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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 Apr 18. 2022

연애 단상

인간 관계에서 내가 알지 못했던 것들

지난 연애의 과정에서 남긴 글


#




부모님과의 갈등, 낮은 자존감, 어지러운 생각 등으로 힘들어 하던 나는 진로 결정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20 초중반의 몇년 동안 대학 학생 상담실에서 상담을 꾸준히 받았다.

그리고 사회인이 되고 나서 좋은 상담사를 만나 2~3년 가량 힘들 때면 마음이 기댈 곳을 찾을 수 있었다. 방어기제로 지식화를 쓰는 탓에 심리학 도서도 꽤 읽었고, 과거의 나를 안아주는 치유의 과정도 겪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정도 인간 관계에서 거리를 둘 줄 알고, 지나친 기대는 욕심이며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매일 보던 절친했던 사람도 1년에 한두번 볼까 말까 하는 사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관계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거리를 쉽게 잃곤 하는 사람을 한발자국 떨어져 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고 생각했다.

이번 연애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연애가 처음도 아니다.

세번 정도의 연애를 하며 우여곡절을 겪었고 돌아버렸나 싶게 온 마음이 쿵쿵 뛰는 사랑도, 매일 봐도 미치겠는 마음도, 지금 생각하면 민망한 짓도 많이 했다. 심장 소리가 귀에서 쟁쟁 울리고 어떻게 견디나 싶은 고통스러운 이별도 겪었다.

사랑이 끝난 뒤에는 이별의 원인이 어디에 있든 간에 힘들고 불편한 일이므로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고 묻어버렸다. 그래서 몰랐다. 사랑을 할 때 어떤 감정과 만나는지도 같이 묻어 버렸던거다.


최근에 연인이 지나치게 구속해서 힘들어하는 사람, 작은 약속에도 큰 의미를 부여해서 하루종일 본인의 노력을 어필하고 보답을 기대하는 사람, 지나치게 한 모임에 모든 기대를 다 걸고 늘 함께 하기를 기대해서 모두가 모임에 질려버리게 만드는 사람을 연달아 만났다. 너무 지쳐서 이런 사람이 되서는 안되겠다는 다짐을 몇번이고 했다.

그들과 나를 구분짓고 미성숙한 행동이니 하면 안되고 하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한거다. 주변에도 '이런 일을 겪었다. 너무 싫었다. 이해가 안 간다'는 말도 쉽게 했다.


기어이 사건은 터졌다. 한 해의 말일, 기분 내고 싶어 편의점에서 와인을 사들고 집에 와서 마시기 시작할 때는 좋았다. 주량이 적어서 유리잔에 따른 와인이 생각보다 많다 싶었지만 호기롭게 다 마신게 화근이었다.

술에 취한 내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있었다. 그리고 남자친구는 다음날 이른 휴일 근무를 준비하기 위해 막 잠자리에 들 참이었다.


열시 반에는 자겠다는 남자친구에게 투정으로 시작한 술주정은 점점 혼자 생각하던, 서로의 건드리지 말아야 할 과거의 상대에 대한 질투심과 서운함을 폭발시켰다. 대답하지 않으면 왜 대답하지 않느냐고 캐물었고 피곤해하면 지금 대화를 피하는 거냐고 시비를 걸었다. 남자친구는 너만 취한 상태에서 이런 대화는 불공평하다고 말했지만 이미 고삐가 풀린 내 귀에 들릴 리가 없었다.


새해 아침을 두통에 시달리면서 목마름에 깬 나는, 내 안에서 자라난 어두운 생각들의 실체를 확인하고 경악했다.


만나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우리는 꼭 만나지 않으면 다툼이 생겼다. 상대가 눈 앞에 없으면 불안해지고 모든 일정을 알고 싶고 신경이 나에게 곤두서 있으면 하는 마음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정도까지 그의 공간을 침범했을지는 몰랐었던 거다. 무엇보다 상대를 닥달하고 재촉하는 과정에서 평소 만족하던 내 일상의 행복을 놓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이만큼 하는데 너는 왜?' 하는 마음이 들 때, 그가 그것을 원했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내 기대만큼 행동하지 않으면 사랑이 식었나 하는 생각으로 불안해졌다. 남들은 이렇다는데, 사랑하면 이렇다는데, 사랑에 빠진 남자는 이런다던데- 하는 말에 발목 잡혀 실체도 없는 이상적인 연인 A와 그를 비교했다. 그러면서 질투하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내가 더 그를 좋아한다는 걸 들키면 자존심 상해서. 지인이 내 이야기를 들으며 '자존심 상해서'라는 말을 바꿔보라고 했다. 바꾸다 보니 정작 하고픈 말은 '지기 싫어서'였다. 공부나 직장, 취미 등 어느 분야에서도 지고 싶어 하지 않는 승부욕이 연애까지 손을 뻗쳐 더 사랑하는 걸 티내면 지는 거라는 생각이 든 거였다.


지인은 같은 시간을 써서 만나면서 덜 사랑하는 사람이 더 손해라고 했다. 같은 시간동안 더 사랑하는 게 나의 시간을 소중하게 쓰는 거라고. 그건 지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모든 인간관계에는 사적 영역이 있다. 서로의 거리가 10m라고 가정하면 이 10m 안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조금 더 오고 덜 오고 그 정도가 바뀌기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상대방의 코 앞까지 다가온다면 상대방은 더 갈 곳이 없어 뒤로 물러나게 된다. 그 상황에서 '왜 나는 이만큼이나 왔는데 너는 물러나느냐'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자기 입장에서는 서운하겠지만 타인에게는 부담일 뿐이다. 절친한 친구나 연인이라도 타인이므로 지키고 싶은 나만의 공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열고 싶은 부분이 있고, 오픈하는 타이밍은 저마다 다르다. 



출근길 같이 출근하는 동료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올해 결혼을 앞두고 있는 5년차 커플인 그는 내가 옮기는 지인의 말에 감탄하더니, 그 모습도 자신의 일부임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자신도 질투와 불안 때문에 힘들 때가 있다고. 하지만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고 감정이니 어쩔 수 없다고. 그게 단점인지 알고 고치기 위해 노력하지만 불안을 이해하고 줄이기 위해 연락을 하고 자신의 애정을 충분히 표현해주면 좋겠다고 연인에게 말을 해두었다고 한다. 그런게 연애하는 재미 아니에요? 그런거 하나도 없이 무슨 재미로 연애해요? ㅡ라고 말하는 당당한 모습에 폭풍 고개를 끄덕였다.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연애도 성숙하게, 다부지게 성공하겠다는 다짐은 버리기로 했다

타인인 너를 내 마음대로 다루려고 하지 않겠지만 바뀌어주었으면 하는 마음까지 숨기지는 않기로 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한다. 너와 나의 오랜 사랑을 위해 서로의 사적 공간을 침범하지 않고 허용하기 위해 노력하려고 한다. 쿨하지 않은 연애라도 괜찮다. 미숙한 나와 너라도 괜찮다. 이게 서로가 사랑하기로  너와 나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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