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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 Apr 25. 2022

이별 5주차: 탈덕한 덕후의 마음

지인 A는 모 남성 아이돌 그룹의 오랜 팬이었다. 그에게 그 그룹은 동경의 대상이었다가 사랑이었다가 사이버 남자친구였다가 의리로 사는 부부같은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회 면에 최애 나오기'로 강제 탈덕했다.

A처럼 한 연예인을 오래 좋아한 적은 없지만 하느님에게 극성스러운 엄마를 보아 짐작하건데, 나의 덕질 DNA는 유전되었다. 수능 예비 소집 날 하필 '선덕여왕'에서 미실이 죽는 바람에 부은 눈으로 수능을 치를 정도로 사극 드라마에 진심이었고, 초등학생 때 일본 아이돌에 빠져 동생과 나란히 일본인의 성이 적힌 티셔츠를 입고 내한 콘서트를 간 게 인생 최고의 흑역사다. 사람이 아닌 '활동'에 열정을 200% 쓰는 일도 많았다. 초등학생 때 가상의 역사를 배경으로 글을 쓰는 '모의전'이라는 활동에 빠졌고, 고등학생 때는 학생회 활동에 진심이라 교사와 학생, 학교 모두에게 지탄을 받을 정도로 과한 행사를 열었다. 대학생 때는 토론 동아리에서 매주 45분짜리 시사 이슈 발표를 했으며, 몇 년 전에는 뮤지컬과 연극에 빠져 연봉을 탕진하다가 눈이 뒤집혀 공연 동호회에서 3년여간 다섯 작품의 연출과 배우를 맡았다.

이런 성향이 연애할 때라고 어디 가겠는가? 나는 2년 7개월간 T의 덕후로 살았다. 아이돌 그룹에서 모두가 존잘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덕질의 핵심은 착즙. 그들이 숨만 쉬어도 덕후들은 앓을 것 수백 가지를 뽑아낸다. T는 내 취향의 외모였고, 목소리가 좋고, 어렸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사람답게 애교가 많았다.​


가끔 익명 게시판에서 "지하철에서 오징어 지킴이 만남. 에휴 줘도 안가질걸 왜 저러는지.."류 의 글을 읽으면 뜨끔한다. '오징어 지킴이'란, 객관적으로 멋지지 않은 남자 옆에서 다른 여자를 견제하는 여자친구를 일컫는 말이다. 선조님들은 '제 눈에 안경', '콩깍지 씌었다'라고 불렀던 이 병은 사귀고 1년 정도 유지되는데 나는 2년 7개월 내내 이런 상태였다. 우리는 연애 초기에 연락 문제를 협의하느라 다툰 것 외에는 거의 다툴 일이 없다가 헤어짐을 맞았다. 싸우지 않은 표면적인 이유는 갈등을 피하는 성격 탓이지만 사실은 걔가 너무나 내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다툼은 주로 카톡에서 발발하고 오프라인에서 싱겁게 해결되었다. 걔의 표정과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전의를 상실했다. 그 정도로 훈남이냐고 하면, 음, 취향 존중 바란다.

그래서 탈덕은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날 사랑하기는 했니?"라는 순도 100%의 진심 어린, 그러나 닳고 닳은 말이 나왔던 이전의 결별과 비교하면 T와는 사랑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이별의 물꼬를 튼 건 T였다. T는 회사에서 새로운 커리어를 쌓기 시작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았고, 직장생활 7년 차이자 여자친구의 존재는 그의 조급함과 불안에 불을 지폈다. 나는 나대로 그의 무던하고 안정적인 심성에 빠졌던 터라, 강하게 버티며 함께 미래를 그릴 수 있는 의지를 보여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주말 데이트에서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어떨 거 같아?"라는 말을 뱉더니, 헛소리가 아님을 증명하듯 월요일에 갑작스레 잠수를 탔다. "누군가와 대화하기가 힘들어. 잠깐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어."라는 메시지와 함께. 사라진 시간은 만 하루. 다음 날 잠수를 탄 것에 대해 사과하고 또 잠수를 탔고, 반나절 만에 다시 나타났다. 하루 반은 2년 7개월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지만 무엇인가가 뚝 끊겼다. 시간을 갖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는 다급하게 "안돼"라고 말하며 원하는 것을 나열했다. "편지 쓰고 꽃 사주는 걸로 투덜대지 마. 그만 조급해하고 커리어 도와주려는 사람 손 잡아. 노력하려는 의지를 보여줘. 이거 못 바꾸겠으면 그만하자."

이별에 마침표를 찍은 건 나다. 이별의 공포보다 자기기만이 더 싫었다. 잠수를 선언할 정도로 만만한 상대로 남을 수 없었다. 서로에게 짐이 되는 앞날이 빤했고, 그 미래를 떠올린 이상 돌이킬 수 없었다. 나는 다정함이 줄어드는 것을, 그는 현실의 어려움을 이별의 이유로 들었다. 이별의 이유를 다르게 짚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같았다. 현실이 팍팍하면 연인에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줄어든다. 하지만 나는 그런 순간에도 한결같은 사람을 원했다.

이번 덕질은 이렇게 끝났다. 그와 관련된 것은 무엇도 보고 싶지 않았다가 기억 하나하나를 살려 글을 쓰고 싶은 날이 반복된다. 수많은 감정이 올라왔는데, 그걸 다 삼키고 나면 몸에 멍울이 남을 것 같았다. 써서 털어내야만 이 감정들이 나를 해치지 않고 추억으로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덕질을 후회하냐고 물으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고현정의 미실 연기와 아이바 마사키의 어리버리함과 밤을 새 발표 자료를 만들었던 기억과 무대에서의 짜릿함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작은 성취 경험이 쌓여 큰 용기가 필요한 순간 등 뒤에서 나를 밀었다.

사랑받고 사랑했던 기억은 켜켜이 쌓인다. 커피와 아이스티의 얼음이 녹는 내내 자리를 뜨지 못하고 서로 눈이 짓무르도록 울었던 기억은 내 안에 남아, 사랑받았던 기억이 간절해지는 날 마음이 쉴 자리가 될 거다.

'휴덕은 있지만 탈덕은 없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1n년 간의 덕질 경험으로 판단하건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요즘은 지나간 흔적을 쓸고 닦으며 기억에 잠긴다. 이 시간을 지겨워하지 않아야 나중에 앓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새로운 최애가 나타났을 때 가뿐하게 달려갈 수 있는 힘을 위해 오늘은 잠기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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