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한 마리, 돼지 세 마리, 닭 360마리. 그들에게 보내는 미안함과 감사함의 진혼곡...
얘들아~
지난 수십 년간 너희들에게 제대로 된 감사인사와 미안한 마음을 전한 적이 없더구나. 디베이트 수업에서 '동물실험'이나 '가축의 대량 사육'등에 대해 토론할 때,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을 학생들에게 소개할 때, 인간이 얼마나 탐욕적으로 먹어대며 동물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는지 열성적으로 떠들어댔는데... 돌아서면 너희들로 어떤 요리를 할까 고민하는 내가 굉장히 위선적으로 여겨졌지. 그래도 어쩌겠니. 인간은 수렵채집 시절부터 생존을 위해 육식해온 것을... 채식주의를 옹호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이라고 믿는 나인 것을...
나의 큰 아이, 스무 살이 된 아이 하나를 온전히 키워낸 너희들, 소 한 마리와 돼지 세 마리, 닭 360마리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구나. 저 구체적인 숫자는 무어냐고? 지금부터 계산해보자.
불고기나 소고깃국, 장조림, 구이등의 다양한 형태로 자주 요리해주었던 소고기. 한 달에 1kg을 먹었다고 보고 1년이면 12kg, 유소아 시절은 양이 적으니 15년만 계산에 넣으면 총 180kg이더라. 소 한 마리를 도축하면 약 70%인 170kg, 263근의 고기가 나온다고 하니, 20년간 대략 한 마리 분량의 소고기를 먹은 셈이더라. 이보다 더 먹으면 더 먹었지 덜 먹지는 않았겠지만 말이야...
돼지는 한 마리 도축 시 55kg 정도의 고기가 나온다고 하는데, 일주일에 200g 정도로 계산하니 52주면 10킬로 정도 먹는 셈이더라. 1년에 10kg, 15년이면 150kg이니 세 마리가 좀 안되더라고.
닭은, 한 달에 치킨을 2마리 먹는다고 계산했어. 삼계탕이나 닭볶음탕, 닭갈비 등은 치킨만큼 자주 해 먹지 않았으니 치킨을 기준으로 했지. 1년이면 24마리이고 15년이면 360마리더라...
물론 이 계산들이 정확 할리는 없지만, 대략적인 수량화를 하니 이야기할 대상이 좀 더 명확해지는 효과가 있더군...
우리 아이는 유난히 너희를 좋아했어. 야채랑 김치는 고기만큼이나 잘 먹어서 다행이었지만 회나 해산물은 여전히 즐겨먹는 음식이 아니지. 그래서 미련한 나는 아이가 좋아하는 너희들로 냉장고를 꽉꽉 채워놨단다.
사골과 잡뼈를 사다가 핏물 빼고 꼬박 이틀간 끓여내는 사골국물. 김치만 있어도 든든한 한 끼를 챙겨줄 수 있었지. 얇게 썰린 고기를 사다가 배, 양파, 마늘을 갈아 간장, 설탕, 후추, 생강가루, 참기름으로 양념해 재워놓은 불고기. 바짝 구워줘도 좋고 육수를 부어 당면과 함께 국물처럼 해주어도 잘 먹었지. 볶음밥의 베이스로 쓸 수도 있었고 샌드위치에 햄 대신 넣어주면 별미였어. 대형마트에서 2킬로씩 포장해 놓은 호주산 등심이나 채끝 등은 올리브유, 후추, 로즈마리등으로 마리네이드 해두었어. 갑자기 고기 구워달라고 주문할 때, 해동하지 않고 구워도 부드러워졌거든. 차돌박이로는 꼬막덮밥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해 차돌덮밥을 만들어주었지. 데쳐서 기름을 뺀 차돌과 송송 썬 대파를 매콤 짭짤한 양념에 무쳐 밥을 덮고 그 위에 계란 프라이까지 얹어주면... 추루룹... 침 고이는 맛이지.
