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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May 22. 2020

전, 전 담당입니다.

제사 전날이면 어김없이 걸려오는 어머님의 전화.

"에고야... 너 힘든데... 반찬가게에서 사면될 것을... 정 그러면 그냥 딱 두 접시 거리만 해오누~."

결혼짬에서 나온 여유로 이제는 어머님의 며느리 사랑이 느껴지는 말이기도 하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그러려니 하는 말씀이 되었지만 그 말이 그리 싫던 시절이 있었다. 제사와 차례 때마다 어김없이 전은 내 몫이었는데 뭘 새삼스레 저러시나 싶었던 것이다. '어머님 말씀대로 이번엔 반찬가게에서 사볼까?' 싶다가도 나 역시 썩 내키지 않아 그만두었었다. 


새색시 시절, 제삿날 아침이나 명절 전날 시댁으로 출근을 하면 어머님이 장 봐오신 것들 중 전거리들만 골라내서 재료를 손질하고 밑간을 한다. 시댁의 전은 간단했다. 동태전, 버섯전, 새우전이었는데 모두 재료 원물 그대로에 밀가루와 계란물을 묻혀 부쳐내기만 하면 됐다. 

해동하고 물을 뺀 동태와 살짝 데쳐 꼭 짠 느타리버섯에 소금 후추로 간을 한다. 새우는 껍질을 벗기고 내장을 제거한 뒤 반 갈라 밑간을 한다. 동태와 새우에 밀가루를 묻히고 계란물에 담갔다 빼 기름을 넉넉히 두른 팬에서 부쳐내면 끝! 버섯에 송송 썬 쪽파와 밀가루, 계란을 한데 넣어 버무려 부쳐내면 끝! 간혹 녹두전을 부치기도 했는데, 갈아놓은 녹두에 김치만 조금 넣고 부쳤다. 시댁의 전은 이렇게 원재료의 맛을 살린 깔끔한 전이었다.

친정의 전은 복잡하고 인력이 많이 필요했다. 동태전, 깻잎전, 꼬치전, 녹두전을 주로 했는데, 모든 재료 준비는 어머니가 하셨다. 나와 동생, 사촌동생들까지 여자 넷이 대기하고 있으면 준비된 전거리들이 속속 도착한다. 동태를 제외한 나머지 전들은 만들기가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다진 돼지고기에 다진 파, 마늘, 당근, 양파, 소금, 후추, 참기름을 넣어 한참을 치댄 후 깻잎에 납작하게 넣고 모양을 만든 깻잎전. 맛살, 버섯, 쪽파, 소고기, 데친 당근 등을 이쑤시개처럼 생긴 꽂이에 꽂고 소금 후추를 뿌려 준비하는 꼬치전. 하루를 담가 껍질을 벗기고 돌을 걸러낸 녹두를 소량의 물만 부어가며 곱게 갈고 거기에 고사리, 숙주, 김치, 파, 마늘, 돼지고기 등을 넣고 간을 해 잘 버무려 놓는 녹두전. 어머니와 준비조들이 모양을 만들고 밀가루를 묻혀 부침조에게 넘기면 계란물을 입혀 부쳐냈다. 전기팬과 휴대용 가스레인지 프라이팬 두 군데서 두 명의 부침조들은 일사불란하게 전을 부쳤다. 녹두전을 부칠 때는 작은 어머니께서 등판하셨는데,  부서지지 않게 뒤집어 부쳐내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의 종류는 달랐어도 양가 모두 전을 부치는 날은 시끌벅적했다. 

연년생 남자아이들이 오며 가며 전을 집어먹고 시이모님이 옆에서 훈수를 두셨으며 형님, 시누, 아주버님 등 모두 모이면 상을 두 번 차려야 하는 대식구였다. 친정도 큰집인 우리 식구와 작은아버지 댁, 고모댁까지 하면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당연히 부쳐야 하는 전의 양도 많았다. 친정어머니는 집에 가는 가족들에게 싸줄 전까지를 계산해 재료를 준비하셨으니 전 부치는데만 온종일이 걸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모이는 식구들이 줄어들었고 함께 모여 전부치는 일도 버거운 일이 되었다. 친정집은 각자 맡은 음식을 준비해 들고 오기로 하면서 내가 전을 맡게 되었고, 시댁 역시 외며느리인 내가 전을 준비해야 했다. 어머니와 시어머님이 전부치기의 총사령관이었던 시절에서 내가 총책임자가 되던 순간이 된 것. 내 맘대로 내가 하고 싶은 전을 내가 원하는 양만큼만 해가면 되는 것이었다. 


