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arang Mar 31. 2023

아빠 몫

57개월 10일


“엄마, 누가 화장실 물 안 내렸어”.

화장실에서 주아가 바지를 내리다 말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아내는 주방에서 아침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나는 소파에 앉아 tv를 켤 참이었다. 아내는 오이를 썰며 큰 소리로 ‘엄만 아니야’ 하고 외쳤고 나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채널을 돌렸다. 주아는 멀뚱히 서서 변기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분위기로 봐서는 범인은 나였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거니와 평일이 아닌 주말에 그런 일이 생겼으니 말이다. 그리고 어느 집이든 어질거나 고장 내거나 더럽히는 일은 살림에 무딘 아빠의 몫 아니던가. 나는 그러든지 말든지 소파에 기대어 덜 깬 잠의 끝을 잡고 tv를 봤다.


그때 주아가 큰 소리로 말했다.

“ 엄마, 여기 와봐!”

아내는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손의 물기를 옷에 닦으며 화장실로, 나도 뭔 일 인가 싶어 화장실로 향했다. 우리 가족은 화장실 앞에 모였다.  주아는 우리 둘을 보고는 손가락으로 변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랑 아빠는 고추가 있어서 이거 안 쓰잖아”.

변기엔 변기 시트가 내려져 있었다. 아내와 난 동시에 ‘오, 이주아’ 하며 감탄했다. 범인은 엄마였다. 아내는 재빨리 변기 물을 내렸다. 그리고 주방으로 가면서 짜증을 섞어 몇 마디 했다.

“그냥 물 내리면 될 것을 뭘 따지고 있어. 아침부터. 바빠 죽겠는데. 따지는 건 꼭 지 아빠랑 똑같다니까.”

나는 예리한 관찰력이 날 닮았나 흐뭇해하던 중 그것보다는 따지는 걸 닮았다는 결론을 얻어맞았다. 아내 왈 안 좋은 건 다 날 닮았다.


아침을 먹으면서 그래도 관찰력은 날 닮은 건 아닌지, 내가 매번 앞뒤 사정을 묻는지 따져 볼 생각이다. 또르르... 주아가 변기 시트를 뒤로 젖히고 볼일을 보고 있다. 나는 물을 내리는지 안 내리는지 끝까지 지켜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