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현장에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ri Taeeun Kim Oct 31. 2023

동네 사람들은 여담재를 ‘그들만의 놀이터’라 불렀다

더리포트 독점기고

“아휴, 말도 마. 문 닫아걸고 자기들끼리 뭘 하는지, 동네에선 그들만의 놀이터라고 흉봤어”(50대 여성), “커피도 공짜로 마시며 책도 마음대로 볼 수 있다고 했었는데, 문이 열렸어야지”(60대 여성), “매일 남편과 그 앞 공원에서 운동하고 지나다니면서 매번 저건 뭘까 했는데, 그게 여담재였어요? 우리 그 건물 바로 보이는 아파트 살아요”(40대 여성), “운영 중단 찬성합니다. 하는 일도 없고 예산만 낭비하고 있습니다”(60대 남성)


국내 최초 여성사전문도서관을 표방하며 종로구 창신3동에 문을 열었던 ‘서울여담재’가 10월31일 폐관한다. 앞서 27일 이미 영업을 중단했다. 여담재가 없어지는 것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막아보려 애썼지만, 여성계와 여성 사학계는 물론, 일대 주민들의 반응도 차가웠다. 초대 관장 A의 운영 방식을 보며 익히 예상했던 바지만 서울시가 위탁업체를 바꾸고 관장을 새로 부르면 되리라고 생각했다. 폐관에 정치적인 이유가 크다고도 하나 여성 사학계가 뭉쳐 목소리를 내거나 주민들이 자신들이 편히 이용하던 시설이 없어진다는 것을 반대하면 그렇게 쉽게 폐쇄될 수는 없었다.

도로 접면부에서 본 여담재 1층

여담재의 진가는 해외 여성사학계가 먼저 알아봤다. 지난 8월 2대 관장 B는 갑작스러운 손님을 맞이하게 된다. 어느 일본 여성사학자가 여담재라는 여성 공간이 서울에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난 후 방문했다. 그는 여담재가 세워진 곳의 역사적 배경에 특히 감탄했다고 한다. 조선 6대 임금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의 설화가 얽힌 자주동샘(자지동천)과 거북바위가 있는 곳이다. (단종 유배 후 궁에서 나온 정순왕후는 생계를 위해 자주동샘에서 옷감을 염색해 팔았고, 그를 돕기 위해 인근 여인들이 여인 시장을 꾸렸다고 한다. 조선시대 여성의 경제활동을 기념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다. 샘 바로 위에는 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정순왕후가 단종이 거북을 타고 승천하는 꿈을 꾸고 이곳에 왔더니 바위가 있더라는 설화가 전한다) 그의 방문기를 본 호주의 유명 일본여성사학자 베라 매키가 찾아오겠다고 했는데 문을 닫게 된 것이다. 국제적 명승지는 아니더라도 관광지로 충분히 부각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여담재는 4년여의 노력을 들여 겨우 탄생한 ‘여성역사공유공간’이다. 1983년 지어졌다가 2003년부터 버려진 옛 원각사 부지를 2012년 서울시에서 매입했으나 관리가 되지 않아 비행 청소년들이 모여드는 장소가 됐다. 서울시의 공모로 서울시건축상(2021년 우수상)을 받는 신구동서조화의 건축물이 완공됐으나 쓰임을 찾지 못했다. 결국, 건축가가 위원장이 돼 서울시 공무원, 지역주민들과 함께 운영위원회를 조직해 다양한 운영 방법을 모색하게 됐다. 조선시대 여성 역사 기록을 간직하고 있는데 착안해 여성사 연구, 교육, 행사를 위한 공간 및 여성사와 어린이 도서관으로 결정됐다. 이 과정에서 건축가는 거북바위의 형상을 딴 책장 등 내부 공간을 무료 설계했다.

지하 2, 3층에 숨겨진 여담재 본관

근린공원과 비우당, 세 덩이로 이뤄진 여담재 건물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한 원설계자의 배려도 돋보인다. 이 지대는 남쪽에서도 오를 수 있었으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후엔 커다란 옹벽이 생겨 북쪽의 낙산길에서만 접근할 수 있게 됐다. 대로변에서 보이는 유일한 1층, 나무와 콘크리트로 만든 A동의 외벽 두 면에 투명한 유리의 폴딩도어을 설치해 지나가는 이들이 드나들기 쉽게 한, 주민 친화적 설계가 돋보인다. 2020년 서울시가 민간위탁기관으로 여성예술단체 C를 선정하고, C의 이사장을 맡는 A가 후배들에게 양보받아 여담재 관장으로 취임하면서 미술 전시를 하겠다고 나서며 폴딩도어가 막히게 된다. 지하 2층 거북바위 모양을 본뜬 책장을 철거하고 전시 공간으로 쓰겠다는 주장을 원설계자가 강력히 만류하자, 1층 폴딩도어 두 면 내부에 두꺼운 가벽을 설치했다. 그러면서 열린 공간을 지향하는 건축물 본연의 특색이 퇴색하고 닫힌 공간이 됐다. 밖에서 볼 때는 한옥을 리모델링한 지하층의 숨겨진 공간을 상상할 수도 없고, 그냥 두꺼운 철문으로 막힌 컨테이너 같은 창고 하나 놓인 것 같은 외견이 돼버렸다.


