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오후 3시...
구진하고 입이 심심할 때...
팥시루떡에 따뜻한 커피 한잔... 생각만 해도 멋진 조합이다. 시루떡 사이에 달큼한 호박고지라도 들어있다면 맛은 배가된다. 그 맛난걸 처음 만들기 시작한 건 10여 년 전 남편 때문이었다.
자동차 영업을 하고 있던 남편은 신차를 출고하는 고객님에게 드릴 선물을 늘 고민했다. 남들 다하는 뻔한 선물보다는 의미 있는 것을 물색하던 중, 마침 전통음식연구소에서 떡 전문가 과정을 밟고 있던 내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작은 시루에 떡을 해서 선물하면 어떨까? 했던 것... 지름 20cm 되는 아담한 시루에 팥시루떡을 세켜로 찌고 한지로 덮어 지끈으로 묶는다. 고급스러운 보자기로 포장까지 하고 나면 세상 하나뿐인 정성스러운 선물이 완성된다. 새 차를 사면 떡과 북어, 막걸리를 두고 고사를 지내시던 부모님에게서 연상된 선물이었다. 샤머니즘 성격이 강한 이 선물이 거북스럽지 않을까 고민도 했지만 '안전을 기원하는 떡'이라는 정도의 의미부여만 한다면 문제 될 것 없어 보였다. 다행히 고객들은 모두 감동하셨고 주변 영업사원들도 주문하고 싶어 할 정도였다. 시루와 보자기, 국산 팥 등 원가만 해도 몇만 원이라 판매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덕분에 남편만의 시그니처 선물이 되었다.
내가 만든 떡이 귀한 대접을 받는 경험은 언제나, 당연히 기분 좋다.
동생이 함 받던 날, 친정집이 인테리어를 하고 새로 짐을 들이던 날, 동네 지인이 새 차를 뽑은 날, 내가 운영한 치킨집과 교습소가 오픈한 날... 나와 지인들이 새로운 시작을 경건하게 받아들이는데 내가 만든 시루떡이 한몫을 했다는 뿌듯함이 컸다. 그 맛에 취해 누가 부탁하지 않아도 알아서 떡을 준비하는 정성을 쏟고는 했다.
익숙해지면 별거 아니지만 단순한 과정은 아니다.
먼저, 벌레 먹지 않은 통통하고 윤기 나는 팥을 골라 물에 깨끗이 씻는다. 찬물 담긴 냄비에 팥을 넣어 부르르 끓어 붉은 물이 빠져나오면 체에 받혀 물기를 뺀다. 이래야 팥의 사포닌 성분이 빠져나와 씁쓸한 맛이 없어진다. 다시 찬물을 넉넉히 부어 끓이기 시작하는데 팥이 잘 익을 때까지 삶으면 된다. 여러 번 하다 보니 적당한 물을 넣고 압력솥에 빨리하게 됐다. 다 익은 팥을 큰 스텐볼에 넣고 까분다. 뜨거운 한 김을 날리기 위함이다. 일정량의 소금을 넣어 간을 맞추어 몇 번 더 까불고 나서 절구로 쪄준다. 너무 곱지 않게, 통팥이 군데군데 남아있을 때까지 찌고 나서 고슬고슬해질 때까지 식혀주면 팥 준비는 끝이다.
이제 쌀가루 차례. 거짓말 조금 보태 백번 씻은 멥쌀과 찹쌀을 물에 불린다. 계절과 쌀의 상태에 따라 시간을 달리하지만 보통 8시간 정도. 잘 불린 쌀의 물기를 빼서 방앗간에 갖고 가 곱게 빻아온다. 단골이 된 떡집 사장님 덕에 소금간이 잘 맞았다. 작은 시루에는 쌀가루 7컵이 들어가면 딱 보기 좋은 세켜의 시루떡이 된다. 멥쌀가루와 찹쌀가루를 반반씩 준비해 적당량의 물과 잘 섞어준다. 수분을 머금어야 떡이 맛있게 잘 익기 때문이다. 물 주기가 끝난 쌀가루는 고운체에 내려준다. 중간중간 공기를 머금어 떡이 포실포실 잘 쪄지기 위함이다. 체에 내리는 일이 팔도 많이 아프고 수고스럽지만 가장 중요한 공정인 이유다. 마지막으로 설탕을 섞어 두 손으로 조심스레 섞어주면 쌀가루도 준비 끝.
