면서 내 손톱을 깎아주고는 했습니다. 아버지는 늘 손톱을 바투 깎아 주었습니다. 어찌나 바짝 깎아 주시는지 손톱 끝이 속살에 닿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 느낌을 무척이나 싫어했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었을 때 일입니다. 저는 스스로 손톱을 깎을 것을 선언했습니다. 드디어 손톱 끝을 얇게 남길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아버지는 그것이 퍽 섭섭했던 모양입니다. 그 뒤로도 몇 년은 '더 바투 깎아야지. 아빠가 깎아줄까?'하고 훈수를 두곤 하셨습니다.

그 마음을 감히 헤아려 봅니다. 자식은 자꾸만 벗어나려고 애쓰고, 부모는 될 수 있는 한 곁에 두고 싶은 마음 말입니다. 자식이 더 자라게 되면 평생 깎아줄 일이 없겠으니, 내가 해줄 수 있을 때까지는 제대로 해줘야지. 언제나 챙겨줄 수는 없으므로 시간이 될 때 바짝 깎아주어야지. 그런 편부(偏父)의 마음이 자식의 손톱을 더 밭게, 더 바투 자르도록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올해 아버지는 환갑이고 나는 서른입니다. 환갑인 아버지는 서른이 된 아들의 손톱을 여전히 살피십니다. '손톱은 키우고 있는 거냐? 내가 깎아주랴?'라고 묻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생신 축하드립니다.'라고 괜한 딴청을 피웠습니다. 부자간의 사랑이란 언제나 그렇게 어설프고 무던하게 작용하는 모양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 없이 사랑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잘 쓰인 '시'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당신과 나의 관계는 잘 쓰인 시와 같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방식으로 당신과 마음을 전하는 날이 우리의 생각보다 오래이길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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