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릴리 Apr 25. 2022

이별 11주차: 대답해야해

꼭 전하고 싶은 소식이 생겨서 연락을 했다. 익숙한 목소리와 말투. 목소리가 조금 마른 것 같다. “잘 지내?” 진부한 이 말을 묻기가 두려웠다. “운동을 많이 했어. 이러다 아마추어 대회 나갈 수 있겠어.” 그 말에 네 11주가 그려진다.

상담을 하다 “제가 피해자인 줄 알았거든요.”라는 말을 하고 말았다. 상담 선생님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가해자인 이별도 있어요. 하지만 이번 경우는 아니에요. 그 사람이 덜 표현한다고 해서 덜 아픈 건가요?”라고 말했다. “대회에 나갈 정도로 운동을 했다고 했죠? 그게 그 사람의 고통이에요. 표현이 서툰 사람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지난 상담의 끝에는 “너무 보고싶어요”라고 소리 내어 말했다. 그 말이 소리가 되어 내 귀에 들리자 눈물이 났다. 이 말을 처음 하는구나. 세 달 간 보고싶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미련이 남아 붙잡거나 선택을 후회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너와 헤어지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그 선택은 옳아야 한다.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끝내기 싫었다. 의젓하게 헤어졌고 그게 멋지다고 생각했다. 서로의 앞날이 행복하기를 빌었고 서로에게 부담이 될 수는 없다는 데 공감했다. 머리는 그랬다.


왜 상담을 하고 글을 쓰면서 안간힘을 쓰는 지에 대해 답해야 한다. 한 글자도 써지지 않는 시간을 견디고 이게 뭔지 모르면서도 말하려는지. 이 문제를 곱씹고 있다고 말하니 헤어짐 이후의 시간을 가까이에서 본 Y는 “솔직히 놀랐어요. 성숙하게 이겨내길래 정말 단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아직까지 힘들어하는 걸 보니까, 그 사람이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가 느껴져요.”란다. 성숙한 이별을 하고 싶었다. 우리는 납득했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착각했다. 미성숙하다고 여겨지는 행동과 말을 하지 않았다. 결국 했어야 하는 말과 감정을 쏟아내기 위해 글을 쓰고 상담을 받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불확실한 것 투성이지만 내 인생에서는 안정적인 성과가 나기를 기대했다. 그게 함정이다. 세상에는 어떤 게 좋고 멋진 삶인지를 떠드는 목소리는 너무 많지만 생의 불안과 변화무쌍함은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 머리로는 완전히 이해했대도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 마음을 봐주지 않으면 추억이 되기 전에 상처가 된다. 아무리 미화하려고 해도 상실감과 공허함이 비집고 들어와 가만히 있다가도 눈물이 나고 삽시간에 분노에 사로잡힌다. 지금 나처럼.


상담 선생님이 세상 온화한 얼굴이었다가 단호해지는 때가 있다. “그거 비합리적인 생각이에요.”라고 말할 때 그랬고, “Must나 should는 없어요. 그래야만 하는 것들은 없어요.”라고 할 때도 그랬다. “상담의 목적은 내담자의 행복이에요. 자퇴를 하고 싶다는 학생이 오면 그 순간 상담의 목표는 자퇴가 돼요. 그러니까 행복한 대로 해야 해요. 보고 싶은 사람은 만나고, 하고 싶은 말은 해야 해요.”


아직 이별 중이다. 이별은 서로가 그만 보자고 돌아서면 끝나는 게 아니었다. 괜찮아질 거라고 진정되는 마음이 아니다. 고집스럽게 ‘왜’를 묻는 과정이다. 토하듯 해야 하는 말이었다. 내가 준 사랑보다 상처를 곱씹는 시간이다. 고집스러운 마음이었다. 현실의 다른 문제는 제쳐놓고 너만이 중요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기대와 풀지 못한 마음이 엉켜 내 안은 아직도 혼란하다.

이전 05화 이별 10주차: 아, 이별 날로 먹고싶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