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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용 Mar 06. 2024

복싱의 즐거움

종이 울리자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등을 두드렸다

오늘은 복싱의 즐거움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써보려고 한다. 지난 삼십여 년간 운동은커녕 집 밖을 나가는 것도 귀찮아하던 내가, 요즘 복싱에 푹 빠져있기 때문이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폭력적인 사람은 아니다. 살면서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다. 몸싸움뿐만 아니라, 말로도 거의 싸워본 적이 없다. 상대를 향한 무자비한 분노, 날카로운 눈빛, 그 사이에 흐르는 무겁고 불편한 공기. 나는 태생적으로 그런 것들이 너무너무 싫었다. 싸우고 나서 다시 화해해야 하는 그 어색한 순간도 싫다. 그래서 싸울 조짐이 보이면 내가 먼저 피해왔다. 덕분에 어떤 상황에서든 감정을 숨기고 자존심을 버리고 한 발짝 물러서는 법을 익혔다.


하지만 복싱은 다르다. 감정을 제거한 채 싸울 수 있다. 정해진 시간 동안, 정해진 규칙 안에서 싸운다. 종이 울리면 오로지 서로를 쓰러뜨리는 일에 집중한다.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예측하며 그 사이로 주먹을 밀어 넣는다. 거칠게 숨을 내쉬고, 어깨가 찢어질 듯한 고통을 참아가며 펀치를 날린다. 하지만 다시 종이 울리고 시합이 끝나면,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를 끌어안고 등을 두드린다. 그리고 '당신과 싸울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이 감동적인 순간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런 이유로, 언젠가부터 나는 모든 격투기 경기를 챙겨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선수들에 대한 존경심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하지만 직접 링 위 올라가고 싶다는 마음은 없었다. 그들은 나와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김연아 선수나 손흥민 선수를 보는 것과 같았다. 그저 그들의 아름다운 피니쉬를 감상하고 감탄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었다.


격투기 팬이 된 지 한 3년쯤 되었을 때였다. 아내가 문득, 집 근처에 복싱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있다며 일러주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시큰둥했다. 그곳은 내가 속한 세계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아내가 먼저 체육관에 등록을 하더니 너무나 즐겁게 다니기 시작했다. 좀처럼 보지 못한 활력이 느껴질 정도였다. 3개월쯤 지났을 때 아내는 내게 다시금 권유했고, 나는 마지못해 '그러면 딱 3개월만 해볼게'라며 받아들였다. 그런 이유로 나는, 어느덧 3년 차 복싱 꿈나무가 되었다.


'알고 보니 나는 복싱에 엄청난 재능이 있었고 아주 짧은 시간만에 복싱의 모든 기술을 완벽하게 흡수해 냈다'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되려 나는 운동신경이 없었다. 모든 동작은 어설프고 둔했다. 분명 머리로는 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답답한 날들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러나 나에게는 버틸만한 이유가 있었다. 복싱 선수들에 대한 존경과 선망.(특히 나는 이노우에 나오야 선수를 좋아한다.) 나도 그렇게 링 위에서 멋지게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 나로 하여금 포기하지 않게 이끌었다. 빠지지 않고 꾸준히 나가 운동을 하다 보니, 뭉툭한 나무 방망이를 조금씩 깎아내는 것처럼 복싱 실력도 점차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복싱 전 프로선수인 트레이너와 스파링(연습 경기)을 하게 되었다. 내 생애 첫 스파링이었다. 나는 복싱에 조금은 자신감이 붙어 있었기에, '혹시, 어쩌면?'이라는 오만한 생각도 잠시 했다. 내가 가진 큰 키와 긴 팔을 최대한 이용하자. 무조건 거리를 벌리고 멀리서 때리자. 그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잘 먹히는 듯했다. 그러나 곧이어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이라는 타이슨의 명언이 실현되었다. 두려웠다. 정말이지, 돌덩이가 날아오는 기분이었다. 한 대 때릴 때마다 두 세대씩 맞았다. 그것도 온몸 구석구석으로 마구마구. 보이지 않는 주먹에 맞으니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왼쪽 복부를 크게 맞았을 땐 눈앞이 깜깜해졌다. 순간 숨이 안 쉬어지더니 다리가 멈추었다. 아, 지금까지 내가 한 건 놀이였구나. 아찔했다.


누군가를 때린다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살면서 얼굴을 몇 대 세게 때려주고 싶은 사람들은 참 많았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괜찮으니까 세게 한번 때려보세요.'라며 얼굴을 들이민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주먹을 날릴 수 있었을까. 아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물리적으로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사회화 과정을 거치며 아주 겹겹이, 단단하게 쌓인 도덕의 절벽인 것이다. 그런데 그 거대한 절벽이 내가 주먹을 맞는 순간 쉽게 무너졌다. 저 사람을 내가 최대한 세게, 그것도 아주 정확하게 때려야겠다는 충동이 번쩍 들었다.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의지가 있다고 해서 모두 가능한 건 아니었다. 나는 저 사람을 때리고 싶은데 저 사람도 나를 때리니까.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두려웠고 무서웠지만, 동시에 초라하게 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 뜨거운 감정들이 폐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아무튼 나는 4라운드까지 버텼다. 아니, 버텼다기보다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 그것이 링에 올라간 자의 숙명이었다. 내게는 흰 수건을 던져줄 사람도 없었으니까. 마지막에는 남은 힘을 쥐어짜서 주먹을 날렸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내가 때리고 있는지 맞고 있는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종이 울리자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등을 두드렸다. 나는 '감사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라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내가 복싱을 사랑했던 이유, 바로 그 순간에 내가 있었다. 이로 인해 나는 계속 복싱을 하게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패배는 피맛이 났다. 아마도 입술이 터진 모양이었다. 오른쪽 턱에도 통증이 있었다. 하지만 왠지 그런 것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되었다.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드레날린, 도파민, 그런 것들이 내 몸 안에서 솟구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소년 만화에서나 나올법한 문장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더 강해지고 싶다.'


복싱이 매력적인 이유는 여러 가지다. 단순한 규칙 속의 복잡한 수싸움, 개성 있는 스타일과 화려한 기술, 링 위에 홀로 서 있는 고독함, 영화 같은 반전, 끝내 서로를 격려하고 미소를 짓는 것. 그중에서도 내가 복싱을 계속하는 이유는 결국 살아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그런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모두 저항할 때 살아있음을 느낀다. 나를 무너뜨리려는 모든 것들로부터 맞서야 할 때 숨겨진 힘이 발휘된다. 그렇게 보면 복싱은 삶에 대한 일종의 모의 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의 등을 두드릴 수 있다. 링 위에 올라선 모두가 각자의 대결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단련하는 동료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복싱의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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