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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May 18. 2020

둘도 없는 오지랖녀의 쑥개떡

"하나, 둘, 셋,.... 쉰 하나, 쉰둘. 이제 하나만 더 싸면 되겠네."

중학생 딸의 수학여행을 위해 밤을 꼴딱 새우며 엄마가 만든 것은 반 아이들 수만큼의 간식이었다. 요즘 아이들이 생각하는, 한껏 멋 부린 샌드위치나 손가락 한마디만 한 미니핫도그, 씨가 없어 먹기 편한 포도, 치즈로 눈을 만들어 붙인 비엔나소시지 등이 들어있는 세련된 도시락이 아니었다. 30년 전, 한 반에 50여 명 되는 아이들을 위해 엄마가 준비한 것은 쑥개떡 세 쪽씩이 들어있는 비닐봉지였다. 부엌 한쪽에서는 떡을 빚어 찌고 식히고 기름 발라 포장을 했고 또 한쪽에서는 감자고로케에 오이선 같은, 평소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로 선생님 도시락을 싸고 있었다. 늘어지게 자고 나온 중2 딸은, 반장인 딸을 위해 밤새 고생한 엄마의 노고보다 '애들이 떡을 먹겠어? 아 쪽팔려...'라는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이제는 당시의 창피함보다 고마움으로 기억되는 엄마의 쑥개떡...


쌀가루와 봄에 캔 쑥만 있다면 언제든 간단하게 만들 수 있으며 자극적인 첫맛은 아니지만 계속 집어먹게 되는 마성의 떡이다.  나 역시, '떡ㆍ한과 1급 자격증'을 갖췄다고 엄마한테 잘난 척까지 하며  자주 만들곤 했던 떡이다.

"쑥개떡이 아니라 쑥갠떡이래!"라며 아는 척도 하고 떡도장을 찍거나 나뭇잎 모양으로 만드는 기교도 부렸더랬다. 그러면 엄마는

"어머~~ 역시 떡선생님이 만든 건 다르네~~"라시며 나를 치켜주기 바빴다. 쑥개떡이라면 눈감고도 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쌀가루에 쑥가루를 섞거나 얼려두었던 쑥을 갈아 반죽을 한다. 전통음식연구소에서 배운 대로 '귓불 정도의 말랑함'이 맞춰질 때까지 물을 조금씩 추가한다. 반죽을 조금씩 떼어내 모양을 만들고 물이 끓을 때 찜기를 올려 25분 정도 찐다. 다 찐 떡은 차가운 물로 샤워를 시키고 참기름을 발라주면 끝. 나의 쑥개떡은 이리도 간단하다.


딸의 수학여행 이후로도 엄마는 쑥개떡을 자주 하셨는데, 엄마의 쑥개떡은 장기 프로젝트다.

봄이 오면 친구들과 쑥을 캐러 들로 산으로 나간다. 미세먼지와 농약 때문에 아무데서나 쑥을 뜯으면 안 된다고 딸들이 잔소리를 늘어놓으면, "농약 안 뿌리는 데서 깨끗한 것만 뜯어~"라며 몰래몰래 뜯어온다. 깨끗이 손질하고 씻은 쑥을 데쳐 한번 쓸 만큼 소분해 냉동실에 얼려놓는다. 쌀가루만 준비되면 언제든 떡을 빚을 수 있다. 묵은쌀이 많을 때는 쌀과 데친 쑥을 방앗간에 가져가 함께 쪄온다. 그러면 더 곱고 깊은 빛깔의 떡을 만들 수 있다.

반죽은 반드시 뜨거운 물로 한다.

"익반죽은 반죽 쉬우라고 하는 거야. 원래는 날반죽이 맛있는 거래."라며 떡 선생인 딸이 말해주었지만 어려서부터 익반죽이 익숙하다. 오래도록 치댄 반죽으로 둥글넓적하게 모양을 만든다. 중간중간 떡이 익었나 떼어먹어가며 찌고 나서 한 김 식힌다. 아직 뜨거운 떡에 참기름을 맨손으로 발라가며 하나하나 큰 쟁반에 옮겨 담는다. 머릿속으로 떡을 돌릴 이들을 생각해본다.

'앞집 애기 엄마, 며칠 전 과일을 사 온 남편 친구, 건너 아파트에 사는 작은딸, 이마트에서 맥심커피를 판매하는 이.... 그렇게 나눠주고 남으면 냉동실에 얼려두었다가 남편 아침으로도 주고 먹고 싶을 때 꺼내 먹어야지...'


"도대체 이마트 맥심커피 파는 아줌마한테는 왜 갖다 주는 거야? 친해?"라고 물어보면,

"행사할 때 내가 몇 박스씩 사잖아~ 그럼 꼭 낱개로 몇 개씩 더 챙겨줘~ 친해졌지~"라고 답하는 엄마.

"맥심커피는 왜 몇 박스씩 사? 엄마는 믹스커피 먹지도 않잖아."

"미장원 원장도 가져다주고, OO이 아줌마도 주려고~. 파마할 때 꼭 뭘 하나씩 챙겨줘~ 매실액도 주고... 맨날 얻어먹을 수 있나~ OO이 아줌마 믹스커피를 좋아해~쌀 때 하나씩 사다주면 좋지 뭐~"

그저 본인 먹자고 떡을 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하나를 받으면 둘로 갚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상대가 내게 맘을 쓰면 불편해하면서 자신이 맘을 쓰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본인이 떠는 오지랖의 넓이와 깊이만큼 혼자 상처 받고 혼자 우울해하고 혼자 외로운 사람... 우리 엄마.


더 이상 엄마 앞에서 쑥개떡에 관해서는 잘난 체하지 않으려 한다.

'귓불처럼 말랑한' 반죽은 물의 양으로 맞추는 것이 아니라 받는 사람을 생각하며 쉼 없이 치대야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엄마의 쑥개떡은 레시피를 보며 저울에 계량을 하고 정확히 계산을 해가며 만드는 떡이 아니다. 그저 상대를 챙겨주고픈 마음 하나만으로 앞뒤 재지 않고 만드는 떡이다. 그렇게 만든 떡으로 자신을 스친 모든 인연 하나하나를 잊지 않고 챙기는, 세상에 둘도 없는 오지랖녀의 따뜻한 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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