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개월
주말이 되면 주아는 어김없이 묻는다. 오늘 신사와 아가씨 하냐고. 맞다. 그 신사와 아가씨. 주말 8시에 방영되는 드라마. 그 신사와 아가씨가 맞다. 별일 없으면 꼬박 챙겨보는 드라마인데 주아도 나 때문에 자주 보게 됐다. 이따금씩 토요일이 되면 신사와 아가씨 하는 날이라고 말한 걸 따라 하는 것이다.
드라마 제목뿐 아니라 주제곡도 따라 한다. 드라마 인기에 덩달아 주제곡도 인기인데 노래를 부른 가수가 무려 임영웅이다. 이문세 노래를 리메이크한 노래인데 제목은 ‘사랑은 늘 도망가’ 다. ‘눈물이 난다’로 애절하게 시작되는 이 노래 역시 드라마만큼 좋아하는 노래다. 노래를 들을 때면 주아도 덩달아 노래의 앞 소절과 중간중간 아는 가사를 따라 부른다.
주책바가지인 내가 장난기가 발동했다. 주아가 장난감 정리를 안 하거나 목욕을 하자고 해도 오지 않을 때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주아가 계속 말 안 들으니까. 아빠는 진짜..."
주아가 바라보면 그때 바로 신사와 아가씨 주제가 앞 소절을 부른다.
“눈물이 나안다”
그러면 주아는 웃으며 아빠 왜 신사와 아가씨 노래를 부르냐며 묻고 나는 상황이 재밌어서 더 크게 웃는다. 이후 툭하면 화난 척하며 눈물이 난다를 부르고 아픈 척하면서 주아가 바라보면 앞 소절을 부르고 깜짝 놀라는 체하며 노래를 부른다. 주아가 재미있어하니 나도 자꾸 하게 된다. 나만 하면 재미있을라고. 주아 요놈도 똑같이 따라 하기 시작했다. 화난 척, 아픈 척 , 놀란 척하면 먼저 노래를 선수 친다. 나는 그 귀여움을 만지고 싶어 볼때기를 잡아당긴다.
하지만 귀여운 건 딱 그때까지였다. 요 녀석이 이젠 장난과 진짜를 구분하지 못한다. 진짜 화를 내도 눈물이 난다고 하고 힘들다고 해도 눈물 타령을 한다. 한 번은 아내가 힘들다며 눈물을 글썽이는데 좋지도 않은 발음으로 감미롭게 눈물이 난다를 불렀다. 순간 나도 큰소리로 웃다 바로 입을 가렸다. 감미로움 뒤엔 정확한 발음으로 쏟아내는 아내의 따가운 훈육이 있었다. 그리고 그 훈육은 주아를 관통해 날카롭게 나를 향했다. 이게 다 나 때문이란다. 맨날 장난만 치니 따라 하는 거 아니 냔다. 아빠가 되서 이상한 것만 알려준단다. 진지한 구석이 하나도 없단다. 할말은 없다. 아이와 잘 논다고 아내에게 사랑받는 건 아닌갑다. 주아와 난 아내의 화가 풀리기 전 까지 사랑받기 글렀다.
눈물이 난다. 웃다가 나는 건지, 귀여워서 나는 건지, 신기해서 나는 건지, 화가 나서 나는 건지, 억울해서 나는 건지, 어이없어 나는 건지. 아무튼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