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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 Jul 11. 2022

엄마는 안돼

얼마 전 동생과 남성 취향 차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외모나 패션 스타일 등 모든 선호가 다른 우리가 정확하게 들어 맞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언니, 얌전해야 하잖아."

"그렇지. 무조건 얌전하고 조신하고 엉덩이가 가볍고. 무해해야지."

"그건 우리가 똑같네"

"야, 왜겠냐. 너랑 나만 똑같은게 아니라 언니까지 똑같겠지."

"아, 아빠 때문이구나 ㅋㅋㅋ"

"그치. 우리한테 남자는 무조건 순한 사람이어야 하는거야."


그래서 j를 좋아한다. j는 184cm의 키에 맨즈헬스 모델을 할 정도로 몸이 좋지만 말이 느리고 어리버리한 걸로 예능에 출연할 정도고 브이앱(팬과 아이돌의 소통 방송)을 켰다 하면  1시간동안 별 거 아닌 수다를 떨며 절반 이상은 애교를 부리는 스물 아홉살 아이돌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두개 정도는 더 큰데, 상대가 아닌 걸 맞다고 우겨도 "아 그래요~" 하고 웃어버리는 애이므로 앞뒤 분간 못하고 홀랑 빠져버린 거다. 그런 j가 얼마 전 슈돌의 유튜브 방송인 '아이 클라우드'에 출연했다. 영상을 본 팬들은 결혼, 출산 장려 영상이라고 했다. 카일로라는 아이는 귀엽고 그 애기를 어찌할 줄 모르고 귀여워하는 j도 무지하게 귀여웠다. 밥을 안 먹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고 온 몸으로 놀아주느라 땀 범벅이 된 모습이 흡족했다. 다들 그 영상을 너무 너무 좋아했다. 클립을 따고 얼마나 그가 좋은 아버지가 될 지를 상상했다. 체력이 좋으니 육아를 잘 할 것 같다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춰주는 것에 능하다고, 눈에서 꿀이 떨어졌다고 난리였다. 그 말들이 너무 불편하다.


아이를 좋아한다. 엄마는 유치원 교사로 오래 일했고 엄마를 따라 학교를 다닐 때에는 일이 끝날 때까지 종일반 아이들과 놀곤 했다. 어린 사촌들을 하루 종일 데리고 다니며 노는 게 일이었다. 길을 가다가 아이를 보면 눈을 못 뗀다. 아이는 작고 귀엽고 사랑스럽다. 박박 우는 아이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던 때도 있었으나, 그게 아이들의 특성이라는 것을 안 뒤에는 그런 아이조차도 측은하고 애틋하다. 조카가 생기고부터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아예 이모스타그램으로 바꾸고 조카 사진과 영상만 올리기도 했다. 주변에서는 나같은 사람에게 안 해도 될 말을 한다. "너는 얼른 아이 낳아야겠다"는 소리다. 하지만 정말로, 정말로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 비혼을 원하는 건 아닌데 비출산을 이렇게 강하게 원하니까 결혼이 쉽지 않겠지. 그럼 결혼도 그다지. 출산이 싫은건가? 아니면 육아가? 가장 두려운 건 책임감이다. 상상만 해도 겁이 나고 불안하다. 불안이 높고 스스로에게 엄격한 스타일이므로 아이를 키우는 내내 스스로를 엄청나게 꾸짖고 미워할 것이 뻔하다. 이유는 많고 많겠지. 부모로부터 독립한 이후 자유가 너무 좋았다. 부모에게 종속된 것은 선택할 수 없었으나 아이는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다. 


동생과 이런 말도 했다.

"야, j가 너무 좋아서 상상해봤다? 진짜 결혼을 하자고 하는거야 j가. 기대하는 그 모습으로. 근데 애를 꼭 낳아야한대.... "

"언니는 진짜 이상해"

"그러면 고민될 거 같아. 그정도로 j가 좋아"


이런 말을 나눈 게 얼마 전인데 슈돌 이후 깨달았다. 안돼. 엄마는 안돼. 섹스 상대가 있는데 갑자기 생리를 하지 않을 때, 이중피임을 했지만 피임 방법 중 하나가 불확실할 때 바로 산부인과를 찾았다. 주말이라도 새벽부터 한 시간 거리를 달려가 사후 피임약을 사고 굴욕 의자에 서스럼 없이 앉았다. 애는 안돼. 내 인생을 조질 거야. 엄마 인생을 아빠와 내가 조져놓았듯이. 엄마는 요새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말에 푹 빠져 있다. 우리에게도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라는 말을 반복하는데, 육아와 직장의 균형을 잡느라 허덕이는 언니가 가족 톡방에서 힘듦을 토로하자 '00는 넓은 아파트에, 다정한 남편에,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아들까지 있으니  얼마나 행복하니~'라는 공감력 -10000의 멘트를 날렸다. 어이 없어서 웃었는데 생각해보니 저게 엄마가 무척 원했던 거였나보다 싶다. 감정이 메마르고 차가운 남편, 며느리가 너무 만만한 시어머니, 세 딸, 남편의 실직. 모든 것이 엄마에게는 너무 고되었겠지. 언니가 저런 말을 하는게 배부른 소리로 들리겠지.



