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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비군 Jun 03. 2020

길의 중간 어림에서

그저 앞가림만 하면서 살아왔다. 고등학교 때는 적당히 친구들과 어울리며 집에서 가까운 학교에 갈 정도만 공부했다. 대학생 때는 적당히 놀다가 군대에 다녀온 후 IMF 한파 속에 취업을 준비했다. 제법 괜찮은 직장에 취업한 후 지금까지 큰 사고 없이 다니고 있다.


딱히 인생에 크나큰 굴곡을 겪어본 적도 없고, 남을 위해 큰 희생을 감수해본 적도 없다. 인생을 좌우할 큰 변곡점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무난히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왔다. 지금은 두 아들, 그리고 아내와 가족을 이루고 큰 부족함 없이 먹고 산다.


지금 큰 아이 정도 나이였을 때, 아마도 국민학교 5~6학년쯤 방학 동안 매일 새벽 우유를 배달하시던 어머님을 도와드린 적이 있다. 그때 처음 어머님에 대한 죄송스러운 마음과 함께 돈을 버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느꼈던 것 같다.


우리 집은 그렇게 풍족한 편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회사를 그만두시고 이런저런 작은 사업을 하셨지만 벌이는 시원치 않았다. 어머니는 부족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오랫동안 우유배달을 하셨고, 그 후에는 아버지가 차린 보습소에서 일을 하시다가 집에서 초등생 대상으로 과외를 하셨다. 세상 물정 모르던 시골처녀가 상경해 중매로 가족을 이루고 각박한 서울 인심을 견디며 수십 년간 아등바등 돈을 벌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셨을지 마흔이 넘은 이제야 조금쯤 어림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머님이 사람들의 날 선 언어와 눈먼 적개심에 상처 입으며 버티어 낸 삶의 결과물은 온전히 나였을 터였다. 하나 있는 자식이 그저 남들 만큼 살기를, 본인의 생에서 겪어야 했던 아픔과 고난을 겪지 않기만을 바랐을 터였다. 그 덕분에 우리 가족 각자의 삶의 총합은 경제적으로, 감정적으로 부족했지만 나의 삶만은 그 안에서 풍족했다.


지금의 나는 나의 노력만으로 이 자리에 서있는 것이 아닌 걸 안다. 비록 내가 지금 선 자리가 좋은 자리는 아닐지라도 이 자리는 부모님의 희생, 잠시 걷는 길이 겹쳤던 사람들의 호의, 가족의 순수한 응원, 이 모두의 합이다. 그럼에도 받은 만큼 이루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하고 민망스럽다.


현재를 만족한다고 해도 살아온 모든 순간이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이 불만스럽다고 앞으로의 시간이 전부 불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삶의 어느  지점에서 잠시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가야  길을 가늠해보는 것은 길을 잃지 않기 위함이다.


다만 필요한 건 고마움을 잊지 않고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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