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토론 교육을 하는 강사이자 군복무 중인 아들을 둔 엄마입니다. 제가 속해있는 교육자원봉사센터 글쓰기 모임의 이번 주 글감이 '감사'입니다. 글을 써야겠는데 지난주부터 온통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가 대통령뿐이라 결국 감사의 대상을 당신으로 정했습니다. 뜬눈으로 새우던 밤, 군에 있는 아들 걱정에 타들어 가던 마음, 그로 인해 뒤흔들렸던 일상 때문에 참 힘들었던 며칠이었습니다. 할 수 있는 욕을 실컷 해도 해갈되지 않는 목마름, 잠을 자도 금세 쌓이는 피로, 뉴스를 놓지 못하는 불안감. 이것을 해소할 길을 저는 결국 당신에게서 찾기로 했습니다. 이 세상 많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해 준 당신께 감사드리기로 한 것입니다.
공부하고 토론하게 한 것. 감사합니다.
지난 토요일, 저는 국회의사당 앞에 가지 못했습니다. 그 시간에 매주 모여 토론하는 아이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업하던 중 아이들이 소란스러워졌습니다. 학급 단톡방마다 대통령 탄핵안 표결이 무산되었다는 소식으로 시끄럽다며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이제 중1인 학생들이 말입니다. 기말고사 성적이 떨어졌다고 걱정하고 게임 이야기만 하던 아이들의 입에서 탄핵, 정치, 국회의원, 집회 같은 단어들이 나왔습니다. "도대체 왜?"라고 질문했습니다.
법치국가에서 통치자가 반헌법적 행위를 해도, 국가와 국민을 혼란에 빠뜨렸어도, 어느 누구 하나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공부를 하자고 했습니다. 책을 읽고 토론하고, 법을 공부하자고 말입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상대를 탓하고만 앉아 있기보다는,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히 해내자고 했습니다. 탄핵안 표결이 국민의 힘 의원들의 퇴장으로 무산되었던 장면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와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동시에, 우리 사회에는 탄핵에 찬성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반대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으며, 그들도 주권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끼리 모여 끝도 없이 상대를 욕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됐는지 공부하고 토론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토론을 배우고 공부하자고 했습니다. 합법적인 방법으로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국회의원들이 찾아낼 것이며 국민들은 그들의 뒤에서 지금처럼 공부하고 토론하고 그들을 향해 외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요.
중학생들과 정치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게 해 줘서 감사드립니다. 누구를 만나도 정치를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된 것도 감사드립니다.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우리나라 정치의 문제 중 하나라고 여겼는데, 적어도 그 한 가지는 해결된 듯 보입니다. 상반되는 생각을 평화롭게 얘기할 수 있는 토론의 장은 아직 요원하지만, 적어도 "도대체 왜?"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게 되었으니, 그 또한 감사할 일입니다.
일상에 안주하지 않게 한 것. 감사합니다.
평범한 날이었습니다. 저는 여느 때처럼 밥을 먹고 식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회식이라며 술 한 잔 걸치고 있었고 큰 아들은 아르바이트 중이었으며 작은 아들은 생활관에서 취침에 들었을 시각이었습니다. 여기저기 톡방에서 올라오는 황당한 소식에 TV를 틀었습니다. 계엄 소식에 귀가한 온 식구가 밤새 뉴스만 들여다봤습니다. 다음날도 다음다음 날도 그랬습니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이 한순간에 사라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누렸던 일상이 한낱 신기루에 불과했을지 모른다는 허탈함과, 거저 얻어진 자유가 아니었는데 잊고 있었다는 미안함이 함께 몰려왔습니다. 얼마 전 읽었던 <작별하지 않는다>와 <소년이 온다>를 곁에 두었습니다. 또 읽어야지 마음먹었습니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탄 것이 절묘하게 여겨지더군요. 하필이면 올해 말입니다.
일상을 살다 보면 각종 재해를 마주하게 됩니다. 태풍, 홍수, 지진 등과 같은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은 속수무책이 됩니다. 자연 앞에서 오만했던 우리는 한없이 작아지지요. 피할 수 없던 일,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일이기에 하늘만 탓하게 됩니다. 천재지변으로 터전과 가족, 이웃을 잃은 이들을 보면 우리는 위로를 전하고 어떤 이들은 발 벗고 나서 손을 보탭니다.
