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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Jun 24. 2023

사라진 제철이라도

여름 토마토와 오이 샐러드


퇴근길 역에서 내리면 허름한 채소가게가 하나 나온다. 그다지 싱싱한 것도 아니고, 가격이 그리 싼 편도 아니지만 괜히 기웃거리게 되는 방앗간이다. 이 채소가게를 구경하려면 부러 역 하나를 지나쳐 내려야 하고, 15분 남짓한 거리를 되걸어가야 한다. 하루종일 온 정신을 탈탈 쏟아내 겨우 회귀할 에너지만 남은 상태인데도 왜인지 궁금하고, 구경이 하고 싶다. 이건 무의식 아래 허기에 충실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어제는 좌판 위를 훑어보다가 오이를 한 바가지 샀다. 풋내 나는 청량한 맛을 상상하면서. 이제는 사철 나는 재료라 흔하디 흔한 오이지만 여름에는 얘기가 좀 다르다. 맛과 향은 물론 가격까지 저렴해 '제철'이 주는 재미가 크다. 며칠 전 선물 받아 냉장고 한가득인 토마토도 마찬가지다. 평소였다면 '토마토네?'하고 말았을 것을 '오아! 여름 토마토잖아?'하고 유난을 떤 걸 보면 말이다.


오이를 집어 들 때에는 비빔국수를 떠올렸지만 막상 집에 들어와서는 허기를 참을 수 없어 라면으로 때웠다. 메뉴가 바뀌는 일은 종종, 자주,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마음이야 건강하고 정성스럽게 한 끼 한 끼 챙기고 싶지만 가방을 벗어던지고 홀가분한 상태가 되면 만사가 귀찮아진다. 퇴근 후 남은 하루는 짧기만 한데 미처 끝내지 못한 일들에 눈치까지 보여 결국 사들고 온 푸순가리들은 냉장고행이다. 물론 이따금 여력이 좀 나고, 모른 척 호들갑을 떨고 싶은 날도 있다. 그런 날엔 그렇게, 아닌 날엔 또 이렇게 한다. 



결국 한 주가 지나버렸다. 일찍이 사둔 오이, 물러가는 토마토의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토요일 점심은 미루고 미루다 쌓여버린 식재료들을 한데 모아 준비한다. 이번주는 토마토와 오이다. 무얼 해 먹을까 생각하다가 샐러드로 마음을 굳혔다. 씻고 자르고, 한데 뒤섞어버리면 끝나는. 그렇다고 만만히 본다거나 하찮게 여기는 건 절대 아니다. 한데 뒤섞여 엉망이 되는 듯 보여도 저마다 규칙이 있고, 한계가 없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섞이는 재료와 곁들이는 빵과 치즈, 그리고 조리 방법에 따라 전혀 다른 요리가 된다. 푸실리나 펜네를 삶아 넣으면 냉파스타, 곡물을 넣으면 샐러드 보울, 빵에 얹으면 샌드위치나 카나페가 된다.



소스 재료로 마요네즈와 올리브유 중 하나를 먼저 정하면 샐러드의 가닥이 잡힌다. 오늘은 가볍고 쌉싸래한 오이의 맛을 즐기고 싶어서 깔끔한 오일소스로 정했다. 홀그레인머스터드 한 스푼, 발사믹식초 반 스푼, 피시소스와 칠리소스를 섞은 월남쌈 소스 한 스푼, 그리고 올리브유를 두어 번, 그리고 파슬리도 조금 뿌려주었다. 그다음 숟가락으로 훌렁훌렁 가볍게 섞어주면 끝이다. 오이 하나를 건져 맛을 보니 새콤하고 향긋한 풋내가 숨을 타고 들어온다. 성대를 동굴처럼 활짝 열고 바람소리로 '여'하고 들이켰다가 '르음'하고 입을 꽉 다문 채 코로 숨을 내쉬어 본다. 거짓말처럼 여름향이 진하게 돈다. 


고소한 빵 생각이 절실해 일전에 냉동해 둔 핫도그 빵을 갈라 버터와 구워 곁들였다. 치아바타나 바게트가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늘 그렇듯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핫도그 빵이라도 있어 '이게 어딘가!' 하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사라진 제철이라도 저마다의 때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사철 내내 좌판 위 자리를 지키던 오이 대신 지금의 오이가 더 달고 맛있게 느껴지는 걸 보면 아주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가을, 겨울, 봄을 성실히 지낸 후 맺은 열매, 비로소 이치를 체득하여 깨달음을 얻는 시기. 계절의 순환은 꼭 살아가는 생의 장면들과 자연스레 포개진다. 나이를 먹고, 좋은 마음을 먹고, 좋은 것을 골라 끼니는 챙겨 먹는 행위를 통해 우리도 조금씩 여물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다 비운 샐러드 한 그릇 속에 여름 기운이 가득하다. 


글과 사진ㅣ글리(@heyg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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