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이랬다. 폴란드에 오면 주말마다 여행을 많이 하게 될 줄 알았는데 남편은 야근뿐 아니라 주말근무까지 잦았다. 남편의 쉬는 날을 기다리다가는 어느 세월에 여행하겠냐 싶어서, 한 달 반쯤 지났을 때는 혼자서 아이들을 차에 태워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걷지 않으려는 아이 둘, 무거운 쌍둥이 유모차(유모차를 탈 나이가 아니지만 늘 안아달라고 보채서 휴대용 유모차를 항상 들고 다닌다), 유모차가 잘 굴러가지 않는 유럽의 돌바닥, 밖에 나오면 호텔로 돌아가자고 징징대는 아이들... 아무리 멋진 도시나 자연에 둘러싸여 있어도 '내가 미쳤지. 두 애들을 데리고 여기에 왜 왔을까'하며 후회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고생도 추억으로 남아 그 후회를 잊고 또 여행을 떠나곤 했다.
시어머니가 찾아오신 덕에 이번엔 처음으로 어른 셋과 아이 둘이 여행하게 되었다. 3:2라니 황금비율이다. 아이들 보고 싶어 온 것이니 다른 여행은 안 해도 된다며, 그저 나치의 수용소였던 아우슈비츠에만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하셨다. 남편이 쉬는 주말에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근처 도시인 크라쿠프로 다 함께 여행을 떠났다. 지난 여행 이후 글 쓰며 집에만 있어 몰랐는데, 가을이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노란 낙엽으로 가득 뒤덮인 공원에서 아이들은 뛰어다니며 신이 났다. 시어머니는 아이들과 잘 놀아주셨고, 남편은 오며 가며 운전을 해주었다. 유모차도 셋이 번갈아서 미니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두 손이 자유로워진 나는 마음껏 사진도 찍고 예쁜 풍경을 영상에 담기도 했다.
크라쿠프의 가을
11세기부터 17세기까지 폴란드의 국왕들이 살던 바벨성을 둘러보았다. 바벨 언덕 위의 빨간 벽돌의 성 주변으로 온통 단풍이 들어 더욱 고풍스러운 느낌이었다. 폴란드 전통음식인 피에로기와 골롱카, 아이들은 변함없이 치킨 돈가스와 감자튀김을 저녁으로 맛있게 먹고 어두워진 구시가지의 광장을 걸었다. 폴란드어로 중심 광장을 뜻하는 '르넥(rynek)'은 어느 도시에나 있는데, 이곳의 르넥은 정말 입이 벌어질 정도로 크고 화려했다. 성모 승천 교회, 구 시청의 종탑, 작고 아담한 성 보치에하 교회 등 역사적 건물이 광장 주변으로 모여있었고, 밤의 조명과 어우러져 더욱 화려했다. 주변에 역사유적지도 정말 많고 도시가 크고 멋져서 관광지도를 유심히 읽어보니, 17세기 바르샤바로 수도를 이전하기 전 이곳이 수도였다고 한다. 또한 크라쿠프의 르넥은 동유럽 최대 규모이고, 전 유럽에서도 두 번째로 크다고. 2차 세계대전을 비껴간 덕에 당대의 모습이 위풍당당하게 남아있고 이곳 구시가지와 바벨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있다. 폴란드 여행지 1위로 꼽히기도 하는 곳이었다.
광장 중심에 가장 크고 화려한 직물회관 건물은 지하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지상은 마켓으로 쓰여 중앙 통로에 수많은 상점들이 양쪽을 줄을 지어 길게 늘어서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어릴 때부터 풍족하게 못살아서인지 백화점은 별로 재미도 없고 관심도 없다. 작은 소품 가게, 플리마켓, 골동품 가게에서 내 맘에 쏙 드는 물건 하나 찾는 것을 좋아한다. 즐비한 마켓에서 핸드메이드 가죽제품, 폴란드 전통의상, 호박 보석 액세서리, 마그넷, 목공예 소품, 인형, 이콘(성화) 등을 팔고 있었다. 알록달록 예쁜 상점들을 모두 꼼꼼하게 둘러보고 싶었으나 금세 돌아서야 했다. 남편은 마켓에 1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고, 시차 적응으로 피곤한 시어머니도 계시니 나 좋자고 넋 놓고 둘러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일 반드시 다시 돌아오리라' 다짐하며 숙소로 돌아갔다.