엄마가 될 수 없다. 하지 않는다 보다는 할 수 없다의 쪽인 것 같다.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고양이가 될 수는 없다와 같은 말이다. 스트레스가 극심할 때 악몽을 꾸는데 그 악몽 중 최악은 임신을 이미 했는데 중절 수술을 할 수 없는 상태고 배가 불러오는 꿈이다. 이런 꿈에서 나는 쉬지 않고 욕을 한다. 아 x 됐다. 망했다. 어떡하지? 아씨.


극단적인 상황을 상상해보자. 배우자는 너무 좋은 사람이고 내게는 아이 육아를 해주는 사람을 쓸 정도로 금전적 여유도 있다. 교육비 걱정도 안 해도 된다. 시부모도 적당히 괜찮은 분들이다. 그래서? 훌륭한 집사, 안락한집, 끊이지 않는 추르가 있다고 해서 고양이가 될 수 없듯이 엄마도 못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양이가 못 되는 일에는 아쉬움만 생기지만 엄마가 못 되는 일은 죄책감이 따라 붙는다. 나를 비난하는 사람도 생긴다. 그것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사람이 나타날 지도 모르지. 억울하다. 그건 내 통제 밖의 일이라고.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이다. 난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사람이 아니다. 일은 먹고 사는 거니까 하지만 그 외의 모든 건 금방 질린다. 그런데 감히 생명을 거두어도 될까. 결혼도 비슷하다. 10년까지는 어찌어찌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연애 감정이 사라진 이후에도 사랑할 수 있을까?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에서 주인공 배타미가 결혼을 하지 않을거고, 그것을 원하면 우리 사이는 여기까지라고 하자 상대 남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는 평생 가족을 원했다. 그 순간 두 사람은 다른 차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같은 언어로 말하지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마치 아빠와 내가 결혼과 아이에 대해 이야기할 때처럼. 가정을 왜 만들고 싶지? 가정은 늘 불안하고 두려운 공간이었다. '가정'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압박감, 부담, 불편함, 부자연스러움이다. 팽팽한 긴장감과 어색한 공기. 누군가의 눈길을 피해야 하는 자유롭지 못한 곳. 탈가정을 위해 공부하고 돈을 벌었다. 인서울 대학에 합격하고 보란듯한 직장을 잡아야 했다. 그 모든걸 위해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의 시간이다 흘렀다. 그렇게 몇 년을 살고 나니 갑자기 아빠는 가정을 꾸리라고 했다. 왜? 반항이 아니었다. 정말 순수하게 이해가가지 않았다. 인생의 목표였던 탈가정을 겨우 이뤘는데 다시? 탈출하고 싶었던 원가족과 새로 꾸릴 가정은 다르겠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은 너무 요원하고 힘들 것이 뻔하다. 가정을 꾸리는 일에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평생 자유를 좇았다. 그만큼 외로움을 동반했지만 사람과 지나치게 가까워지면 불편해졌다. 나와 타인 사이에는 반드시 바람길이 있어야 했다. 그래야 나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보다 가까워지면 그가 다가오든 내가 그를 곁에 두었든 탈이 생겼다. 내야하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불편한 상황이 올 때 선뜻 내 것을 포기하려고 했다. 그래서 연애가 끝난 뒤 돌아보면 다행이다 싶을 때가 많았다. 더 갔다면 나를 헐었을 것이다.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마음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본능적인 행위일지 모르겠다. 아이는 안 돼. 너는 그에게 모든 걸 쏟아부을 거야. 네 것을 모두 내어 줄거야. 그렇지 못하면 스스로를 미워할 거야. 닿을 수 없는 목표를 만들고 매번 네게 실망할 거야. 너무 괴로울거야. 견딜 수 없을 거야. 글을 쓰는 내내 이기심이라는 단어가 머리에 둥실둥실 떠다녔다. 비혼이나 비출산 이야기를 하면 아빠가 비장의 무기처럼 내놓는 단어다. 하지만 이기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비출산은 나를 너무 잘 아는 스스로를 지키겠다는 생존 방식이다. 누구의 이해도 필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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