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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용 Jul 13. 2020

그녀의 슬픔


어떤 단어는 읽기만 해도 마음이 벅찼다. 이를테면 <해로하다> 같은 단어가 그랬다. 평생을 같이 살며 함께 늙는 나와 그녀의 모습이 이 단어에 스며있었다. 그러고 보면 언어는 단단히 고정되어있으나 나의 경험과 상상에 따라 유동적인 의미를 갖게 되므로, 세상의 문제는 오직 나의 해석에 있는 듯하다.


나는 그녀와 다르면서도,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는 한다. 이를테면 그녀는 '만약 내일 세상이 끝난다면 뭘 하고 싶어?'같은 질문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가, 5분 후에는 가장 불행한 사람이었다가, 또 30분 뒤에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녀는 표정이 풍부했다. 감정표현에 서툴고 언제나 무뚝뚝한 나와는 정 반대였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거나 바느질을 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즐거웠다. 미간이 찌푸려졌다가 입꼬리가 올라갔다가 잘하지도 못하는 휘파람을 불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기쁨의 춤을 추곤 했다.


그녀가 우는 날은 여럿 있었지만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사랑에 다양한 면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때마다 우리는 서로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곤 했다. 가끔은 내게 등 돌린 모습을 가만히 지켜봐야 할 때도 있었다. 서투르게 말을 건네면 그녀는 터져버릴지도 몰랐다. 그저 멍하니, 그러나 조심스럽게 무딘 눈치로 파도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나는 그렇게 그녀의 슬픔을 다루었다.


어제도 그녀는 울었다. '당신 시간 속에는 내가 없잖아. 당신이 바쁜 만큼 나도 더 바빠져야만 했어.' 더 이상 외롭고 싶지 않아서, 라는 말이 속삭이듯 들린 건 실제인지 착각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녀만큼 외로움을 모르는 것 일까. 분명한 건 모든 걸 완벽히 해내려고 할수록 정작 소중한 것을 놓쳐버린다는 사실이었다.


울다가 잠든 그녀의 눈을 닦아주었다. 머리칼을 쓸어주고 부은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사람을 위해선 무엇이든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본다. 그것은 분명 사랑이었고, 나는 여전히 그것에 서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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