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육포 구워주면 안 될까?"
간 큰 남편은 주방 마감한 지 한참 된 부인에게, 드라마 보느라 정신없는 마누라에게 육포를 부탁한다. 눈을 흘기면서도 부엌 불을 켜고 냉동실에 꽁꽁 싸 둔 육포를 꺼낸다. 150도로 맞춘 미니오븐에 육포를 넣고 8분 정도 구워주면 고기에서 기름이 자글자글 나오고 손바닥 두 개만 한 긴 육포가 살짝 휘기 시작한다. 그러면 집게로 집어 꺼내 가위로 잘라 접시에 담는다. 결 반대로 툭툭 잘라주어도 좋고 결대로 길게 잘라주어도 좋다. 작은 아이는 길게 찢어서 먹는 걸 좋아하고 남편은 결 반대로 잘라 이에 부담 없이 먹는 걸 즐긴다. 이렇게 먹어도, 저렇게 먹어도,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우리 집 육포. 내가 만든 육포다.
10여 년 전 지인에게서 배우고 전통음식연구소 혼례음식 전문가 과정에서도 배운 육포는 나의 시그니쳐 메뉴가 되었다. 가족들 영양간식, 수험생의 기력 보충 음식이자 지인들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하고 지인이 지인에게 선물하기 위해 내게 주문하는 제품이기도 하다. 만드는 과정도 복잡하고 시간도 많이 들기에 나에게 "그거 어떻게 만들어? 가르쳐 줘~"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 내가 생각해도 사 먹는 게 싸다 싶은... 그런 음식이다. 파는 데가 없다는 것이 문제... 그러니 만들 수밖에...
재료 구입시점부터 따지면 닷새, 재료가 모두 준비된 시점부터는 꼬박 이틀이 걸린다.
길이 25~30cm, 폭 7~10cm, 두께 0.7cm의 홍두깨나 우둔살을 준비한다. 육포용으로 준비해 파는 곳이 흔치 않아 고정된 공급처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고기는 기름기가 적은 호주산이나 뉴질랜드산으로 주문하는데, 한우나 육우는 기름기가 많지만 만들어놓으면 꼬숩기는 하다. 호주산이 비싸져서 한우, 육우와 가격차이도 많이 안나지만 양념 맛을 잘 머금고 육포다운 모습을 갖추기에는 호주산이 낫다.
냉동상태에서 썰어오기 때문에 배송받은 고기는 자연해동에 들어간다. 실온에서 자연스럽게 녹고 나면 하나하나 떼어 큰 스텐 대야에 차곡차곡 쌓는다. 쌓을 때는 한켜마다 청주와 설탕을 넣어주는데 핏물과 잡내를 빼주기 위함이다. 몇 시간 후 붉은 물이 대야 가득 차오르면 이제는 채반으로 옮겨 담아 1차로 물기를 제거한다. 이과정에서도 한꺼번에 옮겨 닮지 않는다. 하나하나 반씩 접어 고기 결대로 물이 잘 떨어지게 줄 세워 놓는다. 한 시간 정도 지나면 웬만한 물기는 거의 제거되어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기가 품은 모든 수분이 제거된 것이 아니기에 2차 수분 제거작업을 거쳐야 한다.
2차 수분 제거를 위해서는 깨끗한 신문과 종이타월(혹은 면포)이 필요하다. 불고기를 하거나 다진 고기로 요리를 할 때 키친타월에 올려 핏물을 닦아내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다만 양이 많다 보니 다른 방법을 쓰는 것. 신문 여러 장을 바닥에 펼쳐놓고 그 위에 종이타월을 몇 겹 깐다. 1차 수분 제거한 고기들을 가지런히 뉘어놓고 다시 종이타월 몇 겹, 신문 여러 장, 그위에 다시 종이타월, 고기, 종이타월, 신문.... 이렇게 고기가 모두 자리 잡을 때까지 쌓아 올린다. 차곡차곡 신문과 종이타월 싸이에 고기가 자리 잡으면 이제 그 위에 올라가 지근지근 밟아준다. 밟아주는 게 힘들면 사각 교자상을 올려놓는다. 무게와 압력으로 잔여 핏물과 수분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한 시간 정도 제거 작업을 하고서 다시 스텐 대야에 옮겨 담는다. 수분을 쪽 뺐으니 그 빈자리를 양념물이 채워줄 시간이다.
양념물은 고기가 해동되는 동안 준비해야 한다. 고기 수분이 다 빠진 후 그제야 양념을 준비하면 고기가 상온에 방치되는 시간이 많아져 맛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배, 양파, 파, 마늘, 생강, 통후추, 마른 고추 등의 과일, 야채와 물, 청주를 넣고 한참을 푹 끓인다. 모든 재료가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끓이고 나서 물만 남기고 모두 건져낸다. 야채물에 간장, 설탕, 꿀을 넣어주고 후루룩 한번 끓여 식히면 양념물 준비 완료. 사실, 이게 '맛간장'이라고 불리는 바로 그 양념물이다.
