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속정이지!"
표현에 인색하고 무뚝뚝한 아버지의 성격이 엄마는 늘 불만이셨다. 하고 싶은 말도 꾹 참으시고, 해야 할 말도 '끙~'하고 넘어가시니 그 깊은 속을 헤아리는 것이 가족들에게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생일이나 특별한 날마다 손으로 꼭꼭 눌러쓰신 편지와 카드, 빳빳한 신권으로 주말마다 챙겨주시던 용돈에서나마 애정을 확인할 수 있었던 아버지.
권위적인가 싶다가도, 엄마의 잔소리에 아무 말 못 하고 바로 꼬리를 내리시는 모습을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가부장적인가 싶다가도, 일요일 아침상을 준비하시는 모습을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엄하고 무서운가 싶다가도, 술 한잔 걸치신 날 나와 동생 앞에서 흥겹게 트로트를 부르시는 모습을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여리고 마음 약하고 순하셨을 아버지.
아버지가 안 계시다면 제일 그리울 음식은 '보쌈김치'다.
아버지는 해마다 김장이 끝난 며칠 뒤에 보쌈김치를 하셨다. 손이 많이 가는 보쌈김치는 아버지만의 전매특허였는데, 안 그래도 정신없고 힘든 김장날 그걸 만들자고 하면 집안 가득 퍼질 어머니의 짜증과 잔소리를 감당하기 힘드셨기 때문에 시간차를 두셨으리라 짐작한다. 다 익고 나서 상에 올리면 어머니도 감탄하고 '하길 잘했다'고 인정하는 맛이었지만, 재료 준비도 만만치 않고 만들기에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니 당장에는 짜증날만 한 음식이다.
보쌈김치에 쓰이는 배추는 시중에 파는 절인 배추보다 통배추를 사서 절이는 것이 낫다. 속재료를 꼼꼼히 품으려면 초록잎도 붙어있고 면적도 넉넉한 겉잎이 충분히 준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예전에는 절인 배추를 팔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잘 절인 배추의 넓적한 겉잎들은 모두 떼어내 따로 준비해두고 노랗고 단단한, 달달한 노란 속잎들은 나박김치 만들 때의 사이즈로 썰어둔다. 무 역시 나박나박 썰어 절여둔다. 그 외에 미나리, 갓, 쪽파 등도 다듬고 씻어 무 길이 정도로 썰어 준비한다. 김장양념이 남았다면 그걸 써도 좋고 아니라면 마늘, 생강, 각종 액젓, 고춧가루, 찹쌀풀 등을 섞어 양념을 준비해둔다. 여기까지는 여느 김치와 다를 것 없는, 특별할 것 없는 재료 준비다. 보쌈김치 재료 소개는 지금부터가 진짜다.
한창 제철인 해물들이 필요한데 아버지가 항상 빼먹지 않던 재료는 굴과 낙지였다. 굴은 시중에 파는 큰 굴이 아니라 소굴을 준비하셨다. 화성 사강에 가셔서 큰 어시장 말고 뒷길로 들어가신다. 그러면 할머니들이 하우스 앞에 쭉 쪼그려 앉아 굴을 까고 계시는데 그중 한 분 앞에 떡하니 서신다. 마치 어제도 만났던 사람처럼 "굴 얼마여?"라고 물으시면 할머니도 시크하게 "얼마긴 얼마여, 굴값이지?"라고 답하신다. 그러면 아버지는 "거 좀 줘봐~"라고 하시고, 할머니는 "얼마나 필요한지 말을 해야 주지!"라며 검은 봉지에 까놓은 굴 소쿠리를 몽땅 담으신다. 옆에서 보는 내내 '두 분이 싸우시는 건가?'라는 생각에 조마조마했던 둘만의 대화가 끝나면 이미 거래는 성사된 거다. 그렇게 얼마만큼인지도 모를 굴과 지인이 보내준 낙지를 깨끗이 다듬고 씻어 준비한다. 또 하나의 특별 재료는 생태 살이었다. 생선가게에 가서 생태 한놈을 골라 회보다 얇게 살을 떠오셨다. 언젠가 생태에 벌레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질겁하는 가족들때문에 더 이상 사 오지 않으시기 전까지는 매년 준비하던 재료였다.
이렇게 모든 재료 준비가 끝나면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과정이다.