크라쿠프 중심광장
다음 날은 독박 육아 날이었다. 남편과 어머니만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투어에 다녀오기로 예정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는 역사적 잔혹함 때문인지 14세 미만 어린이에게 관람을 권하지 않았고, 가이드 투어도 3시간이나 걸리니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남편은 나와 어머니만 다녀오라고 했었지만, 며느리보다는 오랜만에 아들과 함께 여행하고 싶어 하실 것이 당연지사 아닌가. 사실 강제수용소는 영화와 책으로 많이 접해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고, 여행 수필을 쓰고 있는 나로서는 이곳에 다녀오면 또 하나의 글감이 생길 것 같은 사심에 무척 가고 싶긴 했다. 하지만 그 욕심으로 어머니의 기쁨을 앗아갈 정도로 야멸찬 며느리는 아니다. 내가 아이들과 남기로 했다. 어머니는 '아이구, 네가 혼자 고생하겠다'라며 걱정해주셨지만, 사실 나는 왠지 모를 기대가 올라오고 있었다. 함께 아침을 먹고 간단하게 차를 한 잔 하고 헤어졌다.
'이제부터 이 여행은 내가 주도한다!'
어제 내가 희생하는 여행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묻어가는 여행과 키를 쥐는 여행은 다르다. 헤어진 후 공원에서 내가 좋아하는 케냐 핸드드립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낙엽 속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커피를 다 마신 후에 길을 걷다가 거리에 그림 파는 곳에 멈추었다. 수 백개는 되어 보이는 유화 캔버스가 커다란 벽과 가판대에 걸려있었다. 어제 수아가 그림을 갖고 싶어 했는데, 예쁜 그림들이 너무 많아 계속 고르지 못하고 있어서, 저 멀리서 기다리고 있는 남편과 시어머니를 향해 그냥 지나쳐야 했던 곳이었다.
"수아야, 좋아하는 그림 있으면 고를래?"
그제야 유모차에서 벌떡 일어났다. 수아는 고양이 그림이 예쁘다고 했다가, 그 옆에 발레리나 그림이 더 예쁘다고 했고, 사주려고 하니 말 그림이 제일 예쁘다고 했다. 여행지에 가면 장난감은 안 사줘도 그림은 사주려고 하는 편이다. 아이가 좋아하는 그림을 두고두고 볼 수 있고, 그 그림을 보며 여행의 추억을 떠올리고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아의 변덕이 최종적으로 확정될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가 백마의 그림을 샀다. 수아의 그림을 포장해서 가려고 하니 둘째 주아가 자기도 사달라며 조른다. 주아는 귀여운 고양이가 테이블 위의 케이크를 먹으려는 그림을 골랐다. 두 아이가 오래오래 시간을 끄는 동안 기다리거나 눈치 볼 사람이 없어서, 그 사이 나도 여러 그림을 구경할 수 있어 좋았다.
집에 온 다음 날 파란 볼펜으로 그려, 백마를 유니콘으로 둔갑시켜버렸다. 흐유.
유모차를 밀며 어제 갔던 광장으로 가서 마켓에 다시 들렀다. 어제 멈추어서 구경하지 못했던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유모차는, 두 아이가 이제 너무 무거워 밀고 다니기 쉽지 않지만, 두 아이를 앉혀 한 번에 둘 다 통제할 수 있는 큰 장점이 있기도 했다. 시장에 오니 아이들도 귀여운 장난감을 갖고 싶어 해서, 아이들이 원하는 귀여운 다람쥐 인형과 슬라임을 각각 사주었다. 내가 평화롭게 마켓 구경을 하기 위한 미끼 선물이다. 아이들은 유모차에서 다람쥐와 슬라임을 만지작 거리며 얌전히 있어주었다.
다람쥐 인형을 샀던 곳에 보들보들한 털모자가 있어 써보았다. 폴란드의 겨울이 매서워서인지 이곳은 날이 추워지면 남녀노소 예외 없이 모두 비니 모자를 쓰고 다닌다. 나도 이제 슬슬 준비할 때가 됐다. 부드럽고 따뜻한 까만 비니가 잘 어울렸다. 당첨! 옆 가게에는 마그넷이 있었다. 냉장고에 붙여놓는 마그넷을 한 번 도 산 적 없는 나였지만, 폴란드에 오고 유럽을 여행하면서 여행을 추억하기 위해 몇 달 전부터 하나씩 사모으기 시작했다. 크라쿠프의 모습을 담은 것이 수십 개. 너무 많으면 어떤 게 예쁜지 보이지도 않게 된다. 한참을 살펴보다가 어제 봤던 곳 중에 두 탑이 비대칭이어서 인상적이었던 성모 승천 교회의 모양이 담긴 마그넷을 샀다.