A는 2019년 이사장을 맡았던 한 영화제에서도 “초창기부터 소수의 이사를 중심으로 폐쇄적인 이사회를 구성·운영하고 권한을 독점해 왔다”며 ‘구태의연한 운영 방식’을 지적하는 집행위원회와의 갈등 끝에 결국 사임했었다. (여성신문 2019년 3월13일자 등 참조) 그러나 위의 지적과 일치하는 그의 독선은 반성 없이 지속했던 것 같다. 여성, 여성주의, 여성학, 여성사의 차이에 대한 인식도, 공부도 없이 독단적 운영을 반복했다. 특수공간에 대한 애정이 없었고, 건축을 예술로 존중하지 못하고, 건축가의 원 의도를 헤아리지 못하고 공간을 파괴한 것도 일종의 반달리즘이다.

비우당이 옮겨진 자리 뒤로 자주동샘과 거북바위가 보인다

‘여성사’ 공간의 개관전시가 C단체의 대표를 맡고 있던 여성 화가의 동양화전으로 시작한 것부터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후 미술품 전시도 A 나이 또래의 60~80대 작가로 채워져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 중 하나는 몇 개월 전 인사동 갤러리에서 있었던 전시를 다시 가져오는 얕은꾀를 썼다. 일반 전시나 프로그램도 수십 년간 쌓여온 국내 여성사 연구 실적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채 20세기 말 유행한 초보적 이야기만 되풀이했다. 2022년 말 고령을 이유로 관장 퇴임 전 가진 전시는 자신이 참여해 온 여성문화운동에 관한 것으로 채워졌다. 홈페이지 여성사자료실에 올려진 여성인물자료들도 네티즌들이 작성한 ‘나무위키’를 퍼오는 등 성의가 없는 것이 많았다. 구술자료사업 역시 자신을 포함한 또래와 문화 관련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들이 많았다. 개관전부터 C단체 회원들 위주로만 초대됐다. 여담재를 단체의 모임 활동 장소로 썼다는 증언도 나왔다. 자신의 사욕과 치적을 위해 자리와 공간을 탐했다는 의혹을 피할 수 없다.


문을 닫아걸고 있다 보니 인근 숭인근린공원(동망봉)에서 종로구청 주최로 2008년부터 ‘단종비 정순왕후 문화제’가 꼬박꼬박 열리고 있음에도 이런 프로그램이 있는 줄도 모른다. 정순왕후가 말년을 보낸 정업원 터와 영조가 이를 확인하고 친필을 써 세운 비석과 같은 문화재가 몇백 미터 떨어진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까. 종로구에는 활용하고 아울러야 할 역사적 장소와 사료가 곳곳에 널려있는데도 애초 자기 욕구에만 충실히 하고 있으니 공간의 의미와 여성사적 흐름 등에는 감감했다. 배고픔을 참고 여성사를 공부해 온 이들과의 교류는커녕, ‘지역 활성화를 위한 주변 시설과 협력 네트워크 형성’이라는 주요 업무는 오리무중이 됐다. 최신 역사 대중화 붐, 지역 역사 찾기와 답사 바람, 건축과 공간에 관한 관심 상승 등에 발맞춰 함께 부상해야 마땅한 여성사의 위상을 이끌어야 할 가장 큰 임무에 대한 인식이 있었을지는 궁금하다.

거북바위 모양을 딴 여담재 내부의 책장

서울시 감사에서 낮은 점수를 받아도 이의제기도 하지 못하고, 다른 여성학이나 여성사 관련 연구자들에게도 외면받아도 할 말이 없게 된 것이다. ‘그들만의 놀이터’라는 주민들의 신랄한 폭로도 그래서 나온 것일 테다. 올해 1월 취임한 후임 관장 B가 폐관과 관련한 온갖 잡무에 시달리며 발을 동동 구를 동안, A는 자신이 만든 C단체의 활동과 확장에만 열을 올렸다. 퇴임 직후 지방에 C단체의 지회를 발족했고, 서울시에서 공식적으로 폐관 통보를 받은 5월에도 A는 6월 있을 C단체의 30주년 기념 후원의 밤을 준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현 정부 하 여성가족부 공모사업에도 지원해 공연을 여는 등 C의 이름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혈세를 들여 공들여 만든 공간을 마음대로 망치고 유용하다가 철새 떠나듯 떠나 버리고, 또다시 세수를 우린 사업으로 철 지난 구태가 지속한다. 애초 전 시장 하 서울시가 공공 공간에 대한 개념이 없는 운영 주체를 제대로 검증하지 못한 것도 문제다. 현 시장 하 서울시가 낮은 감사 점수를 줄 수밖에 없게 만들어 가까스로 점유한 여성 공간 하나를 사라지게 만든 빌미를 준 노욕에, 뒷감당해야 할 사람들은 속만 태울 수밖에 없다. 서울시는 3년 동안 위탁운영을 맡았던 C단체가 빠지자 여담재의 문부터 닫아걸었고, 후속으로 무슨 사업을 할지조차 결정하지 못했다. 건축가는 수년간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 비어있다가 그냥 철거돼 버릴까, 눈물을 삼킨다. 그동안 마련한 여성사 서적 등 수천 권의 장서와 비디오 자료들은 갈 바를 모르고 있다. 여담재의 마지막 전시작가가 됐던 이충열 미술작가가 서울시 양성평등담당관에게 여러 차례 민원을 넣었지만 “우리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다”는 답변만 반복하고 있다고 한다. 온전한 책임을 다 물을 수는 없겠지만 책임을 나눠야 할 사람은 쏙 빠지고, 한국여성사에 크나큰 오점이 될 이 사건은 그냥 묻혀버리게 되는가.


김태은 작가

‘3·1 민족성지 태화관은 어떻게 여대가 됐나; 여성공간의 상징 태화여자관 101주년’ 저자



매거진의 이전글 이관처도 없이 문 닫는 서울여담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