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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 Oct 24. 2022

다시 쓰는 상실기

나는 부서지지 않는다

다시 상실에 대해 쓴다. 연인과 이별에 관해   글이 작년 4월이었으니 1 6개월만이다.  이후로도 많은 일이 있었다. 사고와 부모와의 갈등과 해외로 나오고  곳에서 겪은 일들, 공허함과 외로움. 생각나는 것들만 적어도 뿌옇다. 어디서부터 이걸 다루어야 할까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


이별 이후 가장 먼저  일은 글쓰기 수업을 듣는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상처를 가만 두면 내가 버틸  없다는  알았다.   정도 감정을 글로 마구 토해냈다. 운동 수업을 늘리고   후에는 상담도 신청했다.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위험해. 상담을 받는 도중에 사고가 났고 수술과 해외 파견이 결정되었다. 목발을 짚고 상담을 다녔다. 방콕에서의 어려움이 쓰나미처럼 덮쳤고 어떻게   모를때 다른 글쓰기 수업을 들으며  다시 글을 썼다. 그리고 그글쓰기 수업에서 나는 '더이상 상실에 관해 쓰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더이상 지나간 연인과 부모의 갈등에서 괴로워하고 싶지 않았다. 일상은 어느정도 자리를 잡았다. 일도 관계도 모든 것이 작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안온한 삶이 시작될 단계였다. 한국에 돌아가면  해야하나 하는 목표를 세우고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래,   전의 나는 그랬다.​​


*


신호는 여러군데서 왔다. 동료들의 일상적인 말에도 짜증이 나고 사소한 문제에도 마음이 지쳤다. 졸리고 몸이 늘어졌다. 하루종일 멍하니 보내다 운동을 하는 시간에만 바짝 정신이 들고 저녁에는 소파가 당기는 것처럼 누웠다. 며칠에  번씩은 약속이 있었고 활기차게 시간을 보냈으나 돌아와서는 똑같았다. 점점 요리를 하지 않았다. 울음의 빈도가 잦아졌다. 쉽게 눈물이 나고 쉬이 멎지 않았다. 며칠 전에는 갑자기 직장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벌개진 눈을 감추지 못하고 동료와 눈이 마주쳤다. 황급히 태연함을 가장했지만  순간 인정했다. 진즉부터 사이렌은 왱왱 울리고 있었다.​


2년 전 잠깐 상담을 받았지만 좋았던 상담사가 있었다. 카톡 프로필을 뒤져 "화상 상담도 하시나요?"라고 묻고 상담료를 들은 뒤, 2주 간 발버둥을 쳤다. 상담책도 찾아 읽고 주변인에게 넌지시 나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괜찮다고, 별거 아니라고 아무리 스스로를 설득하려고 해봐도 괜찮지가 않았다.

"내일도 가능한가요?" 토요일 오후 3, 오전에 운동을 마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상담 시간만 기다렸다. 상담이 만병 통치약이 아닌   아는데도 마음이 그랬다. 벽에 금을 내지 않으면  감정이 어디까지 차오를지 몰랐다.​


*​


상담을 시작하고 30분 만에 지난 2년 간의 이야기를 토해냈다. 글로도 쓰고 몇 번이나 곱씹었던 문제이므로 예상보다는 차분히 말할 수 있었다.

"뭐가 문제이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지도 알아요."

"뭐예요?"

"회복이  되고 있어요. 감정이 아직도 마음에 묻혀 있어요. 힘든 , 좋은 , 행복했던 , 괴로운   싸매서 덮어뒀어요."

"어떻게 해야하는데요?"

"감정을 들여다보고 위로해주고. 인정해주는 거요. 다시 꺼내야 해요."

" 알면서   찾았어요?"

"도저히 혼자  수가 없어요. 너무 지쳤어요. 그만 참고 싶어요."

"감정이 폭주할까봐 두렵군요"

아니, 이미 폭주하기 시작했다. 과거의 행복한 기억  조각에도 발작적으로 눈물이 나고 그걸 묻은 내게 주체할  없이 화가 났다. 아직까지 극복하지 못한 내가 한심하고 관련이 있는 모든 사람을 비난하고 싶다. 그런데  모든  한대도 괜찮아질  같지가 않다. 나는 부서질 것이다.​


" 지금이죠? 이제 겨우 살겠는데"

"우리 몸은 스스로를 살리려고 부단히 애써요. ㅎㄹ씨가 힘들었던 때 나올 수 없었을 거예요. 이제 괜찮아졌으니 돌봐달라고 나온거죠. 내 안에 힘이 생겨서요."