목공예품이 파는 곳에서는, 바벨성의 모습과 크라쿠프 지명이 우드버닝으로 고풍스럽게 새겨진 조그만 보석상자를 샀다. 마켓의 물건들 대부분이 가격도 착해 뿌듯했다. 남편이 곁에 있었다면 천천히 살펴보며 기념품을 사는 여유는 부리지 못했을 것이다. 눈치 주는 남편은 아니지만, 쇼핑에 전혀 관심이 없는 남편이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여유를 부릴 만큼 나도 넉살이 좋은 편은 아니다.
크라쿠프의 마켓과 내가 산 기념품
짐도 늘어나고 유모차도 더 무거워졌다. 배고플 아이들에게 간단한 점심을 사주고 기차역으로 향하려고 맥도날드에 들어갔다. 둘 다 쉬가 마렵다고 보채고, 지하의 화장실 문은 비밀번호가 필요했는데, 비밀번호는 구매한 영수증에 적혀있다고 했다. 급히 돌아가 먹을 것을 주문하고 영수증을 받아 화장실에 갔다. 급하다는 두 아이를 차례차례 화장실에 안고 일을 처리하느라 진땀을 뺐다. 기차역에 다 와서도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찾지 못해 에스컬레이터를 탔는데, 나는 유모차를 잡느라 아이들 손을 잡아주지 못했고, 에스컬레이터가 무서웠던 아이들은 발을 떼지 못해 울먹울먹 하다가 어정쩡하게 발을 내디뎌 넘어지고 말았다. 기차를 탈 때도 많은 인파를 비집고 아이들 손을 잡아 차례로 태운 후에 유모차를 싣느라 생고생을 했다. 남편과 어머니와 함께 우아하게 여행하던 때와 전혀 다른 측은한 엄마의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난 이게 조금씩 재미있어진다. 혼자서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 너무 힘들어서 남편의 휴가를 간절히 기다리면서도, 막상 떠나보면, 삽질을 하고 고생을 한 바가지 하더라도, 마켓을 가고, 아이들과 그림을 고르고, 시장을 둘러보고, 커피 한잔 음미하고, 수십 개의 마그넷 중 뭘 살지 한참을 들여다보며 고민 고민할 수 있는, 나 홀로 독박 육아 여행이 오히려 더 자유롭게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자기주도형 인간이었다. 유치원에 다니기 싫어서 한 달 다니고 그만두었고 집에서 혼자 놀았다. 초등학교 때 피아노 치는 건 좋아했지만 매일 가야 하는 피아노 학원이 싫어 그만두었고, 중학교 때 혼자 코드 반주를 독학해 어쭙잖은 작곡을 하곤 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토플과 토익 점수가 필요할 때도 학원에 가지 않고 책을 사서 점수가 나올 때까지 스스로 했다. 취직 후에도 아나운서로 방송하는 것은 좋았으나 직장생활은 더 견디고 싶지 않아 퇴사 후 혼자 먹고 살 방법을 궁리했다. 설명이 거창하지만 쉽게 말해 독고다이(마이웨이)라는 말이다.
어른 셋에 아이 둘이라는 황금비율의 여행을 누리면서도, 오히려 잠시 반나절의 독박 육아 여행에서 더욱 자유로움을 느끼는 나를 보며, 새삼 '나'라는 사람을 알아간다. 지지리 고생을 하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나의 페이스대로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사람이고, 그것이 여행의 만족도, 더 나아가서는 삶의 만족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다.
그러나 도착한 기차역 플랫폼에서 남편과 시어머니를 만났을 때는 구세주를 만난 듯 반가웠다. 두 사람이 없었다면, 두 아이와, 많은 짐과, 쌍둥이 유모차를 또 어떻게 이고 계단을 오르내린단 말인가. 자기주도, 마이웨이도 다 좋지만, 역시 육아와 엮일 때는 독고다이로 살아갈 수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