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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an 29. 2024

나의 올드 오크

켄로치

올드 오크라 해서 커다란 나무의 주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가르침뿐 아니라 위로를 주는 나무가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웬걸 올드 오크는 오래된 펍의 이름이다. 

거기다가 간판의 마지막 글자인 k가 흔들거리다 고개를 숙이고 

펍의 주인은 길다란 막대기를 가지고 와서 겨우 k를 반듯하게 만들어 놓는다. 

그러나 잠시후 다시 고개를 숙이는 k.

더 이상 어떻게 올드를 극명하게 나타낼 수 있겠는가,

영화를 보다보면 실제 그 펍이 

커다랗고 오래된 나무처럼 사람들이 모이고 

서늘한 그늘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일게 된다.

그러니 이름도 참, 잘지었어요. 켄~~~~ 

 

오래된 폐광촌, 

나이든 집을 비쌀 때 전 재산을 들여 집을 샀는데 

헐값으로 팔리고 있다며 분노하다가 동네가 이상해진다며 운다.

사십대 초반이던가 그때는 동네마다 반상회를 했다. 

반상회를 갔는데 까마득하게 나이들어보이시던 팔십대 할머니께서 

짒값 이야기를 하시며 눈물을 보이셨다. 

그 때만 해도 철이 없어선지 그 나이에 집값 때문에 운다는 것이 참으로 생경해 보였다.

저렇게는 안 늙어야지, 

그런 용감한 생각을 했던가.

팔십이 되고 구십이 되어도 그리고 백수가 되어가시는 울엄마를 봐도

사람에게 시간은 변화보다는 자신을 지키는 쪽으로 흐른다는 것을

그땐 알 수 없었다. 

노년은 사실 그렇다. 

모든 것을 함께 낡게 하는 

눈부시게 피어나 있는 벚꽃 아래 노년들이 주루룩 앉아있을 때 

그 벚꽃조차 노년의 체취가 시들어 보이게 한다는 것을 슬프게도 느꼈던 적이 있다. 

그렇다고 노년이나 가난 때문에 실패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실패자가 된 것은 한순간이었다.

켄 로치 감독은 실패의 원인을 보여준다. 

 

더럼이라는 쇠락한 거리에 시리아 난민들이 들어선다.

원주민들은 조롱하며 돌아가라며 소리친다. 

나도 난민들에 대한 시선이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이주민들이 와서 더 힘들어질텐데, 

우리들의 몫인데 저들이 누리질 않는가. 

하는 일도 없이 혜택만 받지 않는가. 

늙거나 가난하거나 

예전처럼 잘사는 삶이 아니어서 

누추한 삶이 되는 것은 아니다.

타자를 위한 시선으로 삶의 결이 나뉘어진다는 것을 

노감독은 정확하게 짚어내며 말없는 

그러나 장중한 웅변을 토해내는 것이다. 

실패자가 되어가는 그들을 감독은 명료하게 바라보면서도 

사람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따뜻함을 조금씩 끌어낸다. 

난민 소녀 야라와 펍의 주인 TJ 사이에 생겨난 우정이 그 도화선이다. 

그리고 밥, 

그들이 함께 하는 밥은 이미 밥이 아니라 관계며 친절이며 부드러움이다.

더 이상 아름다운 것이 무에 필요하랴, 

그 작은 것들은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은가. 

다가오는 이들~ 힘든 사람들, 갈곳 없는 사람들, 

나라를 잃고 가슴 아픈 사람들을 

품지 못할 때 비루한 실패자가 된다는 것을, 

멀리 나가서는 품지 못하더라도 

품에 들어오는 그 인연 조차 떼어내서는 안된 다는 것을, 

춥다.

겨울을 실감하고 있다.

연두는 이 한겨울에 어디쯤 오고 있을까, 

걷기도 싫고 

겨우 사람들과 만나 식사하고 커피 마시고 즐겁기도 하지만 

자연이 없으니 지루하기도 하다. 

따뜻한 남쪽 나라 제주도를 한참 뒤적이다가 

오래전에 봤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과 <지미스 홀>을 내리 봤다. 

시시한 새영화 보는것보다 검증된 오래전 영화가 좋다는 것을 

그리고 기억이 그리 치밀하지 못해서 그 역시 새로운 영화라는 것.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밑에 누군가가 적은 글 

‘가슴과 머리를 함께 흔들리게 하는 켄로치 ’

시대적 시간이 이어져서선지 

마치 형제같은 영화지만

보리밭이 가슴 아픈 비극으로 끝났다면 그래서 더 절절하게 가슴을 후벼 판 영화라면

지미스 홀은 여전히 그 상태인데도

약간의 미소가 지어지는, 

기다릴께요~~~ 손을 흔드는 모습은 얼마나 희망적인가

추방당하면서도 저절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이별이 아니던가. 

 

글을 읽으면 작가가 보이고 영화를 보면 감독이 보인다. 

켄로치의 영화를 보면 이분은 말 수 없는 선비님이시다.

(그 난장판 영화판에서 저 가녀린 몸과 목소리로 어떻게 버티시나) 

군더더기가 없고 사람의 감정을 휘몰아치게 하는 음악도 

그다지 사용하지 않는다. 

풍경이야 어쩔 수 없어도 

별로 풍경을 이용해서 사람의 감정을 상승시키려고 하지도 않는다. 

얼핏 수필처럼 단아하지만 

그 수많은 케릭터를 그렇게나 많이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니

어찌 단순한 구조의 수필에 빗대랴. 

 

<1,17일 개봉 

잊혀진 사람들과 시리아 난민들에 대한 이야기

두 공동체가 살아가는 법

정치적 선택으로 분열되고 적대감을 품게 된 것, (현재의 우리가 아닌가)

각자 처한 상황이 같다는 것을 인식

함께 먹을 때 단단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연대가 된다

자선활동이 아니라 서로 도움을 받는 것, 

결과와 상관없이 모두가 함께 나뉘어야 할것>

 

일목요연한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켄로치 감독의 영화 개봉에 대한 인사를 요약한것이다.  

해피뉴이어, 

그의 인사를 나는 내게 하는 인사로 여겼다. 

뭐 어떤가 내가 그를 좋아하는데....

내게만 하는 인사로 여기지도 않는데...... 

좋은 영화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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