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서 못 버리겠소...

by 늘봄유정

"끼야악~~~ 언니~~~~"

흡사 아이유가 나타날 때 들려올 법한 소리. 아이유는 귀도 호강시켜주고 구구절절 심금을 울리는 가사로 마음의 위로도 주는 사람이니 충분히 누군가의 열광적인 외침을 들을만하다. 그런데, 연예인도 아니고 뭣도 아니던 평범한 여고생 시절 나에게 열광하던 이가 있었으니, 한 학년 후배 재은이었다.


고등학생 때 사춘기가 온 나는 어떻게 하면 가장 아름답게, 극적으로, 혹은 슬프게 죽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머리가 아플 땐 영화에서나 봤을법한 뇌종양으로 죽는 거 아닌가 기대를 해봤고 길가다가 큰 덤프트럭이 날 덮치는 상상을 종종 하곤 하던, 철없던 시절이다. 돌이켜보면 특별히 그럴만한 사정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기억에 남는 불우한 상황이래 봤자,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딸에게 마루 끝에서 끝으로 걸레를 던지시던 어머니나, 등교 준비하며 팝송을 크게 들어놓은 딸에게 지나가며 한마디 하던 아버지, 혹은 그들 부부의 잦은 싸움 정도가 생각날 뿐이다. 학교생활에도 큰 문제는 없었고 짝사랑만 줄곧 해댔으니 이별통보를 받을 일도 없었다. 신변을 비관할 만한 무엇이 없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우울했다.


그러다가 2학년이 됐을 때, 나를 좋아한다는 1학년 후배가 생긴 것이다. 쉬는 시간 빛의 속도로 매점에 뛰어가면 이미 내가 좋아하는 빵을 사들고 서서 날 기다리던 아이. 반 앞에 와서 편지와 초콜릿을 전해주고는 수줍어하며 총총 사라지고, 멀리서 몰래 날 바라보면서 발을 동동 구르던 아이. 아무 이유 없이 날 좋아해 주던 후배 덕분에 마치 연예인이라도 된 기분에 휩싸여 살았던 기억이 난다. 쇼트커트 머리로 머슴아처럼 점심시간마다 농구를 하던 나에게 동성애 비슷한 야릇한 감정을 품었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져주고 환호해 주던 사람이 있다는 것에 고마울 따름이었다. 내가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 준 고마운 아이.


어쨌든 날 좋아해 주는 후배에게 조금은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발동했다. 공부를 잘하는 선배이고 싶었고, 밝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덕분에 내 고등학교 시절이 조금은 행복해졌다. 그 친구가 내 고3 생일 때 손수 만들어 선물했던 털실 가방을 버리지 못한 이유다.

버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 버릴 수가 있겠는가. 이유 없이 삶을 비관하던 나에게 '언니가 언니라서 좋아요~'라는 메시지를 보낸 귀한 사람의 선물이 아닌가.


못난 나는 그렇게 귀한 사람을 챙기지 못했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연락이 끊어졌고 인연을 이어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제는 길에서 만나도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미안함과 고마움 때문에 다시 잘 싸서 장롱 깊숙이 넣어둔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아직까지도 간직할 만큼 고마웠노라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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