알았던 답인데도 외면하고 싶다. 모든 것들이 싸그리 사라졌으면 좋겠다.​


"우리는   있어요. ㅎㄹ씨는 부서지지 않아요. 이전에도 이런 적은 있었죠. 그때도 살았잖아요. 어떻게 지내왔는지 생각해봐요.  지나왔잖아요."​


상담이 끝난 뒤에도  말은 계속 떠오른다. 찬찬히 반복해 본다. 부서지지 않아요. 부서지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두지 않는다. 나는 나를 파괴하지 않는다. ​


"감정에는 도덕성이 없어요. 느껴도 돼요. 나쁘고 좋은  없어요."

"너무 찌질해요. 거기에 머무르고 있는 제가 너무 초라해요"

"찌질하면 어때요. 찌질해도 괜찮아요.  찌질하라지 "​


그는 소탈하게 웃고 나의 찌질함을 대변해준다. 그렇게 말하니 정말 별게 아닌 거 같다. 찌질함도 미련도 밉지 않다. 좀 못난 애같다.

" 선택은  맞아요. 실수도 괜찮아요. 어떻게 실수를  . 홀로서기는 처음이잖아요. 우당탕탕 구르고 서툰게 당연하죠."​


상담을 하며 생각보다 많이 울지 않았다. 말들은 낯설지 않았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그 말보다 더 강한 목소리가 있었을 뿐이다. 발 묶이면 안된다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목소리. 이 목소리가 진짜 감정들을 얼마나 억누르고 있었는지 몰랐던 거다.

​​


*


"벌써 내후년을 생각해요. 결혼은 싫은데 부모님이 납득을  하실테니까. 대학원을 가면 어떨까."

"방패네요."

"그런데 모르겠어요. 이게 제가 원한 걸까요? 이제는  내가 원하고 하지 않았는지도 혼란스러워요"

"정말 한국에 오면  하고 싶어요?"

"?"

"진짜 하고 싶은거요. 목표나 성취 말고"​


한국에 가면 하고 싶은 리스트를 적어보라고 했다. 상담이 끝나고 부은 눈으로 써본다. sf9 오프라인 스케줄 정신 없이 따라 다니기, 추운날 바람 맞으며 야외 운동하기, 아무도 밟지 않은 눈 길을 걷기, 추운 날 온천 야외탕에 가기, 자매들과 형부랑 배달 음식 시켜 먹기, 뮤지컬과 연극 무대에 다시 서기, 조금 무섭지만 축구 수업 다시 듣기, 주말 오전 한가한 도서관 구석에서 책 읽기, 조카의 하원길에 동행하기, 친구들과 시덥잖은 이야기 하며 실없이 웃기, 노래 레슨 받기, 좋아하는 브랜드 오프라인 매장에 가서 옷 입어보기, 명상과 요가를 하러 제주에 가기.


​​

*​


다시 상실에 대해 쓴다. 지긋지긋하다는 마음을 다독이면서 쓴다. 견딜 수 없는 순간에는 되뇔 것이다. 부서지지 않는다. 나를 부수지 않기 위해 달리기를 멈춘다. 뛰다보니 내가 행복했던 순간들은 다 선 밖에 있다는 걸 알았다. 이 선을 누가 그었지? 나는 아닌데.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s 언니는 말했다. 말만으로도 마음에 개운한 바람이 부는 것 같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정해진 길은 없는지도 모른다. 내 길에는 넘어진 나를 일으키려는 사람보다같이 누워있어 주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넘어진 김에 텐트도 치고 며칠 묵고 가자고 생각하는 내가 있으면 좋겠다. 주변의 풍경을 보며 피곤하지 않은 속도로 걷고 싶다. 갑자기 이상한 길에 들어서도 오, 새롭네 하며 머물러보고 싶다.

어디로 가야 하는 지 모르겠으나 알 때까지 누워 있으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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