이제, 미리 물에 담가 수분을 머금게 한 시루를 준비한다. 값싼 시루를 사용하면 흙가루가 떨어지거나 좋지 않은 냄새가 난다. 귀한 선물에 아무 시루나 쓸 수없으니 '명장'이라고 이름 붙은 시루를 한 번에 스무 개씩 대량 주문해서 사용했다. 동그랗게 자른 종이 포일을 시루 바닥에 깔고 '팥-쌀가루 1컵 반-팥-쌀가루 2컵 반-팥-쌀가루 3컵-팥'의 순서로 담아준다. 위로 갈수록 넓어지기 때문에 층마다 쌀가루 양을 달리해야 완성됐을 때 고른 높이의 떡이 된다.
이렇게 준비된 시루는 지름이 16cm 되고 속은 깊은 냄비에 물을 반쯤 넣고 그 위에 올린다. 밀가루로 만든 시루본을 시루와 냄비 사이에 꼼꼼히 붙여 김이 새지 않도록 하고 시루 위에는 면보를 덮어 단단히 고정해준다. 면보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 후 25분 정도 쪄주면 팥향이 은은히 피어나는 팥시루떡이 완성된다.
재료 준비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고 완성되기까지 중요하지 않은 단계가 없다. 물주기가 적당하지 않으면 설익거나 질어질 수 있다. 쌀가루를 생각 없이 넣다 보면 각 층의 높이가 제각각인 볼품없는 떡이 될 수도 있다. 시루본을 제대로 붙이지 않으면 여기저기 김이 새서 한나절이 돼도 떡이 익지 않을 수 있고, 한참을 끓이다 보면 물의 양이 부족해 냄비가 탈 수 있다. 떡 하는 이의 온갖 정성부터가 고사의 시작임을 알 수 있다.
언젠가 한 번은 시루떡 때문에 입이 바짝바짝 타던 일이 있었다.
대학 선배 한분이 개업을 하신다며 내게 시루떡을 주문하셨다. 제법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셨는지 큰 시루 두 개를 주문하셨다. 떡 주문을 받으면 으레 시간 계산부터 한다. 온전히 떡을 만드는 시간에 포장하는 시간을 더하고 거리가 멀다면 배송하는 시간까지를 더한다. 거기에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를 더 추가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여분의 준비시간을 마련한다.
그날도 여유롭게 떡을 준비하고 이제 찌기만 하면 되던 찰나, 둘이서 잘 놓고 있던 아들 녀석 중 큰아이의 우는 소리가 갑자기 들렸다. 달려가 보니 작은 아이가 흔들던 게임기에 맞아 큰아이의 앞니 절반이 부러져 피가 철철 나고 있었다. 가스레인지에 떡은 올려놓았는데 아이의 상황은 심각해 보이고, 시간은 없고... 약한 불로 가스를 줄여놓고 아이를 데리고 가까운 치과로 가서 응급조치를 했다. 영구치였으니 주기적인 관리를 해줘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기억한 게 신기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와 다시 가스불을 올리고 겨우겨우 시간을 맞춰 퀵 서비스로 떡을 보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퀵이 말썽이었다. 운전이나 하실 수 있으실까 싶던 할아버지셨는데, 아니나 다를까 길을 헤매신 나머지 약속된 시간이 한 시간 지나서야 배송을 하신 것... 이래저래 진땀을 뺐던 기억이다. 다행히 모든 상황에 대해 양해를 해주셔서 잘 넘어갔지만, 고사떡이 설익으면 좋지 못한 징조라던 엄마 말씀처럼 하필 고사떡을 준비하던 와중에 아이에게 사고가 나고 매끄럽지 못했던 상황들이 맘에 걸렸다. 행여나 벌이신 사업이 잘 안되면 어쩌나, 무슨 사고라도 나시면 어쩌나... 나쁜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부정 탄 고사떡을 보낸 내 탓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로도 심심치 않게 시루떡을 했다. 특히 어머니와 시어머니께서 말린 호박고지를 챙겨주시기라도 하면 호박고지 시루떡이 드시고 싶다는 신호로 알고 해다 드린다. 스텐으로 된 큰 사각 시루에 잔뜩 해드리면 냉동실에 소분해서 두고두고 꺼내 드시니 그 또한 내 기쁨이다.
내 작은 재능이 누군가에게 큰 기쁨으로 이어지고, 누군가에게는 액땜의 기운이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복스러운 시작으로 이어진다는 것. 덕분에 힘든 줄 모르고 떡을 하던 시절이었다. 결국 떡을 하기 위해 떡을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떡을 했으니 떡은 사람이고 사랑이다.
집밥에 대한 글을 준비하며 첫 글은 꼭 시루떡에 대해 쓰리라 마음먹었다. 많은 이들에게 울림이 있는 글이 되기를,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글이 되지 않기를, 떡을 하던 때처럼 글을 쓰면서 나 역시 행복하기를 기원하는, 고사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