식탁에는 잘 버무린 속재료가 담긴 스텐 양푼, 배추 겉잎을 쌓아놓은 채반, 각각의 해물이 담긴 작은 그릇들, 밤, 대추, 잣 등의 고명이 준비된다. 집도를 맡은 외과의사가 수술방에 들어서는 모양새로 제법 비장하게 자리에 앉으시면 옆에 앉은 나머지 식구들은 아버지 앞에 국그릇 하나를 세팅해드린다. 그러면 아버지는 본격적인 수술에 들어가신다. 국그릇에 데친 미나리를 열십자로 얌전히 놓은 뒤 널찍한 배춧잎을 국그릇 밖까지 늘어뜨리신다. 그 위에 버무린 김치 속을 한 주걱 담고 각종 해물을 드문드문 놓는다. 다시 한번 김치 속을 한 주걱, 해물 한 칸, 그리고 다시 김치 속, 이렇게 담다 보면 국그릇 꼭대기까지 재료가 가득 찬다. 맨 위에 고명으로 낣작하게 썰어놓은 밤과 채 썬 대추, 잣을 넣고 나서 늘어져있던 배춧잎을 뚜껑처럼 덮어준다. 국그릇 바닥에 열십자로 깔았던 미나리를 모아다가 가운데서 묶어주면 끝! 이제야 보쌈김치 하나가 완성된다.
이렇게 하나하나 만들다 보면 재료가 바닥나고 김치통에는 예쁘게 가지런히 담긴 보쌈김치가 늘어났다.
"워낙 꼼꼼함이 필요한 작업이라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밖에 할 사람이 없다."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셨지만, 사실은 너무나도 귀찮고 지루한 작업이었기 때문에 모두 피한 것일 거다. 후딱후딱 버무리면 끝날 배추김치와는 달리 하나하나 정성과 시간이 들어가야 하는 김치... 이 지겹고 힘든걸 왜 매년 했느냐 하겠지만 한두 달 뒤에 밥상에 오른 보쌈김치를 맞이해본 사람이라면 포기할 수 없다는 걸 알 거다.
첫 보쌈김치를 먹는 날은 자못 경건하기까지 하다. 오목하면서도 넓적한 보시기에 큰 만두처럼 생긴 보쌈김치를 담는다. 보쌈김치를 안고 있는 미나리를 끊는 아버지의 컷팅식이 끝나면 덮고 있던 배춧잎을 조심스레 걷어내신다. 그러면 밤, 대추, 잣이 들어갔던 그대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고 보니 이 식순은 늘 아버지가 있어야 진행된 것 같다. 나와 동생만이 먹는 저녁밥상에서는 새 보쌈김치가 올라온 기억이 없다. 그만큼 귀하디 귀한 대접을 받았던 김치였다.
사이사이 숨어있는 해물을 찾는 재미도 있고 잘 삭은 해물들도 일품이지만 보쌈김치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바닥에 남겨진 큰 겉잎이다. 결대로 길게 찢어서 밥 위에 얹어먹으면 맵지도 짜지도 않으면서 해물의 깊은 맛이 스며있는, '굴뚤한' 맛이 전해진다. 물김치만큼이나 심심하면서도 깔끔한 김치 국물도 버리지 못한다. 젓갈을 많이 쓰지 않는 경기도 김치인데도 국물맛이 얼마나 깊은지... 엄마는 거기에 국수를 말아드셨다.
아버지의 보쌈김치 맛을 알아버린 남편은 몇 해 전부터 김장 때마다 나와 보쌈김치를 담근다. 그런데 영 그 맛이 안 나왔다. 양념이 너무 진해서 텁텁해져 버린 국물 맛, 전복까지 넣었어도 뭔가 아쉬운 맛이었다. 이건 어떻게 된 게 하면 할수록 느는 게 아니라 하면 할수록 아버지 김치가 그리웠다. 그러다가 지난해 말, 아버지가 담근 김치를 얻어왔는데, "역시~"가 절로 나오는 맛이었다. 옆에서 배춧잎을 깔아줄 딸들도 없고, 귀찮은데 일 벌였다는 어머니의 갖은 구박을 받아가며 만드셨을 그 보쌈김치는 단연 으뜸이었다. 마지막 겉잎 한줄기와 국물을 먹으며 깨달았다. 귀찮고 성가시지만, 맛있다고 코빠뜨리며 먹을 가족들을 생각하며 김치 안에 꾹꾹 눌러 담으셨을 아버지의 사랑, 그 깊은 정을 말이다. 시끌벅적함 없이 시계 초침 소리만 들리는 부엌 한편에서 쓸쓸히 보쌈을 싸시면서도 맛있게 먹을 사위, 딸, 손주들 생각에 콧노래를 부르셨을 그 적막함...
올 겨울 김장 때는, 꼭꼭 숨겨두셨던 사랑을 하나하나 꺼내먹었던 내가 남편과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가서 보쌈김치 보조를 제대로 해드려야겠다. 이번에는 우리의 사랑을 하나하나 꾹꾹 눌러 담아드릴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