차갑게 식힌 양념물과 수분을 쪽 뺀 고기가 이제 합방할 차례다. 둘을 붙여만 놓는다고 양념물이 스며들지는 않는다. 한 시간 동안 이 둘이 친해지도록 어르고 달래듯 계속해서 버무려줘야 한다. 팔이 아프고 다리가 저리다. 4리터 가까이 되는 양념물이 도대체 줄어들기는 할까 의심이 되더라도 묵묵히 위, 아래, 좌, 우 골고루 섞어준다. 그러다 보면 신기하게도 어느새 양념과 한 몸이 된 고기가 눈앞에 드러난다.
양념물을 머금은 고기를 이제 말리면 되느냐? 아니다. 이제 깨끗한 플라스틱 통에 차곡차곡 담아 냉장고에서 숙성을 시킨다. 바로 말리면 양념과 고기 맛이 따로 놀기 때문이다. 반나절 정도 숙성된 고기는 이제 건조실로 이동한다. 일반 가정집에 건조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을 리는 만무하고, 양이 많다 보니 식품 건조기로는 감당이 안된다. 그래서 육포를 말릴 때는 평소 아이들의 컴퓨터실로 사용하는 방 하나를 활용한다. 주중 게임금지 규칙이 있으니 아이들에게 방해될 것 없고 사람의 왕래가 없는 방이니 먼지나 오염에 대한 걱정도 덜하다. 건조를 하기 전에는 방 대청소를 해야 한다. 먼지 제거와 걸레질까지 말끔히 마친 방에 층층이 스텐 채반을 쌓고 고기를 하나하나 정성껏 놓아준다. 내내 쪼그리고 앉아하는 작업이라 무릎도 아프고 허리도 끊어질 것 같지만... 어쩌랴... 더 편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찾지 못했으니... 한 번에 15kg의 고기를 준비하니 60cmX40cm의 씨팬망이 13개 정도 필요하다. 망 하나하나 고기를 촘촘히, 가지런히, 평평하게 놓은 후 쌓아놓는다. 쌓아놓은 채반탑 한쪽에는 깨끗이 닦아놓은 선풍기, 반대편에는 제습기를 틀어놓고 24시간을 말린다. 말리기 시작한 지 12시간 정도 되었을 때는 고기를 하나하나 망에서 떼어내 뒤집어 주어야 한다. 자칫 시간을 놓치면 망에 달라붙어 죄다 찢어지고 한쪽은 바짝 말랐는데 한쪽은 덜 마른 상태가 되어버린다.
이제, 끝이 보인다. 완전 바짝 마르지도 덜 마르지도 않은, 적절히 마른 고기, 아니 이제 엄연히 육포가 된 아이들을 열 장 정도씩 겹쳐 랩으로 돌돌 만다. 다시 비닐로 꽁꽁 싸서 냉동실에 넣어둔다. 마르고 나서 바로 먹으면 2% 부족한 육포 느낌이 난다. 냉동실에 넣어 2차 숙성을 거쳐야 비로소 맛있는 육포가 탄생하는 것이다.
헥헥...
설명만으로도 이렇게 긴데 직접 만드는 데는 얼마나 더 오랜 시간과 지난한 노동이 들어가겠는가. 그 정성을 하늘이 아셨는지, 내가 만든 육포를 드신 분들은 하나같이 좋은 피드백만 주셨다. (물론, 맛없으면 맛없다고 말하겠는가마는...)
맛있다, 이거 먹고부터 다른 육포는 못 먹는다, 어떻게 짜지도 않고 자극적이지도 않느냐...
가장 기억에 남는 말씀은, 암투병중이신 시어머니를 위해 육포를 주문하셨던 분이었다. 수술 후 아무것도 못 드시고 드신 게 없으시니 기력도 너무 쇠하셔서 걱정인데, 혹시 모르니 육포라도 드려봐야겠다고 하셨다. 며칠 후 주신 연락에서 "아무것도 못 드셨었는데 이건 너무 잘 드셔요~ 구워서 잘게 잘라드리니 입에서 오물오물 불려 드시고 덕분에 기운도 많이 차리셨어요~"라며 연신 감사해하셨다. 수십 시간의 노동이 헛되지 않았음을 되돌려주는 한마디...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면 까마득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만들어두게 되는 이유.
언젠가, 요식업을 하시는 지인이 육포 사업을 권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등산로 입구에서 육포집을 해보세요~ 핵전쟁이 와도 썩지 않을 만큼 방부제 팍팍 뿌려서!"
며칠만 실온에 놔두어도 곰팡이가 피어버리는 내 육포의 문제점을 얘기하시며 농담 삼아하신 말씀이셨지만, 그럴 일은 없다. 하늘에 닿을 만큼 정성을 쏟다가 마지막에 방부제를 칙칙 뿌리는 순간, 하늘이 썩은 동아줄을 내려주시기라도 한다면? 시중에 파는 육포와 다를게 무어란 말인가...
주방일을 마치고 드라마를 보다가도 남편이나 아이들이 먹고 싶다고 하면 귀찮음을 무릅쓰고 육포를 굽는다. "먹고 싶은 사람들이 궈먹어!"하고 싶지만 정성스럽게 만든 육포니 대접할 때도 정성을 들여야 한다. 그토록 정성을 들인 것이 남을 위함이 아니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못하는 마음... 그걸 알랑가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