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전에는 말이야.
비디오 가게라는 게 있었다. 회원 등록을 해놓고 보고 싶은 비디오를 빌려오는 방식. 신착 비디오는 일반보다 비쌌지만 나오기가 무섭게 대여가 됐기에 주인아줌마, 아저씨랑 친하게 지내야 했다. 주인아저씨랑 친하게 지낸 어떤 남자는 검정 비닐봉지에 쌓인 테이프를 은밀하게 주기적으로 건네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여자 친구에게 딱 걸려 얼굴이 붉어지는 일도 있었다.
빌려올 땐 신이 났어도 반납하기는 왜 그렇게 귀찮던지... 대여한 비디오테이프를 오랜 기간 반납하지 않으면 블랙리스트로 등록이 되어서 눈총을 받곤 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많이 틀어주던 율동동요 비디오테이프가 생각난다. 틀어주면 한 시간은 훌쩍 흘러갔는데... 아직도 흥얼거리는 동요들은 대부분 그때 세뇌당했던 곡들이다. "또~ 또~"를 얼마나 외쳐되던지... 플레이가 끝나면 자동으로 테이프를 뱉어냈는데 그 구멍으로 각종 장난감을 잔뜩 넣는 바람에 고장이 자주 났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15년 전쯤인가...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이 서서히 사라지더니 DVD라는 것으로 교체가 됐다. CD처럼 생겼는데 비디오테이프보다 화질도 좋고 속도 조절도 돼서 좋았던 신문물. 전용 플레이어를 사야 했지만 앞으로는 DVD로만 봐야 하는 세상이니 기분 좋게 장만했다. 한번 사면 천년만년 쓸 텐데 뭐 하면서.
DVD를 빌리는 방식도 비디오테이프와 같았다. 신작 비디오 빌리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것도 같았다.
한번 꽂힌 영화나 만화를 무한 반복 감상하는 습관이 있던 아이들 때문에 아예 DVD를 사주기 시작했다. 주로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을 많이 사주었다. 벅스 라이프, 니모를 찾아서, 토이스토리, 몬스터 주식회사, 카등 주옥같은 영화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벅스 라이프를 얼마나 좋아하던지... 가장 너덜너덜해졌다.
애니메이션 시기를 지나고 난 아이들은 각종 시리즈에 꽂혔다.
해리포터, 엑스맨, 나니아 연대기, 캐리비언의 해적, 트랜스포머 등... 본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뽕을 뽑고 봤다. 아이들 핑계에 나의 소장욕까지 더해져 하나 둘 사다 보니 양이 만만치 않아졌다. 애니메이션은 조카들에게 물려주었는데도 말이다..
그 많은 걸 거들떠도 안 본 지 어언, 5,6년 됐을까? 동네마다 있던 DVD 가게가 사라진 시점과 비슷할 것이다. TV에 워낙 많은 영화채널이 생겼고 대여료를 결제하면 TV에서 바로 플레이가 되는 VOD 서비스가 시작됐다. 동시에 전용 플레이어로 DVD를 재생시키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게 됐다. 휴대폰으로 어디서든 원하는 영상을 볼 수 있는 요즘엔 더더욱 찾지 않는 물건들이다.
그럼에도 버리지 못하고 거실 한구석을 지키고 있는 DVD 플레이어와 서랍장을 꽉 채운 DVD.
이들을 디지털 문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아날로그 감성이 물씬 느껴진다.
리모컨으로 홈 메뉴에 들어가 각종 카테고리를 오가며 제목을 검색하는 대신, 서랍에 가지런히 놓인 DVD를 보면서 오늘 같은 날은 무얼 볼까를 고민한다.
별점이나 후기를 검색하며 다수가 인정한 영화를 고르는 대신, DVD 케이스 겉면에 빼곡히 쓰여있는 영화 설명과 배우 이름들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버튼 하나면 플레이와 일시정지가 자유자재로 가능하다는 것은 같지만 플레이어에 DVD를 넣고 부드럽게 회전하는 소리를 들으며 화면이 뜨기를 기다리는 시간에는 경건함마저 느껴진다.
모든 네트워크가 끊어진 미래의 어느 날.
통신사와의 연결도 끊겨 TV를 켜도 지지직 거리는 화면만 나오고 휴대폰도 먹통이 되며 넷플릭스든 유튜브든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는 바로 그 날이 오면.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유유히 DVD 플레이어를 TV와 연결하고 외부 입력으로 전환할 것이다. 보고 싶은 영화를 하나 골라 재생을 시키고 얼른 마루에 옹기종기 모여 앉을 것이다. 오징어를 굽던 나는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를 외치며 합류할 것이고, 그제야 다 모인 우리는 이불 하나를 사이좋게 나눠 덮고서 오징어를 씹으며 영화를 감상하겠지...
그날을 대비해 절대 버리지 못하는 DVD들과 플레이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