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개월 4일
대선이 한창때의 일이다. 대선 방송 연설을 보고 있는데 저 사람 왜 그래 하며 주아가 물었다. 무슨 말인가 싶어 화면을 보니 오른쪽 하단 동그라미 모양 안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수어 통역사였다. 연설자의 말을 손과 입모양, 표정으로 열심히 통역을 하고 있는 모습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저분은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들에게 로 시작해서 열심히 설명을 해줬다. 주아가 알아들었을까 싶어 지만 그래도 최대한 쉬운 단어로 알려줬다.
퇴근이 늦은 날, 주아는 이미 잠들었다. 내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아내는 쭉 내민 입술 위로 손가락을 편다. 갓 잠든 주아를 깨울까 봐, 집안의 평화가 깨질까 봐. 하루 일과를 나누던 중 아내가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각이 난 듯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주아가 낮에 나한테 설명해준 게 있는데 그게 뭔지 알아?”
궁금해하는 표정을 짓자 아내가 바로 말했다.
“나한테 수어를 설명했어.”
두 손을 막 휘젓더니 이게 뭔지 아냐며 손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알려줬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놀라서 어떻게 알았냐 물었고 주아는 아빠가 알려줬다고 했단다. 아내는 너무 신기했다고 한다. 자신도 한때 청각 장애인과 대화하고 싶어 수어에 관심이 많았었다고 한다. 제대로 배워보진 못했지만 아직도 관심은 있다고.
아내는 한 때 열망했지만 잠시 잊고 있었던 버킷 리스트를 발견했고 그걸 꿈꾸던 시절로 잠시 돌아갔다, 그땐 그랬었지 하며 입은 웃고 눈빛은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난 약간의 소름이 돋았다. 아내의 표정에 소름 돋은 건 절대 아니다. 내가 한번 말해줬을 뿐인데 그걸 다 기억하는 주아에게 소름이 돋았다. 아빠에게 장난치고 짜증내고 화내고 하자고 하면 안 한다고 반대말만 하던 녀석인데. 내 애기는 허투루 듣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아빠라고 이야기한 건 다 기억해주는 게 신기하고 놀라웠다.
그래 나도 아빤데, 주아에게 받는 아빠 대접이란 자동차 놀이를 할 때 경찰이 되는 것, 엄마랑은 몇 정거장을 걸으면서 아빠랑은 몇 걸음만 걷고는 안아줘야 하는 것. 매일 선물을 사 와야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내 말을 잘 듣고 기억해주는 걸 보면 그래 나도 아빠다.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고 기억해준다는 걸 몸소 체험했으니 이젠 좋은 말을 더 많이 해줘야겠다는 다짐도 하면서 세상 사는 이야기, 편견 없이 사람을 대하는 이야기, 자연을 보호해야 하는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할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그러다 소주잔을 부딪히며 정치가 어쩌니, 정책이 어쩌니. 대선 후보가 어쩌니 저쩌니하는 날도 금세 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