불고기 전골, 차돌덮밥, 소고기 볶음
계란찜 두른 부채살구이, 돈까스, 치킨가스
돼지 너는 더 자주 활용했어.
값싼 앞다리살을 사다가 제육볶음도 하고 통으로 사서 수육도 삶아줬지. 이건 물에 빠졌어도 잘만 먹더라. 등심을 사서 고기 망치로 두드려 얇게 편 뒤 소금, 후추, 생강가루 등으로 밑간을 하고 밀가루, 계란 푼 물, 빵가루를 묻혀 돈가스를 만들어두었어. 이게 아이 복부비만의 주범인 줄도 모르고 맛있다니까 쟁여놓고 튀겨줬지... 삼겹살, 목살, 항정살, 갈빗살 등을 부위별로 사다가 한번 구울 양으로 소분해놓으면 반찬 없을 때 그만이었지. 사골국과 같이 이것도 김치랑 멜젓만 있으면 밥 차리기가 수월했거든. 고기 한번 구우면 온 집안에 기름이 다 튀고 난리였지만 말이야. 돼지 등뼈를 사다 폭 고아서 시래기랑 섞고 통감자를 넣어 끓여주는 감자탕도 잘 먹었어. 사 먹는 감자탕 맛이 영 안나길래 다시다를 몰래 사다 넣어주니 감쪽같더라.
제육볶음, 수육, 돼지등심 스테이크
닭은, 역시 튀김, 그것도 시켜먹는 치킨이 최고였지만 집에서도 자주 해 먹는 식재료였어. 닭다리살만 사다가 고추장 양념을 발라 오븐에 구운 닭갈비나, 고구마, 양파, 양배추, 떡볶이 떡과 함께 버무려 팬에 볶아주는 닭갈비. 다 먹고 나서 볶음밥은 필수였지. 큼지막한 감자에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넣고 걸쭉하게 끓여 마지막에 깻잎까지 얹어주는 닭볶음탕은 국물에 밥을 쓱쓱 비벼먹으면 일품이었지. 복날이거나 허해 보일 때면 전복과 낙지를 함께 넣어 푹 끓여주었어. 보들보들하게 찢어지는 살들을 소금 후추에 찍어 먹고 국물에 찹쌀밥도 말아 씩씩하게 먹었지. 멀겋게 끓여낸 닭고기를 부추무침에 곁들여 먹고, 남은 국물에 칼국수와 죽을 차례대로 끓여먹는 닭 한 마리 칼국수. 물에 빠진 닭은 싫다면서도 특이하게 그건 좋아했지.
결론적으로 다 잘 먹었어.
닭다리 볶음탕, 전복낙지 삼계탕
다시 한번 고마워~
너희들 덕분에, 근육도 제대로 붙고 키도 180이 넘는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했단다. 너희들이 아니었으면 밥 달라고 끼니때마다 짹짹거리는 아이들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거야. 냉동실을 너희들로 꽉꽉 채워놔야 내 맘도 든든하고 아이들 속도 든든해졌으니... 큰 힘이 되었구나.
그리고, 미안해.
그 많은 양의 너희들을 요리하면서 한 번도 너희들 역시 언젠가는 살아있었던 존재로 인식하지 못했음을...
너희들도 누군가의 아이였음을 생각지 못하고 내 새끼 배 불리는 데만 급급했네... 남자아이들은 엄마랑 싸웠어도 끼니때 고기만 챙겨주면 게임 끝난다는 얘길 듣고 다른 방법은 찾아보지도 않았구나.
너희들의 마지막 순간을 더 많은 사진으로 예쁘게 남기지 못한 것도 미안해. 남자아이들 밥상의 생명은 양과 스피드라서, 상에 차려놓고 "밥 먹어라~"부르면서 얼른 한 장 찍는 게 다였거든.
사람은 주기적으로 남의 살을 먹어줘야 한다는 누군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것...
영화 '옥자'를 보거나 동물권 관련 다큐를 보며 울컥하면서도, 내가 손질하고 요리하는 너희들과는 다른 아이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