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짐들은 핸드폰이 망가지면 무조건 우리집을 찾아왔다. 사람이 찾아오면 어서 들어오라고 짖는 솔이 덕에 초인종은 필요없었다. 아짐들은 솔이가 무서워 대문 밖에서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목청껏 나를 불렀다. "아가씨! 아가씨!"
그러면 솔이는 더 크게 짖었다. 결코 집 안에서 대문 밖에 있는 아짐들과 대화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편한 복장을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대문 밖으로 나서야했다. 아짐들은 "오메 귀청떨어지겠네" 하며 솔이를 향해 손사레치고는 대문에서 멀리 떨어져야 했다.
아짐들의 핸드폰은 자주 망가졌다. 언제 어디에서나 허리춤에 멘 작은 가방에 넣어 들고 다니기 때문이었다. 논일을 하다가도 젖은 손으로 전화를 받았고, 밭에 앉아 흙 묻은 손으로 받고는 잠시 땡겨(던져)놓기도 했다. 그래도 잃어버리지 않고 꼭 가지고 다니는 것이 여간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핸드폰은 산지 일년도 되지않아 세상 낡아버리기 일쑤였다. 아짐들은 자식들이 또 새걸 사줄까봐 걱정하며 나를 찾아왔다. 핸드폰의 이상증세는 간단한 이유인 것들이 많았다. 핸드폰이 켜지지 않는 건 충전 잭을 끼우는 구멍에 흙이나 먼지가 들어가 접촉이 안되는 거였고
글씨가 작아져 안보인다고 하시거나 화면이 어둡다고 나를 부르기도 한다. 간혹 통화버튼이 안눌릴 때도 있었는데 패드에 먼지가 끼어 후후불고 툭툭터니 된 적도 있었다. 간혹 험하게 다뤄 케이블이 끊어지거나 액정이 깨진건 바꾸라 권유하기도 한다.
어느날 아짐이 찾아왔는지 솔이가 마구 짖어댔다. 아짐은 나를 다급하게 찾았다. 전화오는 소리가 안난다는거다. 나는 아짐의 흙묻은 손에 꼭 쥔 핸드폰을 받아들고 그런 손으로 핸드폰 자꾸 만지면 금방 망가진다고 잔소리를 하며 버튼을 조작했다.
역시 어쩌다 무음으로 잘못 조작된 것이었다. 나는 아짐에게 이제 들릴거라며 핸드폰을 건넸다. 어떻게 알았는지 이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아짐은 핸드폰 받아들고 핸드폰이 다 열리기도 전에 말을 시작하며 귀에 가져다댔다. 나는 항상 그 모습이 귀여워서 저건 전국 할머니들의 공통인가 싶었다.
"이~ 됐다. 여.. 거.. 뭐시기.. 해아? 세아? 아아니! 저기 개 끌고 다니는 아가씨! 고것이 해줬다."
아짐들은 내 이름이 어려운지 한 번을 제대로 못불렀다. 그래서 나를 설명할 때 '개 끌고 다니는 아가씨'라고 했다. 그럼 마을 사람들이 다 알아 들었다. 어느날은 마을 아짐들과 정자에 모여앉아 수박을 썰어먹고 있는데 안산아짐이 물었다.
"아야 니 이름이 뭐라고? 만날 들어도 만날 까먹는다"
- 해와요 아짐
"해야? 세아?"
- 아니이 해. 와!
"아~ 세아?"
- 아니이이! 해. 와.라니께
" 그래 세! 아!"
- 아따 기양 '개 끌고 다니는 애'라고 핫씨요
아짐들은 내가 투덜거리자 까르르 웃었다. 그거 만한 이름이 없다고 그러자고 하며 더 깔깔깔 웃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는 사연은 서운할 것도 아니었다. 아짐들은 서로 남한덕(댁), 인천덕(댁), 상금덕(댁)하고 부른다.
아마 시골 마을 아짐들은 대부분 그런 제 2의 이름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짐들은 결혼을 하면 남편 될 사람이 사는 곳(대체로 남편의 고향)으로 '시집'을 오게 되는데 그때 자신의 고향마을 이름을 붙여 서로를 부른다고 했다.
상금아짐은 상금마을에서, 남한아짐은 남한마을에서 온 아짐이고 인천아짐은 큰 마을에 살아서 같은 이름이 있어 인천이씨 성씨로 지었다고 했다. 개중에는 멀리서 시집을 와서 아무거나로 지었다는 월암아짐도 있었다. "그럼 안산아짐은 안산에서 오셨어요?" 내가 말하자 또 까르르. 안산은 산 이름이란다.
이 관습은 지금까지 마을에 남아있었다. 마을에 사는 젊은 아짐들도 모령아짐, 서울아짐 등으로 불렸다. 서로의 이름을 알아도 부르지 않는 세대, 나는 그게 왜 슬프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