똑같은 재해인데, 인간에 의한 재해 앞에서 우리는 더 절망하게 됩니다. 화재, 붕괴, 폭발, 침몰, 압사 사고. 입에 올리는 순간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차오르는 여러 사고가 떠오릅니다. 충분히 피할 수 있었고 누군가는 잘못했을 일이기에 하늘이 아닌 뚜렷한 대상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하늘을 탓하는 일보다 더 허무한 일이 되고 맙니다.
인간에 의한 재해가 또 발생했습니다. 이번에는 규모가 제법 큽니다. 일상이 흔들리고 공포와 두려움까지 더해졌습니다. 지금까지 누린 일상이 선배 어른들의 희생과 저항으로 지켜진 것이었으니, 앞으로 누릴 일상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 소중한 것은 악착같이 지켜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해 주어 감사합니다. 누군가는 광장으로 나가고, 누군가는 글을 쓰고, 누군가는 기도하는 이 시간을 갖게 해 준 것도 감사합니다.
끊임없이 질문하게 한 것. 감사합니다.
질문하지 않는 대한민국이었습니다. 2010년 G20 기자회견장에서 오바마 대통령에게 질문하지 않은 한국의 기자들 이야기가 꾸준히 회자됐던 이유는 그것이 비단 기자들만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2024년 12월의 대한민국은 변했습니다. 질문으로 가득 찼습니다. '도대체 왜?'에서 시작한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우리가 우선시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사랑일까, 공공의 이익일까, 법일까? 사랑이 세상 최고의 가치인가? 사랑은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가? 그게 사랑은 맞나? 권력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존재하는가? 그들은 왜 발길을 돌렸을까?
질문에 답을 주지 않아도 됩니다. 답을 듣겠다고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잠들어 있지 않다는 것, 숨만 쉬고 있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기억하고 있으며 기억할 것임을 맹세하는 선언입니다. 누군가는 1년이 지나면 국민 모두 잊어버릴 거라고 했다지요? 네. 우리는 어쩌면 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먹고사는 일에 매달리다 보면 어느새 이 겨울의 참혹함을 까맣게 잊겠지요. 하지만 여전히 묻는 일은 그만두지 않을 겁니다. 무슨 일이지? 누구의 잘못이지? 어떤 선택을 해야 하지? 도대체 왜 그러지?
축제로 이 겨울을 달군 것. 감사합니다.
광장에서 함께하지 못한 저는 광장에 모인 이들의 영상을 봅니다. 촛불 대신 아이돌 팬클럽 응원봉을 든 젊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촛불은 금방 꺼지는데 응원봉은 계속 불이 켜져 있기 때문이랍니다. 투쟁가 대신 '아파트'를 부르며 춤을 춥니다. 처절하지만 처연하지는 않습니다. 당차고 활기가 넘칩니다. 해학이 넘치는 민족이라 위기와 혼란 속에서도 흥을 잃지 않습니다. '불안해서 집에서 게임도 못하겠다'는 문구를 등에 붙이고 집회 현장에 노트북을 들고 와 게임을 하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내향인입니다', '전국 깃발 준비 못 한 사람 동호회', '전국 집에 누워있기 연합', '전국 뒤로 미루기 연합. 그러나 더는 미룰 수 없다' 같은 문구가 적힌 깃발을 보셨습니까? 수십만 명이 머물다 간 거리가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한 모습도 보셨지요? 춤추고 응원봉을 흔들며 집회현장을 축제의 장으로 바꾼 시민들의 마음이 결코 가볍지 않기에 가능했던 장면입니다.
아들이 군인이라 군마트를 이용할 수 있는데, 군마트에서 핫팩을 120개 사 가는 분을 보았습니다. 토요일에 있을 집회에 들고 가서 나눠주려고 한다더군요. 오늘 그런 이들이 많았다는 점원의 말도 들었습니다. 하마터면 당신 때문에 시민의 적이 될 수도 있었던 군인이 그려진 핫팩을, 그것도 군마트에서 사서 나누어주는 시민의 모습에 기분이 잠시 묘해졌습니다. 서로를 뜨겁게 달궈주는 이들이 이번 주말에도 많이 모인답니다. 촛불, 응원봉을 든 국민들이 한 곳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어 감사합니다.
미리 감사드립니다.
헌법적 가치를 지키는 이들이 결국 승리한다는 것, 성숙한 시민이 미성숙한 정치인들을 압도할 수 있다는 것, 역사는 더디지만 꾸준히 진보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어 감사합니다. 이런 글을 써도 잡혀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인 것이 자랑스럽고 기쁩니다. 그런 오늘을 만들어준 선배 어른들께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