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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 Apr 25. 2022

이별 10주차: 아, 이별 날로 먹고싶다

트위터에서 ‘이별의 5단계 과정은 부정-분노-우울-수용-이소라’라는 글을 봤다. 마지막 ‘이소라’가 포인트인 웃긴 글인데 건조한 얼굴로 읽으며 생각했다. 헤어진 걸로도 징글징글한데 뭘 다섯 단계나 거쳐. 그냥 다 지났다 치면 안되나. 아, 이별 날로 먹고 싶다.


상담을 받았다. 상담 선생님은 “이별은 고통이에요. 죽는 사람도 있잖아요.”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하더니, “그 사람을 잘 보내야 다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어요.”라며 휴지를 내밀었다. 나는 초록색 향균 휴지에 눈물을 찍으며 억울하고 화가 난다고 털어놓고, 누구에게 화가 나냐는 질문에는 답하지 못했다. 이 대화로 파악하건데 나는 아직 ‘부정-분노’의 단계에 있다. 이 날 상담선생님이 한 말 중 최악은 “이별은 사랑했던 기간의 두 배 정도가 걸린대요." 이별을 역전우동 같은 체인 음식점 정도로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하루 전에 예약해야 하는 닭볶음탕 같은 거라니. 억장이 무너진다.


이별을 겪은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사랑을 시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고통을 알면서 또 뛰어든다고? 고통은 시간이 지나며 흐릿해지고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강하고 빠르다. 지인 Y가 헤어지고 술독에 빠져 지낸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 6개월 뒤, 연애의 시작을 알리는 인스타 스토리를 보고 화가 났다. “어떻게 6개월 만에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가 있어?” “..그럴 수도 있지.” 그 말이 더 싫어서 몰아붙였다. “너는 그럴 거야? 나랑 헤어지면?” “아니 그런 말이 아니고.” 그 뒤는 기억이 안 난다. 걘 비슷한 이야기를 헤어지는 순간에도 했다. “좋은 사람 있으면 나 신경 쓰지 말고 만나.” 개소리라고 생각했지만 한 달도 안 돼 소개팅에 나갔다. 그리고 헤어진 직후 소개팅은 부작용이 세다는 걸 절절하게 느꼈다. 소개팅남의 외모, 말투, 행동 하나하나에 구남친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올라온다. 어깨가 좁네, 목소리가 너무 앵앵거린다, 하. 왜 저렇게 말이 많아 등등. 온 몸의 세포가 오디션 프로의 심사위원이 되어 소개팅남을 재단질한다. 웬만한 상대는 추억과 미련이 범벅된 상태로 아직 방을 안 빼고 있는 구남친을 이기기 어렵다. 소개팅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수능 금지곡 모음집을 들었다. 볼륨을 높이고 아무 생각도 안 하려고. 하지만 비트가 터지고 생각도 터졌다. 망했다.


10년도 넘은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명대사가 떠오른다.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어 아부지.” 그때 삼순이 나이가 서른이다. 이 나이에도 심장이 뛰고 아프냐고 따졌는데, 서른이라니! 그때의 삼순이에게 달려가고 싶다. 나이 하나도 안 많아, 아픈 게 당연해. 괜찮아. 너 직업도 있고 전문직이잖아. 서울에 자가도 있고. 이런 흥 깨는 이야기를 하면서 위로해주고 싶다.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하는 마음, 너무 알겠다. 시간을 있는 대로 쪼개 쓰는데도 남는 시간에 떠오르는 감정을 어쩔 수 없다. 이별 한 번 더 했다가는 할 줄 아는 운동이 몇 개가 될지. 책 낼 만큼 글을 쓰고 덕질로 탑도 세우겠네.


고등학교 동창 D랑 그럭저럭 힘든 일상을 나눈 통화를 끝내고, 문득 열일곱의 내가 지금 나를 보면 뭐라고 할지를 상상했다.

야 나 또 헤어졌다. 툴툴 털고 일어나고 싶은데 안 돼. 그냥 눈 감고 뜨면 다 잊었으면 좋겠어.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되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 어린 나라도 안아줄 것 같다. 토닥토닥하며 괜찮아요, 울어요. 할 것 같다. 그럼 눈물 콧물 다 걔 교복에 묻히면서 울 것 같아.



헤어지고 나서 내내 누군가에게 안겨 울고 싶었다. 익숙한 품을 잃은 채로 살기가 버겁다. 그를 대체할 누군가를 찾았지만 진짜 안아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상상 속 내게 기대서 한 단계를 넘는다.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다던 삼순이는 진헌이랑 잘 된다. 그러다 또 헤어지고 만나고 했을 것이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사는 건 그럭저럭 힘든 거니까, 지금 이 고통도 선택의 결과니까. 언제고 온몸으로 겪어야 지나가는 과정이다. 억울하고 분하고 우울하고 떠나보내는 모든 과정도 다 살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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