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지가 익어가는 냄새

by 털찐 냥이

드디어 오이값이 많이 내렸다. 오이가 흔한 채소였는데 언젠가부터 몸값이 올랐다. 어릴 때 시장에 가면 제일 저렴하게 한 무더기씩 담아 올 수 있는 채소였는데 갑자기 신분상승을 해버려서 당황스럽다. 갈증이 날 때는 편의점에서 사 먹는 어떤 음료보다도 건강한 수분 공급원인데 아쉽다.


옆집에서 오이지를 몇개 주셨다. 매우 짜다.

"어떻게 해 드세요?"

"응, 꾹 짜서 얇게 썰어서 찬물에 띄워먹지."

나는 어떻게 해 먹을까?

오이지는 얼음물에 송송 썰어서 동동 띄어먹어도 맛있지만 역시 매콤한 맛이 필요하다. 매콤 짭짤하게 버무려먹으면 한 여름의 더위에 입맛이 뚝 떨어질 때 밥맛이 돌아오게 한다. 몹시 짭짤하고 살짝 달콤한데 깨의 고소함이 끝 맛을 마무리할 때 밥 한 숟가락을 떠먹으면 활기가 찾아온다.


오이지는 일단 얇게 썰어본다. 나의 칼질은 투박하기에 최대한 얇게 도마질을 해본다. 찬물에 시원하게 흔들어서 물기를 꽉 짠다. 3분의 2는 양념을 하기로 했다. 고춧가루, 설탕, 식초, 깨, 참기름 등 손에 잡히는 대로 넣어서 조물 조물 해본다. 일단 먹을만하니 유리그릇에 담는다. 남은 3분의 1은 탄산수에 동동 띄워봤다. 왠지 찬물보다 더 맛이 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탄산수 기포가 오이지에 닿아서 보글보글 일어난다. 나쁘지 않다. 왠지 탄산이 오이를 더 깔끔하게 감싸주는 느낌이 든다.


벌써 오이지를 먹기 시작하니 작년의 극한 여름이 생각났다. 올해도 작년만큼 더울까?

작년 여름 내내 더위가 목을 하루 종일 조였다. 이러다가 수명이 단축되는 것을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더위가 식지 않았다. 머리카락도 한 움큼씩 빠졌다. 미용실에서는 어디가 아팠었냐고 물어본다. 새롭게 자라는 머리카락이 많다고 했다. 다행이다. 한 여름 숨만쉬어도 지치는 기분은 정말 별로였다.

겨울의 시원한 바람이 그립지만 주변에 있는 호수와 숲이 주는 살벌한 추위보다는 지금이 차라리 낫다고 위로를 했다. 대신 크게 선풍기 바람을 껴안는다.


이 동네에 이사 올 때부터 터줏대감 할머니를 발견했는데 1년 내내 텃밭에서 수확한 농산물을 조금씩 펼쳐놓고 파는 할머니이다. 노점의 주인 할머니는 사거리 신호등 앞 작은 공원 입구에 자리를 잡고 있다. 직접 키운 농산물을 파는데 수완이 참 좋으신 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입지가 꽤 괜찮다. 대단지의 아파트와 작은 사거리 앞이다. 가지, 호박, 오이, 고추 등 시골 외할머니네에서 봤던 작고 옹골찬 야채들이 계절마다 여무는 대로 자판에 깔린다.

소량이고 볼품없지만 자연스럽게 열리고 자란 야채들이다. 제멋대로 자라서 똑같이 생긴 게 없다. 트보다 렴하지 않은 가격에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재미있는 것은 시골에서 봤었던 동네 느티나무 역할을 이곳에서 한다는 것이다. 동네가 신도시로 개발되기 전에는 건너편에 큰 느티나무가 있었고 평상이 있어서 동네 사랑방 역할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이곳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몇몇 어르신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야채를 같이 다듬는다. 팥죽 같은 간식을 나누어 먹는다. 이곳은 요구르트 아주머니의 영업장소이기도 하다. 귀여운 이동식 냉장고가 종종 대기하고 있다. 끔 나도 한번 타보고 싶다. 달릴때 어떤 기분일까?


어느 날 신호등 앞에서 가만히 노점을 바라보니 비밀스러운 파란 통이 보인다. 명패가 눈에 들어온다. 오이지였다. 텃밭을 일구고 야채를 수확하고 실어오고 가져와서 다듬느라 바쁠 텐데 그 와중에 오이지를 직접 담그셨나 보다. 어르신들의 생활력과 부지런함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가만히보니 있는 오이지가 아니다. '맛조은 오이지'이다. 손글씨로 쓰여있다. 맛조은 오이지. 진짜 맛이 좋을 것 같다.


나는 사실 오이지를 싫어했다. 어릴 때 내내 부모님은 오이지를 담가서 파셨다. 몇 달 동안 팔아야 하니 매년 한 번에 많은 양을 담가야 했다. 그 수고로움은 어린 내가 봐도 말할 수 없이 커 보였다. 짠물에 오이를 푹 담근다. 물 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큰 돌로 눌러 앉힌다. 오이지의 짠내가 내 마음을 소금물에 무겁게 눌러 앉혔다. 그 애씀을 지켜보는 것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오이지가 점점 익어가면서 뿜어내는 냄새는 시큼하고 역했다. 익숙해져야 했다. 무슨 맛으로 이걸 먹는 걸까? 쭈글쭈글 보기에 밉고 못나고 냄새는 짜다. 먹기 싫다.

그런 오이지를 오랫동안 멀리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이 났다. 그 짭조름함이 떠올랐다. 이제는 맛있을 수 있을까? 조금만 먹어보기로 했다. 다행히 바로 무쳐서 먹는 맛은 나쁘지 않았다. 가끔 조금씩 먹어 볼만했다. 이제는 짠 기억이 찬물에 씻기듯 많이 싱거워진 것 같다. 싱거워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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