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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트롱 Feb 28. 2019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김원영)을 읽고

불신과 몰이해라는 유령이 떠도는 사회

0.

요즘 우리 사회가 서로에게 많이 냉정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냉정하다기보다 ‘냉혈하다‘가 맞는 표현이겠다. 특히 한 달여 전 화제가 됐던 그랜드캐니언 추락 사건의 경과를 지켜보며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사고 당사자의 여동생이 오빠를 구해달라고 올린 청원에 대한 국민 반응은 냉담하고 잔인했다. 일가족은 신상까지 다 털렸다. 그 대학생을 국가가 도와주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이 온갖 이유를 가져와 일가족을 비난하고 국가의 조력을 반대했다. 물론 이성적인 이유를 들어 반대할 수는 있다. 하지만 여론이 그렇게나 일방적인 양상으로 이어지는 꼴은 오싹하고 무서웠다. 7:3, 못해도 8:2 정도는 적당히 감성적인 인간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인정(人情)이 심각하게 떨어진 이런 사회는 비정상이지 않은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1.

책에서 가장 인상 깊던 사례 중 하나는 “쇼 하지 마!” 사례였다. 그랜드캐니언 사건이 다시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해당 사건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서울 강서지역에 장애아를 위한 특수학교를 설립한다고 하자 주민들이 벌떼같이 들고일어났다. 주민들은 특수학교를 '혐오 시설'로 규정하고, 대신 한방 병원이 설립되길 원했다. 대립이 격해지자 주민토론회가 열렸다. 토론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고성과 욕설이 오갔다. 급기야 장애아 부모는 주민들 앞에 울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주민 일부는 그런 그들을 보고 "쇼 하지 말라!"며 소리를 쳤다.



- 당시 토론회 현장 편집 영상

장애아 부모들이 무릎을 꿇자, 특수학교 설립 반대 주민 대표가 나타나 또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두 사례에서 드러난 우리 사회의 병폐는 본질적으로 같은 종류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내 일은 진지하고 인간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남의 일은 숫자로 치환해 버리려 드는 국민적 습관이다. 내가 겪는 일은 이런저런 사연이 복합적으로 얼기설기 얽혀있다고 여기지만, 남의 일은 그게 어떤 양태이든 어딘가 꿍꿍이와 잇속이 있을 것이라 의심한다. 예컨대 하루아침에 자식을 잃은 세월호 유가족이 보상금을 바라고 농성한다고 믿거나, 이역만리 타국에서 불의의 사고로 빈사 상태에 놓인 아들을 구해달라는 가족의 호소를 돈 많은 집이 ‘제 돈 쓰기 아까워서 ‘ 나라에 손을 빌린다고 비난하는 듯이. 이는 특히 상대가 무언가를 얻으면 내게 손해가 된다고 여기는 경우 더욱 극심해진다.


2.

“쇼 하지 마!”라고 소리친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먼 그들은 장애인 자식을 '평범한 다른 아이들처럼' 공부시키고 싶은 부모의 간절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 자식을 혐오하는 이들 앞에 기꺼이 무릎을 꿇고 읍소하는 부모의 행동을 그저 ‘쇼’로 치부하고 일갈한다. 강서지역에 특별히 못된 인간들만 모였기 때문인 걸까? 그러진 않을 터다. 그들 역시 집에 돌아가면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가족 구성원일 확률이 높다. 당장 위 영상에서 장애아 부모들 앞에 무릎 꿇은 주민 대표만 해도 "나도 자식이 있다"라고, 지극히 정상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틈틈이 불우한 아이들을 위해 소액 기부라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쇼 하지 마!”라는 외침에는 진심이 담겨있는 듯 들린다. 그들은 진심으로 상대가 '쇼'를 한다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왜? '장애아 자식을 공부시키고 싶은 부모의 절실한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상대에게 꿍꿍이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상대가 얻으면 내게는 손해가 된다는 생각이 상식적인 사고 능력을 마비시킨 셈이다.


강서지역 주민들도 최소한 자기와 가까운 사람의 일이었다면 다르게 행동했을 수도 있다.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개인의 도덕성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독감처럼 퍼진 타인에 대한 불신과 몰이해 ‘문화’다. 사회 전체에 만연한 이런 냉혈함이 사회적 약자의 호소에 공감하기 이전, 의심을 앞세우도록 만든다. 심지어 의심을 확신 삼아 단숨에 물리적, 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데까지 이어진다.


3.

의심부터 앞세우고 공감하려는 노력 자체를 하지 않으니 화합이나 배려가 만개할 도리가 없다. 책에 거론된 장애인의 오줌권 문제는 누가 읽으나 충격적인 사례임에 틀림없다. 평범하게 '오줌' 눌 장소를 찾는 일이 그렇게나 힘들고 스트레스받는 일인지, 스스로 장애인이지 않고서야 비장애인 입장에서는 사실 생각하기도 힘든 일이다. 당장 책을 읽은 직후에는 모두가 장애인 전용 화장실 확충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예산이 어떻고, 더 중요한 문제가 어떻고 할 인간이 쌔고 쌨다. 혹자는 어쩌면 장애인이 비장애인에 비해 힘든 삶을 사는 건 당연하다고 까지 주장할지도 모른다. 설마 그럴리야 있겠느냐고? 아니, 이는 합리적 의심이다. 이 책 제목이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인데 우리나라는 실격당한 자들에게 몹시 엄격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저자 김원영 변호사

4.

서로가 신뢰하고 약자에 공감하는 사회는 존재할까? 여기서 잠시 과거 독일에 살았을 시절 이야기를 짧게 하려 한다. 독일 거리에서는 홀로 걸음을 옮기는 시각 장애인을 그렇게 자주 볼 수 있었다. 한 번 산책을 나가면 최소 1~2 명의 시각 장애인을 만날 수 있을 정도였다. 독일이라는 나라에 특별히 시각 장애인이 많은 탓이었을까? 그럴 리는 없다. 눈이 먼 사람들도 안심하고 혼자 거리를 거닐 수 있을 정도로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리라.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는 건 곧 사회 전체에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 대한 이해와 공감대가 잘 형성돼 있다는 소리다. 때문에 시각 장애인도 사회와 사람을 믿고 당당히 거리를 나선다. 너무나 일상적인 풍경이라, 시각 장애인이 혼자 다닌다고 해서 그 어떤 독일인도 고개를 돌려 그들을 훔쳐보지 않는다.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이 하나의 사례가 두 나라 간 큰 차이를 설명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만일 내일 우리나라 정부에서 시각 장애인을 위해 예산을 전격 할애해 전면적인 공공시설 개선 작업에 들어간다고 하면 우리 사회는 뭐라고 응답할까? 긍정적으로 적극 호응해 줄까? 그러진 않을 것 같은데, 단순한 내 기우일까? 그랬으면 좋겠다.



-과거 브런치에 올렸던 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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