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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 Apr 18. 2022

내 삶은 당신에게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니까

나는 지난 연인들에게 선언했다. 우리 아빠같은 사람과는 만나고 싶지 않아. 우리 엄마처럼 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내 감정을 다 받아. 나를 실망시키지 마.


전 연인은 시험 준비를 하느라 떨어져 있는 동안 점점 심해진 나와 아빠의 갈등을 아침 저녁으로 들어야 했다. 나는 주로 울부짖고 있는 상태였고, 그의 위로가 들릴리 만무했다. 아빠에게 스트레스를 받으면 바로 연락했다. 바빠서 조금 답장을 늦게 하면 그를 탓했다. 어디 갔어? 왜 이것도 못 받아줘? 내가 지금 얼마나 힘든데! 결국 그는 나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지쳤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연인은 이런 말을 했다. "이제 아버지와 너의 관계를 놓아야 해. 그래야 네가 살아." 부모님댁에 다녀와 감정을 있는대로 참았다가 용산역에서 걔를 보자마자 터트린 날이었다. 부모와의 갈등, 상처받은 나, 달래줘야 하는 연인 - 이 과정은 상대만 바뀌며 몇 년 간 반복됐다. 결국 그 말을 한 연인과도 헤어졌다. 연인이 있다는 걸 알지만 아빠는 집요하게 반대하며 은근히 대여섯살 이상 나이가 많고 돈이 많은 남자들과의 선을 주선했다. 싫다고 했는데도 계속 그랬다. 아빠의 기준에서 스물 여덟은 어디선가 번듯한 전문직에 고학벌 사윗감을 데려와야 할 나이였다.


부모는 자녀의 아킬레스건을 안다. 자녀가 겪는 불안과 걱정의 패턴을 알기 때문이다. 아빠는 어떻게 하면 나를 불안하게 할 수 있는지를 알았다. 그의 반복되는 결혼 종용에 내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당시 고민을 써놓은 글을 우리집에 놀러 온 걔가 읽었고, 헤어지는 이유가 됐다.


나는 '이 갈등이 너무 심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라고 썼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얘를 우리 집에서 인정받게 할 수 있을까?'라고도 썼다. 결국 나는 아빠를 끔찍하게 싫어하면서도, 연인이 아빠의 성에 차지 않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오랫동안 아빠의 훈장 노릇이 정말 싫었다. 공부를 잘 하고 좋은 대학에 가고 그럴 듯한 자리에 취업하고 겉보기에 대단한 '업적'을 이룰 때만 그는 나를 인정했다. 엄마는 아빠가 자녀의 수험 기간이면 너무 불안해서 잠을 못 잔다고 말했다. 엄마의 말에는 '그러니 너희가 잘해.'와 '아빠의 사랑은 그런거야.'가 담겨 있었다. 그걸 싫어했지만 걔의 인생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전문직이 될 수 있고, 그러면 부모 앞에 데려갔을 때 꿀리지 않고 의사인 형부랑 비교했을 때도 그만저만 괜찮다는. 강점은 순한 성격이니 그걸로 모자람을 감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진지했다. 걔는 처음으로 결혼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게 한 사람이었고, 나름대로 쥐어짠 게 그거였다.


결국 닮았다. 그렇게 피하고 싶었는데 닮아 버렸다. 아빠와 나의 관계에서 피해자가 나라면, 나와 연인들의 관계에서 피해자는 그들이었을 지 모른다. 처음부터 스펙을 보고 사람을 거르지도 않았으면서, 좋아지고 난 후에는 그들에게 스펙을 갖추기를 요구했다. 내게 애정과 다정함을 주라고 매달렸으면서 나중에는 그것 뿐이냐고 독촉했다.



이별 후 넝마가 된 마음으로 '차라리 잘 됐다'고 말할 부모를 대면할 용기가 없어 해외로 도망쳤다.진절머리가 났다. 서울에서 광주의 거리는 그들의 손길을 피할 수가 없었다. 해외 파견이 결정되었을 때 아빠는 "지금 너에게 시급한 일이 그게 맞아? 결혼은 어쩌려고 그래!"라고 말했고 엄마는 "그렇게 위험한 곳을 가다니 이렇게 엄마를 힘들게 하고 너가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라고 했다. 그 말을 하는 그들에게 마음을 뒤집어 보여주고 싶었다. 너덜해진 마음을 보이면서 당신들 탓이라고, 얼마나 더 해야 사는 대로 살게 해줄 거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지금은 좋다. 물리적 거리와 코로나가 나를 살렸다. 다만 가끔 해외 파견 소식을 듣고 상담 선생님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아무리 멀리 가도 마음을 정리하지 않으면 힘들어요. 가까이 있어도 거리 설정은 할 수 있어요."



어릴 때 법조인이 되고 싶었다. 아빠가 사시를 준비하다 안 됐으니까, 내가 합격해서 그 원을 이뤄주고 싶었다. 아들을 원했던 아빠의 콧대가 서게 친척오빠들보다 더 나은 스펙을 갖고 싶었다. 고작 교사가 되었기 때문에 내 성취는 미완이었다. 지금은 안다. 이것은 내 욕망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엉겨 있어 무엇이 아빠로부터 오고 무엇이 내 것인지를 구별하기 힘들다. 분명히 구분하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는 누군가를 같은 방식으로 상처입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입힌 상처는 내게도 남기 때문이다. 아빠를 닮은 남자를 피하기를, 아빠를 닮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일도 멈추어야 한다. 내 삶은 그에게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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