동태전, 깻잎전, 새우전이 기본 라인업이고 그때그때 오징어 부추전이나 친정식 녹두전, 호박 가운데를 동그랗게 도려내고 다진 새우살을 채워 넣은 호박 새우전, 육전 등을 해간다. 가스레인지 두구를 이용해 지름 30cm의 프라이팬 두 개를 이용해가며 후딱 부쳐내는 게 포인트... 최대 두 시간을 넘기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스피디하게 끝낸다. 가족들과 함께 맛있게 먹을 생각에 흥이 나는 전 부치기가 아니라 빨리 해치워야 하는 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러니, 가족들이 별로 오지 않는 제사를 꼭 지내야 하나 하는 반항심까지 스멀스멀 올라왔고 어머님의 '상에 놓을 두 접시 거리만 해오누'라는 소리가 곱게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여든이 넘으신 어머님은 여전히 어머님의 시아버님과 시어머님 기일을 챙기신다. 돌아가신 지 70년 되셔서 어머님조차 얼굴을 모르는 시아버지 기일쯤은 내려놓으셔도 될 것 같건만, 몇 년 전부터 말씀뿐이시다. 정작 기일이 다가오면 "가족들 모여서 밥이라도 먹자고 하는 거지..."라시며 장을 보신다. 그러다가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작은 아들 내외만 덩그러니 둘러앉게 되면 현실을 자각하시고는 "이제 하지 말아야겠다. 그렇지? 아무도 안 오는데 그만 해야겠지? 너도 전 부치느라 힘든데..."라고 쓸쓸히 말씀하신다. 

그런 모습을 보자니 이젠 내 맘이 변한다. '전 그까짓 게 뭐라고... 두 시간 바짝 부치면 되는걸... 앞으로 하면 얼마나 더 부치겠어... 어머님이 이리 건강하셔서 함께 식사를 하실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겠어...'


친정은 몇 년 전 모든 제사와 차례를 없앴다. 붓펜으로 정성 들여 지방과 축문을 쓰시고 형식과 절차를 철저히 지키시던 아버지였지만 "모든 게 허례허식이다."라시며 음식 준비로 지친 어머니를 배려해 결단을 내리셨다. 마지막 제사를 지내던 날 오열하시던 어머니를 보면서도, 속없던 나는 '이제 전 안 부쳐도 된다!'라며 후련해했었다. 그런데 명절이 되면, 전 한 접시도 없이 식사를 하실 부모님이 맘에 걸려 시댁에 들고 갈 전을 준비할 때 조금 넉넉하게 부친다. 이래저래 헤어 나올 수 없는 전 담당 이건만 왜 그리 투덜댔는지 모를 대목이다. 


넉넉히 두른 기름 위에 계란물을 입힌 재료들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촤아악~~~~"소리가 나며 튀겨지듯 주변부의 계란이 부풀어 오르고 맛있는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한다. 밑면이 다 익었다 싶을 때 또 조심스레 뒤집어 골고루 익혀준다. 노릇노릇하게 잘 익은 전을 건져 대나무 채반에 줄 맞춰 종류별로 놓는다. 상에 오르기 전까지 손대면 안 되건만 꼭 아이들과 남자들은 지나가며 맨손으로 하나씩 집어먹는다. 안된다며 제지시키는 나와 따뜻할 때 실컷 먹으라는 어머님. 이때다 싶어 같이 집어먹어보는 나. 뜨끈한 기름이 아직 묻어있는 전은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이제 이런 풍경은 사라진 지 오래다. 나 혼자 후다닥 만들어 구색 맞추듯 상에 올리고, 남으면 냉장고에서 며칠을 뒹굴게 되는 게 전이다. 그래서 안 하고 싶고 한 접시 사버리고 말지 싶지만, 오지도 않을 식구들을 생각하며 물김치를 담그고 고기를 재고 탕국을 끓이실 어머님을 생각하면 나 역시 손을 놓을 수가 없다. 

그래서 여전히 난...

여전히 전... 전 담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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