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이 부른다. 몰래 한숨을 쉬었다. 15분 전 메일로 보낸 자료 얘기겠지.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나. 점심때 구내식당에서 먹은 닭볶음이 속에서 울렁거리는 느낌이다. 마른기침과 물 한 모금으로 속을 달랬다. 큐비클 안에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역시나 지적이 이어진다. 욱하는 감정과 함께 부르르 떨리는 손을 뒤로 감췄다. 볼펜이 휘어지는 게 느껴진다. 대꾸하면 얘기가 길어질까 그냥 잘못했다고 했다. 뭐가 거슬렸는지 '뭘 잘 못했는데?' 시리즈가 이어진다. 이미 콜드게임인데 기어이 9회까지 공격을 한다.
기운이 빠지고 머릿속에선 웽웽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할 말은 못 하고 듣기만 했더니 가슴 어림에 고구마가 낀 듯하다. 한동안 실어증이 올 것 같다. 주변 팀원들이 위로의 눈길을 보낸다. 울컥한다. 자리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아직 일이 남았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다시 잡았다.
남들은 잘 참는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저 싸우는 게 싫다.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하도 밟혀 가마니인지 풀어진 지푸라기 뭉치인지 알아보기 어렵다. 다들 그렇게 산다고 자위한다. 결국 탈출은 돈이다. 월급이 아쉽지 않다면 맘 편히 사직서를 던질 수 있으리라.
회사 탈출의 필요충분조건은 하나다. 부자가 된다. 그날이 오면 팀 업무가 가장 몰린 날 그만둔다고 말하리라. 인사부서에 그간의 수많은 에피소드를 감칠맛 나게 단맛, 짠맛 시즈닝 해서 낱낱이 고하리라. 일단 부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주중에 일을 하고 술자리에 불려 다니는 직장인이 생각할 수 있는 돈 버는 방법은 뻔하다. 그날로 마이너스 계좌를 빡빡 긁어 주식을 샀다. 전형적인 고위험 고수익 테마의 바이오 주식이다.
다음 스토리는 막장드라마 출생의 비밀 플롯만큼 뻔하다. 나는 아직 회사를 다니고 있고, 보스는 바뀌었고, 꾸준히 주식창을 보며 한숨을 쉰다. 좀 오른 날은 재벌 쾌남 모드로, 떨어진 날은 찌질 빈곤 모드로, 조울증 걸린 것 마냥 정체성의 스펙트럼이 과하다. 얼른 팔고 일관된 캐릭터로 돌아오고 싶지만 비어버린 숫자만큼의 공허함이 몸과 마음을 둔하게 한다.
인생은 기승전결이 없다. 스토리는 있지만 기승전 승승이다. 반전도 없고, 도약도 없다. 극소수는 클라이막스를 거쳐 해피 에버 에프터로 가지만 나같이 지극히 평범한 회사원은 전형적인 망 테크 빅데이터의 일부가 된다. 그 친구 있잖아, 그 주식했다 망한... 누구? 그게 한 둘이야?
시간은 흐르고 실패를 곱씹을 틈도 없이 어느새 국면이 바뀌어 나는 글로벌 판데믹 위기 속에 가족들과 싱가포르 어딘가에 갇혀 오매불망 술집이 오픈하기만 기다린다. 일 년쯤 지나서는 한국에서 상사 뒷담화를 하며 주식창을 간절히 바라보겠지. 지금 생각하면 한심한 모습이지만, 그때가 오면 세상 진지할 예정이다.
내 미래는 이렇게 생생한데 주식시장의 미래는 왜 이렇게 깜깜한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