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딘스키 인상 3-콘서트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11월이 되면 시들어가는 풍경이 불러오는 연상 처럼 '풍경 앞에 서면 몸도 정신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느껴진다는 것, 시프레 나무 바로 그것만이 ‘이치에 맞다’는 까뮈의 글이 생각곤 합니다. 그림 이야기지만 음악 이야기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존 케이지가 작곡한 ‘4분 33초’라는 음악이 있습니다. 악보에는 ‘조용히’만 적혀 있고 어떤 음표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연주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피아노 앞에서 연주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침묵 속에서 연주는 끝났고요. 완벽한 무음은 없다는 깨달음에 이은 작곡이라는 설도 있고 존케이지와 친구였던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전시회에서 빈 캔버스를 전시할 때 빛의 방향이나 사람들의 그림자에 의해서 변화되는 캔버스를 보면서 주변의 소리로 채워지는 음악을 생각했다고도 합니다.
그려지지 않는 미술과 연주되지 않는 음악은 예술에 대한 개념의 확장뿐 아니라 새로운 지평을 가져온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음악은 고도의 추상화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그런 추상화인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는 없을까요? 실제로 칸딘스키는 색에서 음악을 느꼈다고 해요. 색은 영혼에 떨림을 주는, 영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힘을 ㅡ불타는 주홍빛은 화염과도 같은, 빨간색에서는 트럼펫 소리를, 어두운 노란색에서는 음악을, 그리고 어두운 선홍색은 소프라노의 목소리ㅡ담고 있다고 느낀 거죠.
현대 추상회화의 선구자인 칸딘스키는 원래 피아니스트이며 첼리스트였습니다. 음악에 대한 뛰어난 감각과 실력 외에도 그는 아주 놀라운 공감 각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색채로 표현할 수 있는 음악을 궁구 하게 된 거죠. 더불어 칸딘스키는 예술이란 단순한 재현이나 미메시스가 아닌 작가의 감정을 나타내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이런 이론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사건들과 독특한 경험들이 필요하죠. 모네의 건초더미는 칸딘스키에게 지대한 작용을 했습니다. 산책을 즐기던 모네는 자연의 변화뿐 아니라 빛의 변화 그에 따른 색의 변화를 유심히 관찰했어요. 수많은 건초의 결들 속에 머무는 빛, 그리고 변하는 색, 모네는 무려 25점의 건초더미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같은 그림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른 그림들이죠. 어느 전시장에서 칸딘스키는 모네의 건초더미와 조우하게 됩니다. “이것은 나의 기억에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겼으며, 지속적으로 내 눈앞에 맴돌았다. 나는 이런 상황을 예상치 못했다. 그 작품은 더없이 완벽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칸딘스키가 설흔살에 직장과 나라를 떠나 미술의 세계에 들어선 아주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고 해요. 외출에서 돌아오던 칸딘스키는 자신의 화실에서 놀라운 작품을 보고 감동하며 마치 모네의 건초더미를 보고 느낀 매혹에 빠지게 돼요. 우습게도 그 작품은 자신이 그린 것으로 화실을 정리하던 사람이 그 작품을 거꾸로 세워놓았던 것이죠. 그는 여기서 그림이 내용이나 의미를 떠나 색채만으로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었어요. 사물을 정확하게 그리지 않아도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죠. 추상의 나라로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요.
그의 작품들에는 인상ㅡ자연으로부터의 즉각적인 느낌, 즉흥ㅡ무의식적이고 내재적이며 비물질적인 정신적 특성, 구성ㅡ서서히 형성된 내재된 느낌의 표현, 등의 제목이 많습니다.
<인상Ⅲ-콘서트>, 음악회를 다녀와서 제작한 작품입니다. 아널드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을 듣고 그는 깊이 감동해서 작품까지 제작했지만 사실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은 지금 들어도 그다지 쉽지 않은 음악입니다. 12개 즉 다섯 개의 반음에 7개의 온음처럼 동등한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무조 음악이라고 하는데 조성에서 벗어난 음악입니다. 재현과 미메시스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감정을 전달하기에 충만한 추상도 대상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을 지니고 있죠. 쇤베르크와 칸딘스키는 그 일을 계기로 편지를 교류하는 친구사이가 됩니다. 시대를 앞서가는 이들의 우정이 시작된 거죠. 칸딘스키의 대상 없는 그림인 추상화와 쇤베르크의 조성을 벗어난 무조음악은 한 배를 탄 현대 예술로 수많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지금도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작품 중앙의 검은색을 피아노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으나 조금 각도를 달리하면 지휘를 하고 있는 지휘자의 머리처럼도 보입니다. 거꾸로 놓인 그림에서 감동을 하듯이 말이죠. 모든 추상화는 작가의 자유로움 뿐 아니라 관자의 자유로움도 허락하고 있습니다. 저 노란색은 정말 음악처럼 빈틈없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환호하고 있는 군중은 구상적이면서도 추상적인 형태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색은 피아노의 건반, 눈은 현을 때리는 해머, 영혼은 여러 개의 선율을 가진 피아노, 예술가는 건반을 눌러 연주하는 손으로 영혼의 떨림을 이끌어낸다.” 고 칸딘스키는 말했습니다. ‘내면의 진실’이 중요하다고도 했지요. 예술가들에게 오직 감정과 색상과 형태를 보는 것에 의지해 작품 활동을 하라고 권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설명을 해도 추상화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문득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생각이 나는군요. 주인공이 칸딘스키의 그림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칸딘스키의 작품을 매개로 범인을 알게 되는데 칸딘스키의 그림을 보고 한 사람이 묻죠. ‘아이가 그렸나요?’ 하긴 피카소도 평생 아이처럼 그리기를 소원했다고 하니 <아이>에 키가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별을 보면서 수십억 년 전의 빛으로 별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빛의 속도나 거리의 개념을 잘 모르는 탓일 거예요. 물론 어마어마한 시간의 개념도 여전히 제겐 추상이죠. 별도 무한한 추상으로 이해될듯 합니다. . 그런 면에서 본다면 추상은 비존재가 아니라는 논리가 성립되죠. 이 글을 제주도에서 쓰고 있는데 제주도 별은 우리 동네 별과도 다르네요. 칸딘스키의 인상이 들릴(?)듯한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